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여행
- 가자, 제주도.
종이 위 아무렇게나 쓰여있던 글씨를 구겼다. 수업 시간에 몰래 내 공책에 끄적거린 너의 낙서 같던 제안을 보며, 나는 웃었다.
우리는 제주도를 가기로 수없이 약속했다. 이번 여름엔 꼭 가자, 기말고사만 치면 진짜로 가자, 다음 연휴 때 갈까?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날 중에서 단 하루를 온전히 서로에게 쏟지 못해서 우리는 아무 데도 갈 수 없었다.
이미 약속을 적어둔 종이처럼, 그때의 감상도 퇴색되었다. 이게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알지만 갑자기 떠나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지금이라도, 그래 지금이라도. 아니, 지금이어야만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충동이었다. 너는 종종, 제주의 아름다운 해변과 웅장한 한라산을 이야기하며 눈동자가 빛났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제주도를 사진 속 이미지로만 떠올리면서 나는, 바람 한 점 느껴지지 않는 바다에서 스며드는 소금기를 애써 상상해 보았다. 어느새 제주로 향하는 비행기 표를 끊었다. 당장 세 시간 후에 출발하는 비행기였다.
나는 원래 이렇게 충동적인 사람이 아니야. 구겨진 메모 위에 변명을 얹었다.
알아. 너의 구겨진 목소리가 다정하게 속삭였다.
공항까지는 넉넉하게 한 시간 반 걸린다. 짐을 거창하게 꾸리지 않았다. 신분증과 카드가 든 작은 손지갑을 배낭에 넣었다. 속옷 두 벌과 양말 두 쌍, 잠옷으로 입을 캐미솔 하나를 집어넣었다. 가방이 퍽 가벼웠다.
여기에도 여행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될까?
대답할 리 없는 너에게 질문을 했다. 너는 웃으면서 내가 이름 붙이기 나름이라고 말했겠지.
제주에 도착하니 아주 까뭇한 밤이었다. 저녁 시간이 지나서 밥 먹을 곳을 찾기 어려울 것 같았다. 어차피 배가 고프지도 않았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다가 당장 바다를 보러 가야겠다고 마음먹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너의 이야기에 등장한 제주의 바다는 푸르고 산뜻했다. 바람이 그 위로 불어서 시원하다며, 한여름에 가면 뜨거운 햇살 아래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여름 정취를 느낄 수 있다고 했다. 가장 좋아하는 바다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공항에서 택시를 잡았다. 애월? 애월로 가 주세요, 아저씨.
택시 기사는 나를 흘쩍 바라보더니, 애월 어디요? 물었다. 글쎄요, 아저씨, 애월 바다를 보고 싶어요. 기사는 혀를 끌 차더니 차를 천천히 움직였다.
애월은 물가에 뜬 달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해안선이 초승달처럼 동그랗게 떠 있다고, 가장 좋아하는 바다라며 내게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던 너의 웃는 얼굴이 선명하다.
그렇게 웃는 얼굴로 너는 먼저 작별 인사를 했다. 나는 엉엉 울며 이게 어떻게 우리의 이별일 수 있냐고 화를 냈던 것 같다. 너는 변함없이 웃으면서 이제 정말 가야 한다고만 했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났어. 이게 꿈이 아니면 대체 뭐가 꿈일 수 있을까. 네가 없이 나는 살아갈 수가 없는데, 나를 두고 네가 어디를 가야 한다는 거야. 딴 여자가 생겼니? 그런 거라면 차라리 얘기를 해.
새끼 잃은 짐승이 울부짖듯이 울었지만 너는 나를 모르는 사람처럼 돌아섰다. 남겨진 나는 바닥에 쓰러진 채 그대로 사라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라진 너를 찾아 온갖 곳을 헤집고 다녔다. 졸업하고 몇 년이나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던 대학 동기들도 수소문했다. 네가 살았던 서울의 모든 동네를 뒤지고 다녔고, 너의 고향인 속초에도 여러 번 다녀갔다. 겨우 찾은 너의 흔적은 너무 가느다랬다. 근거 없는 소문들로 허공을 떠돌고 있는 그 희미한 실마리를 생명줄처럼 잡아당겼다. 어떤 모습이어도 너를 보고 싶었다.
