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에서도 한번 살아보지, 뭐

조금 돌아가도 괜찮아

by 희연

캐나다에서도 한번 살아보지, 뭐

5. 조금 돌아가도 괜찮아


중요한 건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야


영어 점수가 나왔다. 다행히 두 번 만에 필요한 점수 이상을 받았고, 덕분에 캐나다에 있는 어느 학교에 지원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다.


처음 캐나다 유학, 이민을 결심했을 때는 수의 테크니션(Vetrinary Technician; 수의 보조)을 전공으로 공부해볼까 생각했다. 해보고 싶었던 공부이기도 하고 취직도 잘 된다고 하고, 어쨌든 이것도 기술은 기술이니, 배워두면 꼭 캐나다가 아니어도 다른 나라 어디를 가서도 써먹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래서 이래저래 검색을 통해 캐나다의 수도인 오타와에 앨곤퀸 컬리지 Algonquin College가 캐나다에서 수의 테크니션으로 가장 유명한 학교라는 걸 알게 되어, 막연히 그쪽을 목표로 잡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캐나다 유학 박람회를 여러 군데 다니며 좀 더 구체적인 정보를 수집했는데, 소위 유학, 이민 전문가들의 말에 또 마음이 흔들리곤 했다.


"유아 교육이나 시니어 케어 쪽이 수요가 많고 취직이 잘 돼요."

"요리나 호텔 매니지먼트가 요즘 트렌드랍니다."

"역시 기술을 배워야죠, 특히 개발자가 되면 돈도 잘 벌어요."


아이들 돌보는 걸 좋아하지 않는 내가, 어르신들과 친해지기 어려워하는 내가, 과연 유아 교육이나 시니어 케어를 공부하고 직업으로 삼았을 때 버틸 수 있을까? 집에서도 요리를 겨우 할까 말까 한데, 요식업에 종사할 수 있을까? 다년간 서비스업에서 아르바이트하며 깨달았던 것은 서비스업에 종사하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는 것인데, 서비스 중 서비스라는 호텔 매니지먼트 쪽 일을 내가 견딜 수 있을까? 내 컴퓨터 바이러스도 잘 해결하지 못해 빌빌대는데, 개발자가 될 수나 있으려고?

나의 마음을 쥐고 흔드는 것이 유학원 상담사들의 일이었고, 그들은 아주 잘 해냈다. 내 능력치를 의심하면서도 상담사들과 대화할 때마다 나는 이것도 할 수 있고 저것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자꾸 들었기 때문이다. 까짓것, 애들 돌보는 거 평생 할 거 아닌데, 하루에 뭐 8시간만 하면 되나? 개발자? 나라고 못 되겠어? 집에서 일할 수 있다면 그게 정말 최고지. 서비스업 아르바이트할 때 스트레스는 받았지만, 너무 잘 해내서 늘 사장님이 나를 이뻐하셨는데, 호텔에서 일하면 최고의 호텔리어가 될 수도 있지.

귓가에 쏙쏙 꽂히는 유학원 상담사들의 말에 마음이 하루에도 열두 번씩 오락가락했다.


결국, 질문은 처음으로 돌아갔다.


<나는 왜 캐나다를 가려고 하는 거지?>


행복한 삶을 꾸려 보고 싶어서 가기로 정했잖아. 그러려면 캐나다에서 영주권을 1차 목표로 삼아야 했다. 영주권이 있어야 안정적으로 캐나다에 정착해서 살 수가 있으니까.

그렇다면 영주권을 따기 쉬운 직업을 목표로 학교에 가야 할까? - 결국, 깨닫게 되겠지만, 그 어디에도 '영주권을 따기 쉬운 절대적인 직업'이라는 것은 없다. 모두 상대적이니까. 어떤 사람들에게는 시니어 케어를 공부해서 취직하고 영주권을 따는 것이 쉬울 수 있겠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려울 수 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싫어하는 것들을 억지로 버텨가며 하기 위해 캐나다를 가는 게 아니었다.

그러면 좋아하는 일, 처음 막연한 목표로 삼았던 수의 테크니션을 쭉 바라보며 직진해야 하나? 그러자니 내 앞에 있는 현실의 벽이 너무 높았다. 예산과 시간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수의 테크니션이 2년 과정이긴 하지만, 이공계 출신이 아닌 나는 1년짜리 생물학 과정을 추가로 들어야 했다. 학교만 총 3년을 다니게 될 텐데 비싼 학비와 생활비를 감당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나이는 하루가 다르게 들고 있으니, 영주권에서 나이 점수가 조금이라도 덜 깎이려면 졸업을 빨리하고 취업해 경력을 하루라도 더 많이 쌓는 것이 유리했다. 그러니까 내게는 시간과 돈과 에너지가 부족했다.


