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연月緣
무엇을 보고 사랑을 느끼시나요?
날 바라보는 다정한 눈빛? 사랑한다고 수줍게 읊조리는 목소리? 혹시 나에게 시간과 돈을 아낌없이 쓰는 걸 보고도 사랑을 느끼나요? 아니, 어떤 것도 틀린 거란 말은 아니에요. 그냥 저에게 사랑이 찾아온 그 순간을 이야기하려고 넌지시 꺼내본 화두였어요. 그럼 제 이야기를 시작해 볼게요.
그 아이는 대학교 연합 동아리에서 만났어요. 일주일에 한 번 노숙인을 위해 의료 봉사를 하는 동아리였는데 그 아이도 나도 의예과 관련 학과를 다닌 건 아니었어요. 사실 저는 제가 어떻게 그 동아리에 들 수 있었는지 여전히 의아해요. 동아리 가입 면접 때, 의예과 학생도 아닌데 어떻게 의료 봉사에 임할 거냐고 묻는데 머리가 하얘져서 무슨 대답을 한 지도 모르겠던걸요. 의료 봉사 동아리가 의술을 행할 수 있는 사람만 있다면, 의술이랄 게 필요가 없는 사소하지만 필요한, 그리고 모두가 꺼리는 돌봄은 누가 하려 할까요? 라며, 더 낮은 곳에서 봉사하겠다고 했던 것 같기도 하고, 그걸 옆자리에 앉아 있던 그 아이가 말한 것 같기도 하고, 기억이 뒤죽박죽이네요. 어쨌든 우리는 나란히 동아리 신규 회원이 되었고, 자연스럽게 비슷한 일들을 맡아 하게 됐어요. 각종 기자재를 나르고 배치하고, 근방에 있는 노숙인을 같이 만나 간단한 검진을 무료로 해 주니 꼭 가 보시라고 설득하는 일도 했죠.
그 아이에게 관심이 생긴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어요.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카락을 한 번 낮게 질끈 동여 묶고, 늘 검은색 티셔츠와 청바지 차림으로 동아리 모임에 나오던 그 아이는 얼굴에 로션도 안 바르는지 피부 결도 거칠어 보였어요.
노숙인을 직접 대면하며 말을 걸 때도, 분명 친절하고 상냥한 표정으로 대하지만 어딘가 벽이 있는 것처럼 항상 거리감을 유지하는 게 보일 정도였어요. 사실 워낙 미묘한 거리감이라 다른 사람들도 느낀 건진 모르겠어요. 그냥 자신의 마음에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불투명한 유리막을 두르고 있는 것 같았거든요.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노숙인에게뿐만 아니라 동아리 선배, 동기들에게도 말예요. 저도 물론 예외는 아니었죠. 날을 세우지는 않았지만, 사적인 질문에 부드럽게 웃으며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려 대답을 회피하곤 하더라고요.
더는 관심을 주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이 들었던 때는 초여름이었어요. 방학하고 첫 봉사 모임이었는데 기온이 연일 치솟아 올여름 최고 기온이라며 폭염주의보까지 내려지고 그야말로 난리도 아니었죠. 이런 날씨에 가장 취약한 나이든 노숙인들, 거동이 불편한 이들에게 일일이 찾아가서 얼음물을 나눠주는 일을 맡았어요. 그 아이도 함께요. 각각 500 ml 짜리 얼린 생수병 스무 개씩 우리 몸집만한 백팩에 넣어 돌아다니며 하나 혹은 두세 개씩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어요.
마침내 마지막 두 개를 마지막 노숙인에게 전달하러 갈 때쯤엔 우리 둘 다 기진맥진해 있었어요. 그래도 이 분께만 드리면 한숨 돌릴 수 있다며, 기운 내자고 그 아이가 먼저 격려의 말을 꺼냈어요.
