기업은 조직을 경영한다. 조직도나 조직기술서 등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그 안에 숨쉬고 있는 사람들로 만들어진다는 의미다. <톰피터스 탁월한 기업의 조건>(2022년)에서는 조직의 경영에 있어 가장 중요한 핵심이 “탁월함(Excellence)"에 있다고 한다. 이 책에서 톰 피터스는 숫자로 증명하는 성과주의에는 뚜렷한 한계가 있으며 지금 시대는 이를 통해 탁월함에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기업이나 국가가 탁월함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조직이 작동하는 원리를 알아야 한다. 이에 관해 톰 피터스는 “강한(hard) 것은 약하고, 부드러운 것(soft) 것을 강하다”고 강조한다. 하드한 힘은 수치, 계획, 기술 등이고 소프트한 힘은 가치, 관계, 문화 등을 가리킨다. 즉 하드 파워가 강해도 소프트 파워가 약한 기업은 탁월한 기업이 될 수 없다는 것이 톰 피터스의 주장이다. 탁월한 기업이 되기 위해서는 조직의 가치, 구성원들 관계, 이들 사이에 공유되는 문화와 같은 소프트파워에 중심을 두고 구체적인 경영전략을 실행해가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소프트파워는 곧 공동체의식을 말한다. 조직 내 배려, 훈련, 인정과 같은 관행은 공동체의식이 강한 조직을 만들며 시장에서도 승리를 이끈다는 것이다.
한국식 모순경영
경영 조직에서 소프트파워의 핵심은 ‘커뮤니티’이다. 커뮤니티는 관계로 이루어진다. 어떤 조직이든 매개와 소통의 관계적 기능을 통해 목표를 성취한다. 이 점에서 한국기업은 공동체를 중시하는 관계주의 속에서 개인의 주체성을 발현하는 방향으로 경영하여 선진국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뜻밖의 한국>(2022년)에서 유건재 교수는 한국식 경영의 ‘모순’을 밝히면서, 한국은 산업화과정에서 집단주의와 개인주의를 결합시킴으로써 커다란 성취를 이룩했다고 하고 했다.
흔히 미국식 경영, 일본식 경영이란 말이 탄생한 것은 1970년대부터라고 한다. 경영학자들이 일본식 경영이라 부른 방식은 철저하게 집단적 의사결정이 주를 이루기 때문이다. 이런 시스템에서는 합의를 중시하기 때문에 의시결정이 지연되는 경우가 많지만, 일단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면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된다. 이런 특징은 개인보다는 집단을 우선시하고 그들이 속한 집단에서 정체성을 찾는 집단주의라고 한다. 이런 일본식 경영은 1980년대까지 위세를 떨쳤으나 199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한계에 부딪혔다는 것이다(뜻밖의 경영, 46-47쪽).
이와 달리 미국식 경영은 개인주의를 기반으로 한 창조성 발현을 우선시한다. 스마트폰 역시 미국의 개인주의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정확히 말하면 ‘애플이 스마트폰을 산업화했다’는 표현이 맞을 테지만, 그 기반에는 급진적인 발상이 자유롭게 실험되고 그 실험을 도전해볼 수 있는 개인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시스템화하여 기업운영에 잘 구현될 수 있는 성과제도 및 경력 개발 제도를 만든 것이 미국기업이다.
공동체적 개인주의
일본식 경영과 미국식 경영에서 본 바와 같이 조직에서 개인과 집단은 중요한 차이를 낳는다. 그런데 한국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모순적 상태에서 긴장관계를 유지한 채 서로의 특징을 종합하여 생산방식과 관리방식을 바꾸어왔다는 것이다. 지난 2010년 프랑스 소르본대학 도미니크 바르조(Dominique Barjo) 교수는 한 심포지엄에 참석해서 삼성의 경영에 대해 “이병철 회장은 한국의 신유교주의와 일본식 경영과 독일식 생산방식, 미국식 관리방식을 종합해 독창적인 경영모델을 창조했다”고 말했다. 여기서 신유교주의란 한유교의 전통적인 가족주의와 공동체주의를 말한다. 한국식 경영은 이런 관념을 기업에 적용하여 독특한 조직문화를 형성해왔다는 분석이다.
집단주의와 패스트팔로워
유건재 교수는 한국인이 집단을 중시하는 경향을 가지면서도 그 집단에 함몰되지 않고 개인의 주체성을 발현하여 한국경제의 성장을 이룩해왔다고 강조한다. 이 가운데 집단주의는 제조업 분야에서 패스트 팔로워 전략을 구사하는 데 적합했다. 구성원들이 하나로 똘똘 뭉쳐 제품을 가공해야 하므로 개인적으로 흩어진 조직에서는 이런 전략이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의 집단주의는 ‘공동체 속에 존재하는 관계’에서 의미를 찾는다. <어쩌다 한국인>(2020년)의 하태균 교수에 의하면 한국인은 내가 속한 기업이나 공동체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희생하는 데 주저함이 없지만, 동시에 자신만의 자리를 잊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로 살아야만 직성이 풀린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주체성이 강한 개인이라는 특징을 가진다.
