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많이 오거나, 저녁 스케줄이 있거나, 일이 아주 늦게 끝나지 않는 한 거의 매일 걸으려 한다.
애매한 부슬비가 내리는 날도, 몸이 조금 아픈 날에도 어김없이 운동화를 신고 집을 나선다.
최소 일주일에 3번 이상은 걸으려 노력하는데 부지런한 걸음으로 한 눈을 팔지 않으면 2시간이 조금 넘고 걸음 수로는 15,000보~16,000보 사이가 된다. 결코 짧은 거리는 아니다.
처음부터 하루 10km였던 것은 아니다.
6km ~ 12km 사이를 이리도 해보고 저리도 해보다 요즘에 정착한 거리가 이 10km인 것이다.
5km를 가는 동안에는 대체로 핸드폰으로 밀린 일들을 한다.
일단 이어폰을 끼고 음악앱을 열어 플레이를 하는 것으로 시작해 확인하지 못하고 쌓인 알림들을 확인하고, 급하게 쇼핑할 물건을 고르기도 하고, 낮에 찾아보려 했던 자료들을 찾아보기도 한다.
또 유튜브를 보거나 가끔은 SNS를 하기도 하고 분주했던 마음을 내려놓으며 집중하는 마음으로 카톡을 하기도 한다.
브런치의 글을 읽기도, 또 얼마 전 시작한 영어 회화 앱을 열어 잠깐의 공부를 하기도 한다.
5km 지점에 다다르면 그제야 핸드폰을 끄고 고개를 들어 주위를 한번 돌아본다.
벌써 이만큼 왔구나. 하며 주변을 탐색하고 안 가본 길을 기웃거린다.
여기가 거기지. 맞아... 여기였구나. 하며 장소에 묶인 기억을 끄집어내곤 한다.
다시 5km를 걸어 돌아오는 길엔 이어폰을 빼고 그 길에서 나는 소리를 듣는다.
소리에는 소리만 있는 것이 아니어서 길을 걸으며 오가는 다른 사람들을 보고 길가에 흩어진 냄새를 맡고 온도와 습도와 밀도까지 오롯한 공기를 피부로 느끼게 된다. 그것은 내가 다른 세계에 살고 있지 않다는 현실감을 가장 빠르고 쉽게 일깨운다. 핸드폰과 이어폰으로 내가 단절시키고 내가 쌓았던 성 안에서 훔쳐보기만 하던 화면 너머의 세상은 사실은 이것이라는, 여기에 존재한다는 날 것의 것으로 시각화되어 다시 공감각화된다.
귀를 조금 쉬게 하면 다른 것이 내 안으로 들어온다. 그것은 음악이 주는 것 이상의 감정을 내게 건네준다.
그 길을 걸으며 나는 미처 정리되지 못했던 널브러진 생각들을 차분차분 곱씹어 정리한다.
하나부터 열까지 나란히 줄을 세우고 원인과 과정과 결과를 되짚어 본다.
이러한 것들이 나를 어지럽히는 근본의 이유가 무엇인지,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며 그래서 이제는 어떻게 할 것인지.
그래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나는 과연 그렇게 할 수 있는가까지.
바다에서 돌아온 어부가 그물을 쫙 펼쳐 놓고 걸린 생선들을 하나하나 털고 걷어 취할 것과 버릴 것을 고르듯. 가득 찼던 그물을 비워내고 다시 깨끗한 그물로 만들어 본연의 역할로 돌아가게 만들듯.
나는 주렁주렁 매달린 생각의 조각들을 털어 내가 납득이 될 때까지 그것을 바라보고 분석하고 이유를 찾는다.
개운하게 돌아오는 날도, 그렇지 못하는 날도 있지만 이 시간은 나에게 꽤 중요한 시간이 된다.
집중해서 생각하는 대로 살지 못하면 그저 사는 대로 생각하며 살아지는 날들이 되기 때문이다.
돌아오는 5km는 때론, 역설적이게도 그 반대의 길이 되기도 한다.
생각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버리기 위해서 걷는 길이기도 하다는 얘기다.
산재한 생각들이 너무 많아 머리가 아파올 때, 매일매일 보태지는 생각들에 숨이 막힐 것 같을 때, 그 조각들이 너무 많아서 덩어리를 골라 잡기조차 힘이 들 때, 엉킨 실타래의 끝이 어딘지조차 도저히 찾을 수 없을 때, 차라리 그 모든 생각들을 내려놓고, 잊고, 멀리하기 위해 아무것도 떠올리지 않는 무(無)의 상태가 되기 위해 걷기도 한다는 말이다.
그래야 좀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야 좀 눈이 떠질 것 같아서. 그래야 좀 고개를 들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서 그러자고 그렇게 걷는 길이 되기도 한다.
말하자면, 생각을 하기 위해서도, 생각을 버리기 위해서도 나는 걷는 것이다.
내가 걷기를 시작한 것이 3, 4년 전쯤이었던가.
