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혜다
지민 언니는 나에게 달빛 같은 사람이었다.
언니를 처음 본 건, 동아리를 홍보하러 언니가 속해있던 학보사에서 우리 반에 들어왔을 때였다. 자그마한 체구에 어떻게 그렇게 목소리를 힘차게 울려대는지, 점심시간이 끝난 후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꾸벅꾸벅 졸고 있던 나를 깨웠다. 안녕, 얘들아! 우리는 학교 교지 편집부 혜윰이야!
지민 언니와 상진 선배, 주훈 선배가 함께 들어와 각각 학보사에 관한 설명을 해주었지만 지민 언니만큼 귀에 꽂히는 목소리로 말을 하는 선배들은 없었다.
학교의 전통이라면 전통이라고 할까, 모든 학생은 빠짐없이 동아리를 꼭 하나씩 들어야 했다. 그중 학보사와 방송부, 사물놀이부와 연극부는 소위 ‘공식’ 동아리라며 취급을 달리 했다. 다른 동아리보다 일주일 먼저 부원 모집을 받고 저들끼리의 면접을 통해 새 기수를 뽑았다. 이 네 부서는 중복 지원이 되지 않았지만, 넷 중 하나에 지원했다가 떨어지면 이 네 부서가 아닌 다른 동아리에 지원해서 들어갈 수 있었다. 학생기록부에도 좋은 기록으로 남고, 활동을 하면 여러모로 가산점 혜택도 있다는 얘기가 있어 다들 한 번쯤은 지원을 했다.
나는 딱히 넷 중 어떤 동아리에도 마음이 가는 곳이 없었다. 지민 언니가 활기차게 돌아다니며 홍보를 하는 모습을 보기 전까지는.
키가 백육십이 채 안 되고, 전체적으로 얇고 가냘픈 인상이었던 지민 언니는 쉬는 시간마다 1학년 교실이 있는 층으로 올라왔다. 1학년이 입학한 지도 얼마 지나지 않은 3월 중순이었는데, 언니는 나보다 더 많은 1학년생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선배 안녕하세요, 선배님 안녕하세요! 언니, 또 올라왔어요? 꺄르륵 웃으며 지민 언니와 웃고 떠드는 동기생들을 보며 묘한 질투심이 솟았다. 나도 말을 걸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도무지 대화를 나눌 틈이 없었다. 지민 언니의 밝은 갈색 머리카락은 창문을 타고 넘어온 햇빛을 받아 늘 예쁘게 반짝거렸다.
같은 반 친구들도 다섯 종류로 패가 갈렸다. 학보사나 방송부, 사물놀이부와 연극부에 각각 지원하거나 그 넷 중 어디도 지원하지 않고 다음 동아리 홍보 때까지 기다려보겠다는 쪽이었다. 나는 마지막까지 망설이다가 결국 학보사에 지원했다. 지민 언니 같은 사람이 열과 성을 쏟는 곳이 어떤 곳인지 알고 싶었다. 지원한다고 해서 다 되는 건 아니니까, 지원만 해 보는 거야. 새로운 곳에서 새로 사귄 친구들에게는 그렇게 이야기했다. 다들 각자의 흥미에 따라 방송부나 사물놀이부, 연극부에 지원한 상태였다.
우리 학교는 산 중턱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런 곳에도 사람이 살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곳. 차를 타고서 산길을 따라 굽이쳐 돌아가는 길을 낑낑대며 올라간 후에야 낡은 학교 교정이 떠올랐다. 산 중턱에서, 황량한 바람이 거대한 운동장을 쓸면, 학교 건물은 담담하게 웃었다. 바람이 통과하는 소리였지만, 어쩐지 나에게는 웃는 소리처럼 들렸다. 운동장 아래쪽으로 나 있는 야트막한 계단을 통과해 내려가면, 기숙사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1층은 전교생을 먹이는 급식실이었고, 2층부터가 기숙사 건물이었다. 총 삼백여 명을 수용할 수 있었고, 그중 절반 이상이 고3이었다. 나는 1학년 때부터 기숙사에서 살았다.
