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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리 공감 - 김보람

지금까지 이야기하지 못했던 것들을 이야기하면서

by 희연

생리 공감

김보람


스물두 살 때, 다니던 학교의 총여학생회에서 일회용 생리대 공동구매 사업을 진행한 적이 있었다. 지방에서 상경해 근근이 살아가는 자취생에게는 생리대는 어쩌면 사치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값이 비쌌고, 공동구매를 통하면 시중에서 구입하는 것에 비해 저렴하게 대량으로 구입이 가능했다. 그렇게 구입한 생리대를 종이가방에 담아서 가지고 나왔는데, 하필 집에 들를 시간이 없어 수업이 마칠 때까지 그대로 들고 다녔다. 그게 문제가 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당시에 사귐을 하던 A군이 기겁을 하며 생리대를 가려야 한다고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그는 "생리대를 보고 남자들이 야한 생각을 한다."라고 했다. 이해가 되지 않았고 황당할 뿐이었다. 남자들이 생리대를 보면 생리대는 여성의 팬티에 붙이는 것이고, 그러다 보니 여성의 성기에 직접 닿는 것이라는 연상을 해서 야한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이 그의 논리였다.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고, 그를 벌레 보듯 보며, "네가 그런 생각을 하니까 그렇게 보이는 것 아니냐."라고 핀잔을 주었다. (물론 그는 모든 남자들의 변명 '나는 그런 남자들이랑은 달라!'을 시전 했으나...)


이제는 안다. 이 세상에는 정말로 생리대를 보고 야한 생각을 하는 남자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때는 그런 생각을 하는 남자들은 심각한 변태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주변에 흔히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P. 39 생리하는 여성은 생리가 일상적인 몸의 일인데도 자궁과 생식기를 가진, 남성과 차별되는 '성적인 존재'로 인식된다. 생리가 삽입 성관계 때에도 사용하는 질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어떤 인터넷 댓글을 보면 생리를 몽정과 같은 선상에 두어 무상 생리대를 요구할 거면 몽정을 위한 크리넥스도 제공하라는 말도 있다. 몽정은 성적 흥분의 결과이다. 생리는, 아니다. (중략)
처음 탐폰이 세상에 나왔을 때 남성들은 탐폰이 젊은 여성들의 자위를 부추길까 봐 염려했다. 생리는 몸의 자연스러운 생명 활동인데도 질 안에 무언가를 넣는다는 생각 때문에 곧바로 자위를 떠올린 것이다. 그렇게 생리는 남성들에게 임신, 섹스, 질을 떠올리는 성적인 행위로 여겨졌고, 이런 의식은 거의 전 세대를 아우르는 보편적인 정서가 되었다.


<생리 공감>은 생리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피의 연대기>를 만든 감독이 영화를 알게 된 사실들과 있었던 이야기들을 글로 풀어낸 것이다. 다큐멘터리는 작년에 개봉을 했으나 상영관이 많지 않아 개봉 사실을 알았지만 볼 수가 없었다.

책에 대해서는 이번에 알게 되어서 읽었는데, 구구절절 감동과 공감이 이어졌다. 또한 내 몸에서 일어나는 일이었음에도 나조차 몰랐던 많은 사실들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어느 나라에서 태어났는지에 따라 선택지를 제한받는다. 이것은 비단 생리에 관한 이야기만은 아니지만, 유독 여성들에게 주어지는 선택지는 더욱 극명하게 차이가 난다. 가령 한국에서 나고 자란 여성들에게는 초경 때 일회용 생리대 이외의 다른 생리용품의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는다. 스스로 찾아보고 사용하려고 해도 현실과 마음의 벽은 높다. 사회적 편견의 벽은 또 어떠한가. 청소년기의 여성들이 탐폰을 사용하려고 해도 "너무 어린 나이에 탐폰을 쓰면 질이 늘어난다"거나 "처녀막이 훼손될까 봐 염려"되는 걱정들을 들어야만 한다.

생리혈은 원래 '붉은색'이다.

나의 초경에는 아버지가 케이크와 꽃, 그리고 생리 팬티를 구입해 오셔서 선물로 주시며 집에서 조촐한 파티를 했다. 멋쩍고 쑥스러우면서도 기괴하다고 생각했다. 화장실에 갈 때 생리대를 주머니에 숨겨 가야 하고 다 쓴 생리대는 돌돌 말아서 아무도 보지 못 하게 버려야 하는데, 나의 초경은 축하를 받았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생리의 취급은 딱 이 정도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여성은 아이를 낳는 몸이기 때문에 귀중하지만, 여성의 생리는 존중받지 못하고 생리 휴가 오남용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없애야 한다는 이야기를 한다.