너는 이미 나를 만날 수 없는 사람이 되었지만, 나는 그래도 너를 만나러 갔다.
병 이름은 너무 어려워서 잊어버렸다. 호흡기를 얼굴에 두르고, 목구멍엔 이상한 관이 꽂혀 있었다. 곱던 너의 온몸에 이상한 기계 장치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말랑말랑하고 통통했던 손가락은 뼈만 앙상하게 남았다. 그 손가락을 하나하나 쓰다듬으면서, 이번에 나는 울지도 못했다. 내게 이별을 고하며 웃던 네가 생각이 났다.
우리의 진짜 이별에 내 심장은 이미 죽었다. 너의 비참한 모습을 내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거였겠지만, 그래도 나는 죽은 내 심장을 너에게 보여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인사하러 오길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손가락을 까닥여준 네가 너무 고마웠다. 눈은 뜨지 못했지만 너의 온 마음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 너에게 키스를 하고 싶었지만 네 입술은 이미 너의 것이 아니었다. 죽은 심장 대신 서러움이 가득 찼다.
다 왔습니다. 택시 기사가 건조하고 피곤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꿈에서 깨어나듯 정신을 깨웠다. 카드로 택시비를 지급하고 무거운 몸을 꺼냈다. 어둠이 깔린 작은 어촌 마을이 어스름히 보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파도 소리도 들렸다. 소리에 이끌리듯 해변 가까이 걸어갔다. 콘크리트로 된 낮은 계단을 세 개 내려가니 모래사장이었다.
모래가 바람을 타고 낮게 흔들렸다. 발목을 간지럽히는 느낌이 썩 좋았다. 분명 깜깜한 밤이었지만 바다와 모래사장의 경계는 선명히 보였다. 멀리 하늘과 바다의 경계도 손으로 그어 보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늘에 구름이 푸른빛으로 흔들렸다. 바다 위에 흰 구름이 자꾸만 나에게 다가왔다. 더 가까이 오라고 손짓하는 것 같아서 젖은 모래 위까지 올라섰다. 금세 파도가 덮치고 발이 순식간에 젖었다. 신발도 양말도 흠뻑 젖었다. 바지 밑단도 서서히 바닷물이 들었다.
너의 소식을 다시 들은 건, 네가 죽은 지 만 하루만이었다. 꼬박 24시간, 너를 지켜주던 사람들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기적처럼 의식을 회복한 너는, 생명을 유지 시켜주던 기계 줄을 다 끊고,
네가 나에게 이별을 고하던 마음이 이것이었을까,
홀로 병원 옥상에 올라가서,
난간에 서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바다가 보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몸을 던졌다.
그러지 않아도 죽는다는 걸 알고서 하늘을 날았던 너의 마음을 짐작해 본다.
너의 생은 이미 끝이 났다, 아마도 병을 선고받았을 때. 아마도 병을 선고받고 나에게 웃으면서 작별 인사를 할 때.
너의 주검을 수습하고, 장례식장을 수배하고, 너를 곱게 씻기고 입혀서 관에 눕힌 다음에야 나에게 네 소식을 전해주었다. 허겁지겁 달려간 어수선한 장례식장에서 나는 울지 못했다. 웃는 너의 영정을 두고 나 혼자서 울 수는 없었다.
차가운 바닷물이 발목을 적시고, 바지 밑단도 넉넉하게 적셨다. 파도가 밀려가면서 모래도 같이 데리고 갔다. 모래가 빠진 자리에 내 발이 깊숙이 박혔다. 파도가 다가오면서 다시 모래를 데리고 왔다. 발 위로 모래가 올라탔다. 신발 속으로 진득한 모래가 슬금슬금 들어왔다.
바람이 불어서 눈이 시렸다. 모래인지 먼지인지, 눈에 뭔가 들어갔다. 시려서, 아파서. 눈물이 흘렀다. 바닷물이 차가워서 내 눈물은 더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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