기숙사는 3인 1실이었다. 대부분은 같은 학년들끼리 사용할 수 있게 배정을 해 주었는데, 나는 운이 좋지 않아서 2학년 언니 두 명과 함께 써야 했다. 운이 좋지 않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또래가 호들갑 떨며 친한 척하는 걸 견디는 것보다는 한참 어린 동생 대하듯 하나하나 신경 써주고 세심하게 배려해주는 언니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신입생인 나를 생각해 언니 둘이 2층 침대를 위, 아래 나누어 썼고 나에게 싱글 침대를 양보해 주었다. 소혜 언니는 이과였고 윤정 언니는 문과였지만 둘은 1학년 때 같은 반이었고 성격이 비슷해 쉽게 단짝이 되었다고 했다. 둘 다 1학년 때부터 기숙사에서 같은 방을 써서 더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며, 내가 동기생과 같이 방을 쓰지 못하는 것에 안타까움을 종종 내비치고는 했다.
둘은 내가 모르는 이야기를 소곤댔다. 내가 먼저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면, 둘은 방의 불을 끄고 책상 스탠드의 옅은 불만 켜 둔 채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눴다. 대부분 선생님을 욕하는 내용이거나 공부 때문에 스트레스받는 이야기, 각자 반에서 일어난 사소한 이야기들, 혹은 반 친구들 가십 같은 것들이었다. 그런 이야기들이 살금살금 들리면, 그걸 또 자장가 삼아 잠들었다.
소혜 언니와 윤정 언니 이야기 속에는 지민 언니도 가끔 등장했다. 별명이 뱁새라는 것도 여기서 알았다. 하얗고 작고 귀여운 게 할 말은 다 하고 사는 모습이 뱁새처럼 보였다던가. 애정 어린 별명과 지민 언니에 관한 평가 대부분이 긍정적인 뉘앙스여서, 나도 모르는 지민 언니의 모습을 자꾸만 상상했다. 선생님들을 귀찮게 쫓아다니며 수업 시간에 일어난 부당한 일에 대해 항의한다거나, 반 친구들과 의기투합해 점심시간에 피자 같은 걸 다 같이 시켜 먹으며 단합을 도모했다던가, 누가 모르는 걸 물어보기라도 하면 자신이 모르던 문제였어도 어떻게든 알아내서 가르쳐주고야 말았다는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나는 혼자서 지민 언니와 금방 친해졌다.
교내에서 지민 언니를 마주치면 나도 모르게 반갑게 인사를 할 뻔하다가 민망하게 고개를 돌린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러다가 지민 언니도 기숙사 생활을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소혜 언니와 윤정 언니를 학교 복도에서 마주쳐서 인사를 했는데, 마침 지나가던 지민 언니를 윤정 언니가 불러서 나를 소개해준 덕분이었다.
“얘가 우리 방 꼬맹이야.”
윤정 언니는 나를 자꾸만 꼬맹이라고 불렀다. 키는 윤정 언니보다 내가 더 컸지만, 그렇게 불리니 언니들 앞에서는 내가 자그마해지는 기분이었다. 지민 언니 앞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봄바람처럼 싱그럽게 웃으며, “네가 그 꼬맹이구나. 생각했던 것보다 작지 않은데?”하고 인사를 건넨 지민 언니 앞에서 나는 자꾸만 작아졌다.
앞으로 종종 마주치면 인사하고 지내자는 말에 나도 모르게 그래도 되냐고 되물었다. 언니들은 큰 소리로 웃으며 꼭 인사하라고 재차 당부하기까지 했다. 이런 것도 용기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도 모르게 지민 언니한테 편집부에 지원했는데, 꼭 들어가고 싶다고까지 말을 하게 됐다. 지민 언니의 표정이 더 환하게 밝아졌고, 내 두 손을 맞잡아주며, 지원해주어 고맙다고 꼭 면접 잘 봐서 같이 하면 좋겠다고 얘기했다.