한국기업의 상징이었던 패스트팔로워 전략은 이런 집단주의가 반영된 최적인 현상이다. 일단 리더가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리면 대부분 빠른 실행에 돌입하며, 문제가 있다면 뛰면서 수정한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 사례가 한국의 반도체 공장 설립이다. 일본은 반도체 공장을 짓는데 2년 정도가 걸렸던 반면, 삼성전자는 6개월 만에 완공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수행 과정에서 개인의 개성과 목소리가 무시되었던 것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산업화 시대에 신속한 의사결정과 과감한 투자, 빠른 실행 등은 집단주의의 긍정적인 효과였으나 그 과정이 지나치게 경색되어 상사의 눈치를 보는 문화가 자리잡는 폐단이 되기도 했다. 이런 조직에서는 직원 개개인이 자율적으로 일을 처리하기보다는 상사의 눈치를 보고 그 의도를 먼저 파악하는 데 급급하며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것을 꺼려하는 문화가 정착된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 기업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형식적 보고와 회의가 늘어나면서 불필요한 야근이 많아진 것도 집단주의 병폐이다. 연공서열 역시 집단 논리를 우선시하는 폐단으로 지적된 지 오래다. 한 마디로 한국인의 주체성은 산업화 시대 기업과 비교하여 뒤로 후퇴한 셈이다.
모순을 아우르는 변환적 기업
지난 시대 집단주의 전략은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시대가 변했다. 공정혁신에 초점을 맞춘 품질경영은 표준화된 공정을 성실하게 관리하며 불량품을 줄이는 방향으로 노력하면 되었다. 그러나 이제 한국기업은 새로운 산업과 제품을 창조해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제품 혁신과 공정 혁신을 동시에 이룩하기 위해 개념설계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온 것이다.
제품 혁신은 제품 설계에 의해, 공정혁신은 생산 방식의 설계에 의해 이루어진다. 전자는 특허와 같은 지적 재산권(IP)이고, 후자는 제조업 기술 혁신이다. 이렇게 이질적인 두 가지 비즈니스 형태를 동시에 잘 해내려면 조직 구조, 리더십, 인력의 특성을 분석하여 재배치해야 한다. 사실 미국 기업들은 주로 지적재산권(IP)을 설계하여 팔고, 중국 기업들은 주로 저부가가치 기술로 물건을 제조하여 팔았다. 하지만 이제 중국은 고부가가치 기술로 방향을 선회하여 한국을 앞서나가기 시작했으며 미국은 자국보호주의로 방향을 바꾸어 한국기업에 불이익을 안기고 있다. 이 점에서 한국기업은 제조기술을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바꾸고, 지식재산권에서도 후진을 넘어 선진으로 도약해야 한다.
하지만 제조기술과 지식재산권은 양립이 매우 어려운 형태들이다. 미국의 인텔이 7나노 이하 반도체 제조를 포기하고 반도체 설계만 하게 된 이유, 대만의 TSMC는 설계는 안하고 반도체 제조만 발전시켜서 세계적인 반도체 수출기업이 된 이유가 한정된 자원을 집중 배치하는 선택적 전략에서 나온 것이다. 이에 반해 삼성은 반도체 설계도 하고 제조도 한다. 문제는 메모리 반도체에서 비메모리 반도체로 시장을 확대하려 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삼성은 2018년에 비메모리 시장 점유율 확대를 위해 파운드리 공장을 짓는데 133조원을 투자했다. 하지만 비메모리 반도체의 설계 역량이 부족하여 지지부진한 상태이다. 이 부분에서는 미국의 월등한 반도체 설계 역량을 따라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최근 이재용 부회장이 미국의 ARM 인수를 적극 검토한다는 뉴스가 보도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삼성이 ARM 품으면 비메모리도 초격차…칩 설계까지 섭렵하나 (한국경제, 2022. 9.22)
이 점에서 시몽동의 변환적 사고가 한국기업의 새로운 경영 전략으로 모색될 수 있다. 앞서 소개한 바와 같이, 변환은 양립이 불가능한 요소들이 가지는 차이와 모순을 매개하는 인식 작용으로서 둘 사이를 관계 맺게 하는 시스템을 발견하는 사고 방법이다. 세계적인 기업 가운데 기업 내부의 모순을 유지하면서도 그것을 무기 삼아 새로운 사업으로 확장한 사례가 여럿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