현실적인 대안은 무엇이 있을까? 고민은 여기서 막혔다. 결국, 친구가 일하던 유학원 사장님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그 유학원 사장님은 내가 1000만 원만 들고 캐나다로 유학, 이민을 가겠다고 생각 없이 설치고 다닐 때, 나를 말려주신 고마운 분이셨다.


"웬만한 학과는 어느 학교든 다 있다고 보시면 돼요. 그래서 원하는 학과를 먼저 선택하고 그 학과가 유명한 학교를 고르는 것보다는, 일단 어느 학교에 갈지 정하는 것이 더 쉬울 수 있어요. 물론 해후 씨가 어떤 학교가 가고 싶다거나, 어떤 학과로 반드시 가야겠다고 결정한 게 있다면 그대로 밀고 나가도 좋지만요. 그런 게 아니라면, 개인적으로 토론토에 있는 세네카 컬리지를 추천하고 싶어요. 국제 학생 비율이 높아서 국제 학생을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이 잘 되어 있고, 비교적 한국인이 적어 다니기 편할 거예요."


유학원 사장님은, 대도시에 있는 학교에 다녀야 그 후에 취직이 어렵지 않다는 말로 밴쿠버와 토론토를 후보에 먼저 올려 주셨다. 내 마음이 토론토로 좀 더 기울어있는 것을 눈치채고는 토론토에 있는 공립학교를 추천해 주셨다. 그다음엔 함께 나란히 앉아 세네카에 있는 학과를 A부터 Z까지 하나하나 짚어가며 골랐다. 학과 이름을 먼저 보고 관심이 생기는 것을 몇 개 추려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상세 설명 살피며 후보를 9개 학과로 압축할 수 있었다.


1) Event and Media Production

2) International Transportation and Customs

3) Services Management

4) Meetings, Conventions & Events Specialization

5) Environmental Technician

6) Early Childhood Education

7) Recreation and Leisure Services

8) Social Service Worker

9) Social Service Worker - Gerontology


이 아홉 가지 학과를 한눈에 비교해 볼 수 있도록 유학원 사장님께서 꼼꼼히 챙겨 메일로 보내주셨고, 찬찬히 읽어본 후에 최종 결정을 내렸다.


International Transportation and Customs (TCS)

국제물류통상 및 관세학과다.

Seneca college 홈페이지에 나온 학과 상세 설명

학과를 결정하는 데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내 흥미도였다. 즐겁게 공부할 수 없는 종목이라면, 애초에 버틸 수 있을지도 미지수거니와, 버텨서 졸업하고 취직을 한다고 해도 문제가 될 것이 뻔하니까. 더불어 학과 커리큘럼에서 코업 과정의 유무와 졸업 후 취업 연계 가능성도 고려 대상이었다. 마침 이 학과가 취업률도 좋은 편인 데다가 세네카 컬리지가 토론토에서 관세 과목으로 유명하다고도 했다. 더불어 학기 중 성적이 좋으면 코업도 옵션으로 선택할 수 있었다.

또 무역 분야라면 어릴 적에 어느 정도 관심을 둔 적도 있어서(영어 공부에 흥미를 가졌던 사람들의 숙명이랄까!) 공부도 충분히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무역업이라면 기술직은 아니어도 세계 어디서나 통용되는 직무를 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도 있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었다.


하지만 역시 처음 하고 싶었던 수의 테크니션을 완전히 덮어두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꼭 수의 테크니션이 아니어도 동물에 관한 공부를 더 하고 싶은 욕심이 어느새 자라 있었다. 이런 욕망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지만, 나의 현실을 고려하면 당장은 어렵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조금만 돌아서 가볼까? 우선 TCS를 전공하고 졸업해서 취직하고 돈을 벌며 생활하다가 영주권을 따는 거야. 영주권이 있으면 캐나다 내의 컬리지 학비가 국제 학생에 비하면 1/3~1/4 가까이 적게 들고 또 안정적인 상황에서 하는 공부가 더 잘되지 않겠어? 조금 늦는다고 해서 틀린 길은 아니니까. 그리고 그사이 마음이 바뀌어, 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아니 오히려 더 마음이 굳건해져서 수의 테크니션보다 더 공부를 많이 해야 할지도 모를, 수의사 공부를 해볼 수도 있잖아. 어쨌든 조금 천천히 가자. 나는 아직 내 긴 인생 여정의 절반도 안 왔으니까.


그렇게 내게 여유를 주기로 했다.


천천히 지치지 않고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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