지민 언니의 손은, 손가락은 꽤 말랑말랑했다. 내 손과 대 보면 한 마디씩 더 짧을 것 같았고, 작았다. 얼굴만큼이나 하얗고 부드러운 손이었다. 언니의 손에서부터 서늘한 감촉이 내 손바닥에 고르게 퍼져서 청량감까지 감도는 것 같았다.
동아리 면접을 보는 편집실에서 언니를 다시 봤다. 2학년 학보사 선배들이 한자리에 모인 걸 그때 처음 봤다고 하는 게 맞는 표현인 것 같다. 남녀 각각 4명씩 총 8명이었다. 부장은 남자 선배였고, 큰 키에 시원시원한 인상이었다, 그 왼쪽에 앉아 있던 지민 언니가 차장이라며 자신을 소개했고, 지민 언니 왼쪽으로 주훈 선배와 미희 언니, 도영 선배가 있었다. 부장인 현우 선배 오른쪽으로는 윤영 언니와 상진 선배, 세나 언니가 각각 앉아 있었다.
그때를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기억하고 있느냐 하면, 사실 이것 말고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기 때문이라고 밖에 말할 길이 없었다. 어떤 질문을 받았고 내가 어떻게 대답을 했는지, 내 옆에서 같이 면접을 봤던 애들은 누구였는지. 그리고 누가 어떤 대답을 했는지, 어느 순간 웃음이 터져 나왔는데 그게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도무지 하나도 기억이 나는 것이 없었다. 그냥 눈으로 사진이라도 찍은 것처럼 선배들이 앉아 있던 그 풍경만 박혀 있었다. 무엇보다도 지민 언니가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꼼꼼히 메모하며 듣는 모습이 떠나가지 않았다.
하얗고 작은 손으로 글자를 꾹꾹 눌러쓰고, 지원자들이 대답하면 그 사람을 응시하면서 눈빛을 반짝이고. 또 때때로 웃어주기도 하고 무언가 질문도 하면서 그 순간에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이 사람은 이렇게 모든 일에 다 열심일까? 모든 사람일에 이렇게 다 진심으로 열과 성을 다해 대하는 걸까? 이런 사람은 어떤 글을 쓸까? 더 알고 싶어 졌다고 하면 이상한 일일까.
나는 이 낯선 호기심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동아리 당락 발표는 면접 다음 날 바로 나왔다. 합격자 명단이 1학년 복도에 붙었다. 내 이름도 있었다.
내 이름을 확인하며 기뻐할 새도 없이 복도에서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지민 언니가 다른 1학년 학생들 여럿에게 둘러싸여 훌쩍거리고 있었다.
“너네 정말 열심히 준비한 거 다 아는데, 다 같이 하고 싶었는데, 우리가 이렇게밖에 못 뽑았어, 정말 미안해.”
나는 차마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멀리서 그 풍경을 한참이나 보고 있었다. 나와 같은 반인 친구도 있었고, 남학생도 두어 명 있었다. 다들 지민 언니 등이며 어깨, 팔을 토닥이고 쓸어주며, 더러는 같이 울기도 했다. 괜찮다며, 괜찮다며. 언니, 괜찮아요. 고마워요. 누나, 그래도 우리 인사하고 지내야 해요, 인사 씹지 마요.
상냥하고 따스한 기운이 감돌았다. 지민 언니는 자기 인생에 단 한 번 그냥 스쳐 지나갈 뿐인 사람들에게도 다정했다. 여기에는 어떤 계산도 들어있지 않았다. 순간의 자신이 느끼는 감정에 충실하고, 또 자신에게 감정을 내어준 모든 사람에게 충실했다. 나도 동아리에 합격하지 못했다면 저렇게 언니의 눈물에 위로를 받았을 거라는 생각에, 괜히 세상에 무서울 것 하나 없어진 기분이 들었다.
