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

by 희연

무릎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싶었다.

언젠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TV에서 우연히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사람들이 잔뜩 나오는 걸 잠깐 본 적이 있다. 경사진 곳을 빠르게 내려오다가 긴 손잡이 같은 곳 위에 점프해서 올라타 미끄러지듯 지나가고, 또 U자 모양 공간에서 시계추처럼 움직이다가 머리 위로 발과 스케이트보드를 번쩍 들어 올리고. 그런 장면은 왠지 머리 깊은 곳에 강렬하게 박혀 잘 지워지지 않았다. 그 길로 스케이트보드를 사 달라고 부모님을 졸랐다. 그런 문화를 잘 모르던 부모님은 내가 몇 날 며칠 징징대던 걸 듣고는 롤러스케이트를 사 오셨다. 한창 바퀴 달린 신발이 유행하던 때여서, 부모님은 이게 그거겠거니 했던 모양이셨다. 어린 마음에 빼액 울며 롤러스케이트를 집어던지고 이게 아니라고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말 그대로 비 오는 날 먼지가 날 때까지 얻어맞았고, 롤러스케이트는 그대로 남동생 차지가 되었으며, 나는 반성문을 써야 했다. 그 뒤로 한동안 부모님께 무얼 사달라 얘기조차 꺼내는 게 금기시된 시기가 지나갔다.

이제 나는 어느덧 자라 갖고 싶은 건 내가 번 돈으로 살 수 있는 나이가 되어버렸다.

그러니까 서른이 되어서야 스케이트보드를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지금이라도 사야겠다는 생각이 든 건, 예상보다 많은 금액이 통장에 남아있는 걸 봤기 때문이었다. 얼마 안 되는 돈이긴 하지만, 몇 달 조금씩 아껴 몇십만 원 여유가 생겼다. 무얼 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문득 스케이트보드가 떠올랐다.

곧바로 인터넷에서 스케이트보드를 검색해서 주문했다. 적잖은 금액이었지만, 이 정도는 몇 달 고생한 나에게 주는 선물로 괜찮을 것 같았다. 결제 버튼을 누르는 데 망설임은 없었다.

내 생애 첫 스케이트보드는 늑대 옆얼굴 그림이 중간에 자리 잡은 폭 8인치 보드였다. 배달의 민족답게 빠른 배송으로 결제 버튼을 누른 다음 날 곧장 받을 수 있었다.

보드를 샀다고 해서 바로 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배경 지식도 전무하고 주변에 비슷한 취미를 가진 사람이 없어서 유튜브 스승님을 모셨다. 스케이트보드 타는 법, 스케이트보드 초보 같은 글자들을 넣고 검색해 보니 여러 가지 유용하고 재밌는 영상이 쏟아져 나왔다.

비슷한 영상 여러 개를 반복해서 본 다음에는 실전이었다. 우선 내가 레귤러인지 구피인지를 확인해야 했다. 영상 속 설명에 따르면, 왼발을 보드 앞에 올리고 오른발로 땅을 굴리는 게 편하면 ‘레귤러’이고 그 반대가 편하면 ‘구피’였다. 보통 오른손잡이는 레귤러일 확률이 높다고 해서, 그걸 먼저 시도해 보았다. 야외로 나가긴 겁이 나니까, 방바닥을 조금 치우고 보드를 굴려 보기로 했다. 방바닥은 생각보다 미끄러웠고, 넘어지지 않으려면 벽을 꼭 짚어야 했다. 발을 올리는 면은 까슬한 사포 재질이어서 맨발로는 올라갈 수도 없었다.

몇 번의 시도를 통해, 오른발을 올려두고 왼발로 돋움 하는 게 더 편하다는 걸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구피’였다.

스케이트보드 구입 다음으로 한 단계 더 나아간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았다. 어린 시절의 나에게 헬멧을 씌워 주고, 무릎 보호대를 채워주고, 제 몸집 만한 스케이트보드를 선물해 주는 꿈을 꿨다. 어린 나는 보드에 발이 딱 달라붙어 떨어뜨리지도 않고 종횡무진 잘 달렸다. 만화 영화에서 봤던 날아다니는 보드라도 탄 것처럼 씽씽 날아다녔다.

이런 꿈을 꾸고 나니, 바깥으로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 날, 퇴근하자마자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스케이트보드를 챙겨 뚝섬 한강공원으로 향했다. 보드를 사기 전부터 이곳이 스케이트보드 파크로 유명한 장소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다만 한 번도 와 볼 용기가 없었을 뿐이었다.

스케이트보드가 방패처럼 느껴졌다. 이걸 들고 가면 어떤 적도 막아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해가 어스름 지고 있었고, 이미 벌써 꽤 많은 사람이 공원에 나와 있었다. 유튜브에서 봤던 현란한 기술을 연습하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나만 갓 걸음마를 뗀 아이처럼 보드 위에 천천히 발을 올렸다.