마지막 노숙인은 구석 중에서도 가장 구석진 곳에 숨어 있다시피 지내는 여성 노숙인이었어요. 일부러 저와 그 아이를 같이 보낸 건 같은 여자에게는 경계를 풀고 말을 들어 줄지도 모른다는 선배들의 판단에서였어요. 그 판단이 맞은 건지도 확신이 안 들 만큼 그분은 우리에게도 날을 세우셨어요. 몇 개월을 찾아가 인사하고 검진받으러 같이 가자고 해도 꿈쩍도 않던 분이셨죠. 그래도 생리대나 과자, 음료 같은 것들은 꼭꼭 받으며 고맙단 말 정도는 하시곤 했어요.
너무 더운 날이라 그분의 건강이 정말로 염려가 되기도 해서 더 빠른 걸음으로 함께 그분께 찾아갔어요. 아니나 다를까, 구석진 곳에서 손바닥 만한 그늘에 의지하며 바람 한 점 새어 들어가지 않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더위에 지쳐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그분이 보였어요. 눈도 제대로 못 뜨고 우리를 흐리멍덩하게 보는 걸 발견하곤, 아, 이거 정말 큰일 났구나, 하는 생각밖엔 안 들었어요. 어쩌지, 하고 제가 발을 동동 구르는 사이, 그 아이는 자기 가방에 있던 마지막 얼음물 두 개를 꺼내, 가방은 그 자리에 내팽개치고 그분께 가까이 다가갔어요.
단 한 번도 일정 거리 이상 다가오는 걸 허락한 적 없는 분이셨지만 그 날은 정말 상태가 안 좋으셨던 모양인지 코앞에 다가온 그 아이에게 아무 말도 못 하고 계셨어요. 그 아이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그분의 상의를 헐겁게 풀고, 양 겨드랑이 사이에 얼음물 생수병을 각각 끼워 넣었어요. 그러더니 내게 부채와 휴대용 손 선풍기를 달라며 손을 내밀었죠. 어버버하며 그 아이에게 둘 다 건네고 나서야 퍼뜩 선배들에게 전화를 해야겠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어요.
동아리 회장인 정화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고 현재 상황을 설명했어요. 그 사이 그 아이는 제게서 받아간 부채로 그분 얼굴에 그늘을 만들고 손 선풍기로 여기저기 바람을 쐬어 드리고 있었어요. 체격이 크지 않은 우리 둘이 성인 여성을 들어서 그늘로 옮길 순 없고 그렇다고 남자 선배들이 오는 건 그분이 꺼려하실 것 같으니, 정화 선배가 여자 선배 셋과 함께 이쪽으로 오겠다고 했어요. 그 아이에게 응급조치를 잘 하고 있으니 조금만 더 고생해 달라는 말도 잊지 않았죠.
베테랑 선배 넷이 와서 현장에서 할 수 있는 처치를 하기 시작했고, 정화 선배는 우리에게 고생했다며 베이스로 돌아가 좀 쉬고 있으라 했어요.
엉거주춤 자리를 벗어나 베이스 쪽을 향해 걸었어요. 그때, 그 아이가 먼저 눈에 보이는 벤치를 가리키며 잠시 앉았다 가자고 제안했어요.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리던 터라 그 말에 응하며 재빨리 벤치에 가서 앉았죠. 그 아이는 천천히 따라오며 옆에 있던 자판기에서 이온 음료 두 병을 뽑아 왔어요. 하나는 제게 주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마셨고요. 저도 고맙다 인사하고는 음료를 마셨어요.
하늘을 보니 맑고 청명한 푸른 빛이 일색인데 가운데 오명처럼 흰 점이 박혀 있었어요. 눈을 꿈뻑하고 다시 보니, 흰 달이었어요. 낮에 뜨는 달은 어쩐지 제 자리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달 같아서 불쾌한 기분이 든다고 중얼거렸던 것 같네요. 속으로 생각한 건 줄 알았는데 그 아이가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 같은 말을 해준 걸 보니, 확실히 소리를 내어 말한 모양이었어요.
그 아이는 낮달을 가장 좋아한댔어요.
“네 말대로 제자리를 못 찾고 방황하는 거긴 하지만, 그래도 제 몫은 모두 잘 해내고 있잖아. 잔뜩 몸을 웅크리기도 하고 부풀리기도 하면서, 제자리를 찾지 못하면 어떠냐고, 나는 그래도 지구를 지키는 일은 잘 해내고 있지 않냐고,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은걸.”