지민 언니는 하루 종일 1학년 복도를 쏘다니며 편집부에 지원했던 모든 1학년들을 만나고 다녔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며, 면접을 보았을 때처럼 눈을 마주 보고 손을 잡아주고, 진실한 한 마디를 건넸다. 떨어진 학생들에게는 위로를, 붙은 학생들에게는 축하와 같이 열심히 해 보자는 격려를 한 아름씩 안겨주었다.
누구도 이 사람을 싫어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봄바람이 조금 후끈해지기 시작한 때였다. 평소에 신던 운동화 밑창이 뜯어지는 바람에, 평소보다 등교가 조금 늦었던 월요일이었다.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전과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모든 반 학생이 나를 일제히 쳐다봤다.
키가 나보다 한 뼘은 큰 도연이 내 앞을 막아섰다.
“생각보다 더 뻔뻔하다, 너.”
도연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음을 흘렸다.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어 도연의 등 뒤로 보이는 교실과 도연을 번갈아 보았다. 교실 한가운데서 수희가 책상에 엎드려 울고 있었고, 몇몇 다른 친구들이 수희를 달래주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수희와 직접 감정 상할 일을 만든 적은 없는 것 같았다.
“너 수희가 정훈이 좋아하는 거 알면서 뻔뻔하게 정훈이한테 꼬리 치더라?”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차정훈, 같은 편집부 부원이라서 말을 트기 시작한 남자애였다. 지난 주말에 편집부 일 때문에 내내 함께 돌아다녔던 것을 누군가가 본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었어도 이따금 우리 반에 나를 찾으러 오기도 했던 친구여서, 아마 처음부터 나를 아니꼽게 봤을 것이다.
그 와중에 빌미를 제공하게 된 거였다.
“그냥 같은 학보사에 있어서 그렇지, 아무 사이도 아니야. 관심도 없고.”
아무렇지도 않게, 정말 아무렇지 않으니까, 감정을 전혀 담지 않고 말했다. 이게 대답이 되진 않았던 모양인지, 교실에 들어가려는 내 어깨를 도연이 양손으로 밀쳤다. 예상치 못한 동작이어서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드라마처럼 그 순간, 담임 선생님이 나타났다.
거기, 뭐야! 호통치며 달려오는 선생님과 나를 번갈아 보던 도연이 이를 갈며 교실 안으로 들어갔고, 나도 자리에서 금세 일어나 뒤따라 들어갔다. 선생님은 못마땅한 눈으로 나를 보며 소란 피우지 말라는 눈치를 줬다.
소문은 순식간에 퍼졌다. 석식을 먹을 때쯤엔 1학년 여학생들 사이에서 나는 이미 걸레짝이 되어 있었다. 같은 편집부 남자들 다 한 번씩 만나고 다녔다더라, 친한 친구가 좋다고 하는 남자마다 못 빼앗아서 안달인 썅년이더라, 이미 중학교 때부터 그런 쪽으로 유명한 애더라.
이런 수군거림은 차라리 견디기 쉬운 편이었다. 가장 힘든 건 수희가 나를 싸늘하게 바라보는 것이었다. 학기 초부터 죽이 잘 맞아서 매번 잘 어울려 다녔고, 학보사도 함께 지원할 정도였다. 어째서인지 나보다 더 열정적으로 학보사에 들고 싶어 했던 수희는 떨어졌고 내가 붙어버려서 사이가 미묘해지긴 했었다.
수희가 차정훈 얘기를 내게 안 한 것도 아니었다. 내게 다리를 놔 달라는 말까지 직접 한 건 아니었지만, 뉘앙스를 풍기긴 했다. 모르는 척 넘어갔던 게 화근이었을까.