오른발이 보드 위에 올라갔고, 왼발로 천천히 땅을 밀었다. 보드가 미끄러지며 앞으로 나아갔고, 왼발로 몇 번 더 돋움 질을 하고 – 영상에서 설명해 준 것을 되새기며 – 몸의 중심을 살짝 앞으로 옮기며, 왼발을 땅에서 떼고, 오른발 뒤쪽에 어깨너비만큼 벌려 발을 올렸다. 보드는 천천히 굴러가다가 속력이 떨어지더니 곧 멈추었다. 다시 왼발을 땅에 디뎌 밀었다. 몇 번 반복하다 보니 요령이 곧 생겼다. 두 발이 보드 위에 모두 올라가 있어도 편안하다는 생각이 드니, 자신감이 더 붙었다.

자신감이 아니라 자만이었을까.

살짝 경사진 곳 위로도 올라가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든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니까.

어느덧 해가 다 졌고, 공원 주변으로 가로등이 환하게 켜졌다. 아까 전보다 더 많은 사람이 모여서 보드를 타고 있었다. 단체로 와서 저들끼리 떠들고 놀며 타는 사람들도 있었고, 가족끼리 와서 부모가 아이들 타는 걸 지켜보기도 했다.

자리 경쟁이 더 심해지기 전에 한 번 도전해 봐야겠다는 조급함이 밀려왔다. 가장 낮은 경사로로 천천히 다가갔다.

발로 힘차게 땅을 굴렸다. 속도가 붙자마자 두 발을 가지런히 보드 위에 올렸다. 생각보다 속도는 더 빨랐다. 멀어 보였던 경사로는 금세 발밑에 와 있었다.

가장 낮은 경사로였는데도 막상 위로 진입하니 상체가 뒤로 밀리는 느낌이 들 만큼 가팔랐다. 이러다 뒤로 넘어질 것 같아 상체를 조금 앞으로 숙였다.

경사로 위에 오르기 전에 내가 간과했던 게 하나 있었다. 완만하게 올라가는 경사로는 같은 각도로 내려오는 구조로 돼 있지 않았다. 오르막 반대편은 직각으로 뚝 떨어지는 구조였다. 그러니까 그 끝에 도달하면 보드와 함께 뛰어내리거나, 올라왔던 방향으로 경사를 타고 내려와야 했다.

하지만 자만에 차 있던 나는 속도를 조절하지 못했고, 빠른 속도로 경사로 끝에 도달해 버렸다. 뒤로 돌려 나오지도 못할 만큼 순식간이었다.

모든 게 아주 느리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상체가 이미 앞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에 경사로 끝에 선 내 운명은 땅바닥에 고꾸라지는 것뿐이었다. 발이 먼저 보드에서 떨어졌고, 두 팔을 뻗어 땅과 얼굴이 먼저 만나지 않도록 조치를 했다. 다리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보드와 떨어진 채 허공을 휘젓다가 그대로 쿵, 바닥과 마주치고 말았다. 그러니까, 보드는 경사로에 걸려 바닥에 부딪히고 튕겨 굴러갔고, 나는 무릎과 두 손으로 착지했다. 관성의 법칙이 내 몸을 앞으로 굴렸고, 오른팔을 접어 오른 어깨가 땅에 닿을 수 있게 했다. 몸을 한 바퀴 굴린 것 같았다.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은 모양이 되어서야 모든 게 정상 속도로 돌아왔다.

부끄러움이 온몸을 타고 돌았다. 분명 얼굴이 새빨개졌을 테고, 주변 사람들은 내 꼴을 보고 비웃거나 저들끼리 크게 웃고 있겠지. 그 생각에 고개를 들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엊그제 산 내 스케이트보드를 챙겨야 했다. 주저앉은 자세로 주변을 둘러보며 내 보드를 찾아 고개를 움직였다. 그렇게 주변을 살피는데, 아무도 나를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곧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다들 자기 노는 데만 정신이 팔려, 정확히는 자기들 넘어지는 데만 집중하느라 내가 넘어진 건 안중에도 없었다.

TV와 유튜브에서 보았던 스케이트보드 선수들의 현란한 기술이 이런 과정을 통해 완성되는 거였다. 몇 번이고 넘어지고 구르고, 자빠지고 깨지고 다치고. 그래도 다시 일어나 보드 위에 발을 올리고, 그래서 여러 기술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땅을 짚고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릎과 손바닥이 시큰거렸다. 멀지 않은 곳으로 굴러간 내 보드를 챙겨 벤치로 가서 앉았다. 바지를 걷어보니 무릎이 깨져 피가 나고 있었다. 따가웠다. 그래도 즐거웠다. 바람이 시원하고 기분이 좋았다.

바지를 다시 내리려는데, 한쪽에서 스케이트보드를 타던 단발머리 여자가 내게 다가왔다. 반창고를 내밀며 말을 걸었다.

“오늘 처음 타신 거죠? 다음부터 저희랑 같이 타요.”

상냥한 말씨로 매일 저녁 비슷한 시간에 모이니, 나와서 함께 타자며 모르는 건 가르쳐 주겠다고 했다. 여자는 뒤쪽을 가리키며 자신의 크루를 소개해 주었다. 여성으로만 이루어진 걸스케이터 크루였다. 멤버 중에는 프로 선수도 있다고 했다.

바람이 시원하게 훑고 지나갔고 무릎과 손바닥에서는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지만, 내일도 이 시간에 나는 여기 나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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