온몸에 우울과 무기력을 휘감고 있을 때였다.
삶의 모든 어둠들이 나에게 몰아쳤고 그 어둠을 물리칠 힘이 나에겐 없었다.
그저 어둠을 뒤집어쓴 채 그것을 매일 조금씩 소진하는 날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조금씩 덜어냈다고 생각했지만 어둠에는 가속도가 있는 것인지 그것은 버린 것보다 빠른 속도로 보태어져 덩치를 키워갔다. 잔인했다.
어둠이 짙어질수록 힘이 든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그것을 지켜봐야 하는 것도, 그것을 감당해야 하는 것도 모두 세상에서 가장 가깝고 소중한 사람의 몫이었다.
무엇에도 온전한 마음을 줄 수 없었다.
하루 종일, 정말이지 하루 종일, 침대 위에만 누워 있었다.
누워서 무얼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나는 언제나 침대 위였다.
먹지도 자지도 말하지도 씻지도 못했다.
그러다 시작한 것이 걷는 것이었다.
이렇게 지내는 것조차 질식할 것 같은 마음에 시작한 일종의 도피였고 내가 나를 일으키기 위한 그저 최소한의 명분이었다.
- 오늘의 목표는 /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입고 양말을 신고 현관까지 나가는 것.
- 오늘의 목표는 /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입고 양말을 신고 현관까지 나가 운동화를 신는 것.
- 오늘의 목표는 / 새벽에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입고 양말을 신고 현관까지 나가 운동화를 신고 산책로까지만 나가 보는 것.
- 오늘의 목표는 / 새벽에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입고 양말을 신고 현관까지 나가 운동화를 신고 산책로까지 나가 벤치에 앉아 시를 한 편 읽고 오는 것.
- 오늘의 목표는 / 새벽에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입고 양말을 신고 현관까지 나가 운동화를 신고 산책로까지 나가 벤치에 앉아 시를 한 편 읽고 1km만 느리게 아주 느리게 걸어보는 것.
처음은 쉽지 않았다. 현관까지 나가는 그 시작을 하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
한 가지를 이뤄내기 위해 며칠을 애썼고 익숙해지면 조금씩 목표를 더했다.
느리게 느리게 1km, 2km... 그렇게 하루 5km를 걷게 되기까지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오전을 내내 걷는 일과 그 부차적인 일로 보냈다.
명상을 했고, 일기를 쓰고, 하루를 계획하게 되었다.
산책길에 앉아 책을 읽고, 차를 마시고, 드러누워 하늘을 올려다보고 바람을 느꼈다.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았고 내가 누구인지를 잊지 않게 되었고 미래를 꿈꾸게 되었다.
결국 나를 행동하게 했고, 나를 변화시켜 나갔다.
걷는 것은 나를 살린다.
단순히 몸을 움직이는 육체적 운동에 그치지 않는다.
치유의 시간이자 채움의 시간이고 또 비움의 시간이다.
걷는 시간을 통해 나는 나를 어루만지고 나를 지켜낸다.
내가 나에게 건넬 수 있는 최고의 위로이고 내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현명한 사치이다.
그날들에 양재천이 있었다.
잊고 지내다가도 마음이, 몸이 힘들어지는 날에는 언제고 운동화를 신고 그 길 위에 선다.
많은 것이 필요치 않다. 운동화와 한두 시간의 시간, 그것이면 족하다.
그 길이 나에게서 먼 곳에 있었다면 아마 나는 시작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시작했더라도 계속 이어지지는 못했을 것이고.
나를 포기하지 않고 살리는 일을 시도조차 해보지 못한 채 여전히 어둠 속에 칩거하고 있을지도.
어제 이 길을 걸으며 그간 오로지 나에게만 집중하느라 이 길의 아름다움을 미처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계산적이고 삭막한 도시에서 그 편의와 안락함을 공짜로 누리는 고마움도 모르고 말이다.
처음으로 이 길을 찬찬히 꼼꼼히 들여다보았다.
마치 오래된 애인을 바라보듯 느리고 깊게 느꼈다.
내가 이 도시에 사는 한, 이곳을 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모순의 계절, 여름이 길다.
오늘같이 예상치 못한 소나기가 내리는 날은 그 모순이 더 짙게 느껴진다.
이제 곧, 유난한 올해의 여름이 끝나고 시원한 가을이 오기를 소망해 본다.
< doopedia.co.kr >
양재천 [良才川]
길이 18.5 km. 과천시 중앙동(中央洞)의 관악산 남동쪽 기슭에서 발원하여 북동쪽으로 흘러, 서울 서초구 ·강남구를 가로질러 탄천(炭川)으로 흘러든다. 본래 이 하천은 한강으로 직접 흘러들었으나, 1970년대 초 수로변경공사에 의해 탄천의 지류로 수계가 바뀌었다. 옛 이름은 공수천(公需川:또는 公須川) ·학탄(鶴灘:학여울) 등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현재의 이름은 서울 서초구 양재동을 흐르기 때문에 붙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