사람에게 정 주는 것을 어려워했던 내가, 고등학교 들어와서 처음으로 정 붙이고 언제고 속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되길 바랐던 유일한 친구였다. 내 속 가장 깊은 곳을 보여줘도 너는 나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막 생기던 찰나였는데,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땅을 밟고 서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내 발밑에는 얇게 언 얼음이 파삭거리며 깨지고 있었다.
도저히 야자 시간에도 같은 교실에 남아서 공부할 정신이 들지 않았다. 수희의 훌쩍거리는 소리가 나를 향해 가시처럼 날아와 박혔고, 나는 그때마다 온 마음으로 그런 게 아니라고 해명을 했다. 아무도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것처럼 굴었다. 수희마저도 내가 하는 말에 귀를 막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 교실에서 도망치는 것밖에 없었다.
하지만 교실을 나와도 갈 수 있는 곳은 없었다. 기숙사로 돌아가려면 담임 선생님께 허락을 받고 귀사증을 받아야 했는데, 그러기엔 이미 시간이 늦어버렸다. 교실을 나와 화장실에 들어가서 쭈그리고 앉아 있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그러다 마침 교복 주머니에서 편집실 열쇠가 허벅지를 찔렀다.
그래, 이 시간이라면 아무도 없을 편집실을 가자. 화장실을 나와 발소리를 죽여가며 2층 동쪽 맨 끝에 있는 편집실로 살금살금 걸어갔다.
편집실의 불은 꺼져 있었지만, 남쪽으로 난 커다란 창에서 푸른 달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낡은 손잡이에 열쇠를 끼워 넣고 소음이 나지 않게 천천히 조심스레 돌렸다. 육중한 편집실 문이 가볍게 열렸고, 내 몸이 겨우 빠져나갈 만큼만 문을 열어 들어갔다. 문을 닫고 다시 잠그는 것도 잊지 않았다.
푸른 달빛과 노란 바깥 조명이 편집실을 채우고 있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고요만이 내 속에 침잠했다. 하루를 곱씹기에 알맞은 장소를 찾아왔다는 생각에 좀체 흥분이 가시지 않았는데, 한쪽 구석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코 훌쩍이는 소리. 누가 더 있나?
그때 편집실 한쪽 구석에 있는 책상 아래쪽에서 지민 언니가 천천히 기어 나왔다. 언니, 거기서 뭐 하세요? 불을 켜지도 못한 채 내가 먼저 물어보았다. 지민 언니는 다시 코를 한 번 훌쩍 머금은 다음에, 승아니? 하고 나를 확인했다. 야자 하기가 너무 싫어서 도망쳐 나왔어, 지민 언니는 배시시 웃었다. 나도 그만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책상 아래에서 대체 뭘 하고 계셨던 거예요?”
황당함을 숨기지 않고 물었다. 지민 언니는 잠잠히 말을 고르다가 대답을 붙였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면, 잠깐 숨어있기 좋은 곳이야. 내가 사라지고 싶은 밤에 나를 숨겨두기 좋은 곳이고. 빛이 너무 시리면 도망칠 곳이 필요해지니까. 쉬었다 갈 수 있는 안식처기도 해.”
언니는 무엇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던 거였을까. 나는 내 문제에 골몰해 있어 차마 지민 언니에게 괜찮은지 물어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어떤 말도 못 하고 있는 내 손목을 잡아끌어서, 지민 언니는 자신이 숨어있던 책상 밑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책상 밑은 생각만큼 좁아서 나와 지민 언니가 잔뜩 몸을 구겨야 둘 모두 비져 나오지 않고 쏙 들어가 있을 수 있었다.
웃음이 샜다. 언니도 이 상황이 우스운지 피식피식 웃었다. 편집실 바깥에서 누군가의 발소리라도 들릴라치면 너나 할 것 없이 입술 앞에 검지를 세워서 ‘쉬잇-’ 하고 숨을 삼켰다.