글쎄 이것을 사회적 시스템의 부족이라고 얘기해야 할까, 아니면 개개인의 지식이 부족한 탓을 해야 할까. 물론 둘 다 이겠지만, 무엇보다도 이 두 가지의 환상적인 컬래버레이션으로 피를 흘릴지도 모르는, 피를 흘리고 있는, 피를 흘렸던 모든 여성들이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다.


P. 73 학교에서는 어리다며 가르쳐 주지 않았고, 대학에서는 그건 각자의 몫이라며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다. (중략)
대학이나 직장에서 사람들은 애매모호한 말로 자기 욕망을 포장한다. 섹스가 하고 싶다고 정확하게 말하면 상대도 정확하게 거절하거나 합의할 수 있다. 하지만 문명사회를 살아가는 성인 간의 대화는 그렇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폭력이 벌어졌을 때 사실 내 마음은 그게 아니었다고 내 말의 기표를 보라고 증거가 어디 있냐며 피해자를 추궁한다. 나는 그렇게 대학교 내 성폭력이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무방비 상태에서 성인이 된 우리는 도처에 있는 폭력에 노출된다. 함께 몸교육을 받고 자랐어야 할 남성들 또한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할 수 없는 처지기 때문에 이런 말을 술자리에서 서슴없이 내뱉는다.
"아 나 **학번 걔랑 잤어." (중략)
부당한 폭력이 발생해도 여성들은 다른 여성에게 말할 수 없다. 이곳은 문명사회이기 때문이다.

올해 4월, 나는 난생처음 생리컵을 구매했다. 그 이후로 생리를 세 번 했는데, 세 번의 생리컵 시도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어쩐지 영 불편하고 자꾸만 피가 새는 것이, 내게 알맞은 생리 용품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만 들었다. 이 책에서는 조언해준다. "생각한 것보다 더 깊이 넣어야 한다."고. 어디서도 얻지 못했던 조언이었다. 말도 안 되는 얘기일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다음 생리가 기다려진다. 다시 한번 제대로 생리컵을 써보고 싶다는 마음에 들떠있다.

생리컵을 시도하면서 나의 마음가짐에도 변화가 있었다. 내 생리혈을 싫어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전에 일회용 생리대에서 탐폰으로 옮겨갔을 때만 해도, 생리혈이 더럽지만은 않다는 생각까진 할 수 있었다. 여전히 냄새가 나고 징그럽고 싫다는 느낌은 남았지만. 생리컵을 사용하기 전에는 질에서 자궁경부까지의 길이를 측정해야 하는데, 생리기간 중에 손가락을 넣어서 확인하는 방법이 가장 보편적(?)이다. 거기서부터가 시작이었다. 피가 흐르는 내 몸속에 손가락을 넣어서 길이를 재고, 피가 묻어 나온 손가락을 씻으며 생각했다. 나쁘지 않은데?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이었음에도, 여성들은 생리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여전히 하고 살아왔다. 한 달에 한 번 꼴로 일어나는 '나쁜 일'로 치부하였고, 감추고 숨기고 부끄러워하며 살았다. 사실은 그러지 않아도 되고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나의 몸을 긍정하는 시간을 모두가 가질 수 있게 된다면, 이 책에는 그보다 더 큰 의의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성의 생리를 바라보는 동서양의 종교, 그 부정적인 인식이 소름끼칠 정도로 닮아있다.

2016년 뉴욕에서는 무상 생리대 법안이 통과되었고, 비슷한 시기 한국에서 '깔창 생리대' 기사가 나오며 저소득층 청소기 여성들을 위한 생리용품을 여기저기서 지원하기 시작했다. 깔창 생리대 기사를 읽고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난다. 정말 너무 절망적이고 가슴이 아파서 울지 않을 수 없었고, 그때보다야 지금은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그들에게 현실은 가혹할 수도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그저 좋은 책을 읽고 사람들과 생각을 나누고, 글을 써서 여러 사람들에게 책을 읽어볼 수 있게 이야기하는 것 정도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을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읽게 되는 날이 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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