그 아이의 표정을 아마 전 평생 잊을 수 없을 거예요.
고향을 그리워하는 표정이 그것과 같을까요? 중요한 걸 두고 온 사람의 표정 같기도 했고요. 쓸쓸하면서도 아련한 눈빛, 은은하게 입가에 걸려있는 미소, 공기를 음미하듯 가슴을 부풀리며 숨을 모으는 제스쳐. 그 순간만큼은 시간이 멈춘 것 같았어요.
낮달과 그 아이를 천천히 번갈아 보며 어떤 예감을 했던 모양이에요. 이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다시 만나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그런 예감요. 그 아이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평소에는 하지 않을 말을 먼저 꺼내놓기 시작했죠.
“내가 태어난 곳도 아까 그분이 계시던 곳처럼 덥고 답답한 곳이었어. 손바닥만한 그늘막에 숨어서 나를 낳았대. 날 낳고 하늘을 보니 달이 떠 있었대. 그래서 내 이름에 달을 넣어 지어 주셨다더라. 나는 내 이름이 사랑스럽지만, 이 이름 덕분에 평생 달을 쫓으며 살게 된 것 같아. 낮에 희미하게 빛나고 어둠이 깔려야만 내 색을 뽐내는, 그리고 하루하루 모양을 바꿔가면서 말야.”
그 아이는, 참, 내가 너에게 별 얘길 다 한다, 하고 수줍게 웃었어요. 이제 가자며 먼저 몸을 일으켜 걸어갔죠. 그 아이의 등이 낮달처럼 희미해서 곧 사라질 것만 같아서, 어쩐지 울고 싶어지는 기분이 들었어요. 아, 혹시 이게 바로 사랑일까, 지금이 아니면 너와 더 가까워지지 못하게 될까, 내가 널 붙잡아둬도 되는 걸까. 전전긍긍하며 재빨리 그 아이의 뒤를 쫓았는데, 결국 그 아이를 잡지는 못했어요. 시간이 지나면 이 감정도 희미해지겠지, 막연한 희망을 품었죠. 그래, 이제 더는 관심을 두지 말자. 그러면 자연스럽게 시작된 이 사랑도 서서히 사라질 테니까.
하늘은 맑았고 구름 한 점 없던 날이었어요.
저는 희미한 그 아이의 등을 보며 사랑을 느꼈어요. 세상에 무심한 모습, 자기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하는 마음, 달을 사랑하는 목소리. 이 모든 것에 사랑을 느꼈답니다.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같은 건 아무런 상관이 없었어요. 그 아이는 온 힘을 다해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있었고 이런 아이라면 누구라도 자신을 사랑하듯 사랑해 주겠다는 확신이 들었죠.
방학 동안에도 봉사 활동은 이어졌어요. 우리의 마음이 전해졌는지, 단 한 번도 무료 검진 베이스까지 나온 적이 없던 여성 노숙인분이 밖으로 나와 검진을 받는 일도 있었고, 성수기를 살짝 피해서 동아리 엠티도 다녀왔죠. 그리고 2주간의 봉사 활동 휴식기를 동아리원들이 돌아가며 가졌어요. 저와 그 아이의 휴식기가 겹쳤는데, 2주 후에 다시 나간 봉사 활동에서 그 아이를 다시 볼 수는 없었어요. 그사이에 그만뒀다고 정화 선배가 전해줬어요. 알고 봤더니 그 아이가 제시했던 인적 사항이 모두 가짜였다고 하더라고요. 학교부터 연락처와 사는 곳, 그리고 이메일 주소까지도요.
그 아이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요. 다시는 소식을 알 수가 없게 되었죠. 저는 가짜라도 좋으니 이메일 주소를 알려달라 했어요. 답장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한 번 정도는 마음을 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낮달을 보며 그 아이의 목소리를 생각해요. 우리는 달로 이어진 인연이야. 내 이름에도 달이 있으니까. 언젠가는 또 만날 날이 있으면 좋겠어. 이런 진부한 말들을 늘어놓은 메일을 보낼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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