야자 시간이 거의 끝날 때 즈음되어서야 지민 언니와 편집실을 나섰다. 이건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해, 하고 지민 언니가 당부했다. 아무렴요, 이건 우리 둘만의 비밀이죠.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편집실 밖에서 만나면 웃으며 인사를 나눴다. 종종 야자 시간에 편집실에서 조우하면 그때처럼 책상 밑에 가만히 앉아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었다. 왠지 나는 지민 언니에게만큼은 위로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내 마음을 털어놓고 이야기하면 내 편을 들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그 꿈을 꾸기 전까지는.
처음에는 꿈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지민 언니는 일주일에 서너 번씩 내 기숙사 방에 놀러 와 내 침대에 앉아서 놀다 가곤 했다. 둘 다 집에 가지 않는 주말엔 침대에 나란히 엎드려 영화 같은 걸 같이 보기도 했다. 그래서 내 옆에 같이 누워 있는 지민 언니가 꿈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승아야.
귀에 대고 속삭이는 말씨로 지민 언니가 나를 불렀다.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대꾸하고 눈을 비볐다. 옆에 지민 언니가 모로 누워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콧잔등을 찌푸리며 웃었다. 눈가에도 주름이 졌다. 언니, 벌써 점심 먹으러 갈 시간이에요? 작게 우물거리며 말하는 내 얼굴을 지민 언니가 어루만졌다. 이마 끝에 걸린 머리카락을 쓸어 뒤로 넘겼고,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따라 볼, 광대, 입가, 턱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다시 검지 손가락으로 내 콧등을 만졌고, 코끝으로 따라 내려와 인중을 지나 입술에 닿았다.
입술에 닿은 손은 잠시 멈추었다. 눈을 깜빡였고, 지민 언니는 내 눈과 코와 입술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숨을 들이마신 순간, 지민 언니의 입술이 내 입술에 와서 닿았다. 부드럽고 촉촉한 입술이 포개졌다. 눈을 감으니 감각이 더 또렷해졌다. 지민 언니의 손은 내 목덜미를 지나서 가슴에 닿았다. 가슴 끝을 스치고 지나가고, 배를 훑고 내려갔다. 그리고 아래쪽에 서늘한 감촉이 닿았다. 입술을 비집고 혀가 들어왔다고 생각한 것도 그 순간이었다. 내 입술과 내 보지가 이렇게까지 뜨거울 수 있었나 싶을 정도로 화끈거렸다. 가느다랗게 소리가 새었다. 울음소리도 아니고 웃는 소리도 아니었다. 가슴에서 올라오는 따뜻한 무언가가 저도 모르게 비집고 나오는 소리였다. 신음소리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얕은 소리였다.
내가 그런 소리를 냈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옆에 누워 있던 지민 언니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입술과 보지에 감촉만이 현실처럼 진득하게 붙어 있었다. 볼과 입술, 그리고 보지에 열이 올랐고 팬티가 축축했다. 감각이 현실로 돌아오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심장이 거세게 뛰었고, 나도 모르게 거친 숨을 내뱉고 있었다.
동이 트기 직전이라 바깥이 어슴푸레했다. 핸드폰 시계를 확인해 보니, 새벽 5시 58분이었다. 2분 후면 기상 벨이 울릴 예정이었다.
프로이트가 지껄였던 꿈의 해석 같은 걸 어쭙잖게 읽었는데 정말 개소리라고만 생각했다. 욕망이 꿈으로 표현이 된다니. 그렇다면 배가 고픈 사람에게는 뭐든 잔뜩 먹을 수 있는 꿈이, 돈이 없는 사람에게는 돈방석에 앉는 꿈이 찾아간다는 건가. 그렇다면 지금 나의 욕망은 지민 언니와 키스라도 하고 싶어 한다는 거야? 아니야 그럴 리가 없지. 그런 게 아니라 요즘 언니랑 많이 친해져서 조금 착각하는 거야. 왜 청소년기에는 종종 친해지고 싶은 감정들을 연애 감정이라고 착각하곤 하니까. 나도 그래서 천둥벌거숭이 같던 옆집 남자애와 연애 놀이 같은 것도 했잖아?
꿈에서 깨고 기상 벨이 울릴 때까지도 나는 꿈의 의미를 애써 지우고 있었다.
그 꿈을 꾼 이후로는 지민 언니를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언니는 여전히 나에게 다정하게 굴었고, 나는 자꾸만 어색하게 웃으며 도망쳤다. 일주일에 한 번 동아리 모임에 나가서도 언니를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언니의 웃는 얼굴을 보면, 콧잔등과 눈가에 어리는 주름을 보면, 나도 모르게 꿈이 떠올라서 얼굴이 붉어졌다.
그날 지민 언니가 편집실에서 홀로 훌쩍이고 있었다는 사실마저도 까맣게 잊고 지냈다. 나에게 닥친 감정의 소용돌이를 처리하느라 도무지 다른 것들은 신경 쓸 겨를도 없었던 탓이었다. 내게서 등 돌린 친한 친구를 향한 배신감을 미처 처리하기도 전에, 지민 언니를 향한 미묘한 감정이 움틀거렸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나는, 아, 지민 언니를 좋아하는 거구나, 하고 깨달았지만 그 이상 무언갈 해야겠다는 생각은 할 수 없었다.
기말고사는 금세 다가왔다. 어수선한 감정을 가다듬기도 전에 폭풍처럼 몰아쳤다. 같은 방을 쓰는 소혜 언니와 윤정 언니는 책상에 앉아 스탠드를 켜고 꽤 오래도록 공부를 하곤 했다. 어스름한 불빛과 소근대는 소리에 나도 지금부터 기말고사 공부를 해야 하나 하는 초조함이 밀려와 종종 잠을 설치기도 했다.
유독 그런 날은 더 잠이 잘 안 드는 모양이었다. 언니들도 한껏 목소리를 낮춰 내가 들을세라 작게 이야기를 나눴다. 귀를 막고 잠을 청하려고 하던 찰나에 익숙한 이름이 튀어나왔다.
“2반에 지민이가?”
“쉿, 애 깰라. 응, 지민이가 9반 정우랑.”
“강정우? 방송부 부장? 강현우랑 쌍둥이인 걔?”
“어, 걔. 강정우가 박지민 따먹었다고 반에서 자랑에 자랑을 했다잖아. 기숙사 남자애들은 다 알걸? 강현우랑 사귀는 줄 알았는데, 박지민이 정말 그럴 줄 몰랐어. 그래서 난리 났잖아, 강정우 좋다고 쫓아다니던 여자애들이 오늘 점심시간에 박지민 머리채 끌고 갔어.”
“미친.”
더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일어나서 언니들 이야기에 화를 내며 따져들 수도 없었다. 눈이 떠졌고 숨을 천천히 골라가며 쉬었다. 지민 언니에게 있었던 일을 이런 식으로 듣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소혜 언니와 윤정 언니가 하는 말이 모두 진실이라고 생각 들진 않았다. 적어도 오늘 점심시간에 지민 언니에게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겠지. 부장인 현우 선배와 사귀는 사이였다는 것이라던가 그 쌍둥이라는 강정우 선배랑 어떤 일이 있었다던가 하는 건 믿기지도 않았고 믿고 싶지도 않았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날 홀로 울었던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을까? 요즘 부쩍 편집실에서 야자 시간을 때우는 것도 이 때문이었을까?
내 감정에 빠져 지민 언니 살필 생각을 못했던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날이 빨리 밝아서 지민 언니에게 달려가 언니를 꼭 안아주고 싶어 졌다. 언니, 언니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언니 편이에요, 하고 말해주고 싶었다. 눈물이 저절로 흘렀다.
지민 언니는, 그렇지만, 전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쾌활하고 밝고 상냥했다. 미소를 잃지도 않았다. 그래서 내가 먼저 언니에게 손 내밀며 위로할 수조차도 없었다. 다만 이따금 야자 시간에 편집실에서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위로를 보냈다.
언니는 결코 자기 얘기를 먼저 하는 법이 없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인 것처럼 에둘러서 표현했다. 혹은 모든 인간이 가지는 보편적인 고뇌 같은 걸로 포장했다.
“승아야, 사랑이 대체 뭘까?”
사랑, 사랑이라. 언니는 지금 사랑에 빠져있는 걸까? 언니, 저는 사랑이 뭔지 잘 모르겠어요. 인간에게 사랑이라는 그런 말랑한 감정이 남아있긴 한 걸까요? 제가 언니를 볼 때 느끼는 이 감정을 사랑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아니, 나는 감히 여기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었다. 나의 꿈은 그런 부드러운 것보다는 좀 더 단단한 욕정에 가까웠다고 생각했다. 그런 내가 사랑을 말할 수는 없었다.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언니는 어떻게 생각해요?”
“나도 잘 모르겠어. 그렇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상처 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어야 사랑이라는 이름 위에 감정을 얹어볼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상처를 받든 말든 신경을 쓰지 않는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겠다, 그치?”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는 자신에게 상처가 되는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심장이 저릿했다.
그 시절을, 친구도 없이 홀로 다녀야 했던 외로운 날들을 내가 버틸 수 있었던 건 달빛으로 가득 찬 밀회 덕분이었다. 비록 오래 지속되지 않았지만.
지민 언니에 대한 나쁜 소문은 순식간에 교내에 퍼졌다. 나이 많은 유부남을 만난다더라, 기숙사에 있는 모든 남자랑 한 번씩 다 했다더라, 남자랑 못해서 안달이 난 애라더라. 차마 입에 담기도 어려운 말들이 누군가의 입에서 입으로 넘나들었다. 귀를 막아도 소문이 들렸다. 나는 비겁하게도 그 어떤 소문에도 지민 언니를 보호하며 나서지 못했다. 그즈음부터 지민 언니는 야자 시간에 편집실에 오지 않았다.
딱 한 번. 여름방학이 오기 전에, 지민 언니가 편집실을 다녀간 흔적을 마주했다. 아무도 없는 편집실 책상 위에 네모난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 어떤 일이 있어도 상냥함을 잃지 않기를.
작고 반듯한 글씨는 분명 지민 언니 필체였다. 처음에는 내게 남기는 쪽지라고 생각했는데 그보다는 언니가 스스로에게 한 말이 아니었을까 싶다. 상냥함을 잃지 않기를.
나쁜 소문이 돌아도 지민 언니가 미소를 잃은 걸 본 적이 없었다. 나와 종종 편집실에서 만날 때에도, 이따금 기숙사에서 마주쳐서 짧은 수다를 떨 때도, 언니는 결코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함부로 한 적도 없었다. 그게 언니가 마지막까지 간직하고 있던 상냥함이었다.
여름방학에도 보충수업이 있어 학교를 나와야 했지만, 지민 언니는 여름방학 내내 학교에서도 기숙사에서도 만날 수 없었다. 갈피를 잃은 소문은 금방 공기 중에 녹아 사라졌다. 지민 언니도 그렇게 사라져 버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방학이 끝나고 학교에서는 새로운 이슈가 떠돌았다. 지민 언니는 변함없는 모습으로 다시 나타났다. 건강이 안 좋아져서 집에서 요양했다는 이야기를 밝게 떠들었다. 자신에 대한 뜬소문이 사라진 것에 내심 안도하는 눈치였다. 끝내 내 마음속 위로를 전해주지는 못했지만, 그런 게 없어도 언니는 잘 견디는 사람이었다. 오히려 사람에게 받는 위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언제든 그 낯빛을 달리해 언니를 향한 공격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내가 그랬으니까.
그래도 내가 언니와 함께 보낸 시간으로 위로받은 만큼 언니에게도 그 시간이 위로가 되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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