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장마가 시작했다. 추적추적 흩어 떨어지는 빗방울이 습하고 끈적한 기운을 몰고 와 온몸에 들러붙는다. 도무지 세상의 행복이라곤 간데없다. 창밖으로 빗줄기가 끊이지 않았고 떨어졌다. 하늘은 옅은 구름이 저며 있어서 금방이라도 해가 날 것 같은데 빛은 흐리다. 빛이 흐려도 열기는 구름 사이로 스민다. 덥고, 끈적거린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지만 물기가 온몸을 감싼다. 이럴 때는 차라리 깊은 물속으로 잠기고 싶다. 공기 중에 떠도는 물방울에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아, 그냥 바닥이 없는 물속에 잠겨 죽는 편이 나을 것 같다. 나에게는 꼬리 대신 두 다리가 있어서 습기 속을 걸어야 한다. 걸어야만 했다.
작년에 사뒀던 장화가 떠올랐다. 유행이라며 한 켤레 정도는 있는 게 좋겠다고, 친구 L이 기어이 끌고 가 사게 했던 장화였다. 장화가 아니라 레인-부츠야, 레인-부츠. 레인부츠든 장화든 나에게는 쓸모가 없는 목 긴 신발이었다. 사둔 직후에 두어 번 정도 신고 그 뒤로는 신발장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것 같았다. 무슨 색이었는지도 가물가물할 정도로 관심이 없었는데 어쩐지 이번 장마엔 꺼내 신어야겠단 마음이 들었다.
신발장을 열었다. 천장까지 높게 뻗은 신발장에는 손에 꼽을 수 있을 만큼만 신발이 들어 있었다. 언제 어디서, 왜 샀는지도 짚어가며 설명해 줄 수 있을 정도로 몇 켤레 없었다. 원래 신발이든 옷이든 내 몸에 걸치는 것에 크게 욕심이 없는 편이라, 적당히 제 기능을 하는 정도라면 무난하게 사용한다. 신발도 그래서 운동화 두 켤레와 샌들 한 켤레, 슬리퍼 한 켤레와 단화 두 켤레가 전부였다.
L은 나와 성향이 정반대였다. 몸에 얹는 것이라면 뭐든 최신 유행하는 것들로 꾸며야 직성이 풀렸다. 마치 그것으로 자기 가치를 증명하려는 발악 같았다. L이 입고 썼던 것들이 뉴스에까지 나오거나 주변 사람들이 유행이라며 이야기하는 걸 듣게 되는 순간은 항상 기묘했다. 그렇게 빠르게 흐르는 물살에 휩쓸리면 너 자신을 잃게 되지 않니? 어느 날은 내가 물었다. L은 깔깔 웃으며 내가 바로 그 물살이야, 하고 대답했다.
그런 L이 골라준 장화 한 켤레는 칙칙한 신발장 안에서 유독 반짝거렸다. 나에게는 유행이 안 타는 무난한 게 좋겠다며 추천해 준 장화였다. 아마 L의 신발장에는 유행이 지나 유치해진 신발이 수천 켤레 정도 있지 않을까, 쓸데없는 생각이 들어 우스웠다. 신발뿐만이 아니라 시절 지난 옷도 산처럼 쌓여 있을 거야.
장화를 꺼냈다, 뒤집어서 혹시 안에 먼지 따위가 들어있을까 살폈다, 툭툭, 일 년 사이 쌓인 옅은 먼지가 떨어진다, 눈처럼 먼지가 내리는 상상을 한다, 비가 얼어버리면 좋겠다.
주말은 집에서 보내는 편인데, 특히 비가 오는 날이면 절대 집 밖을 나가지 않겠다는 고집스러운 원칙도 가지고 있는데, 오늘은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나를 닮아 크고 투박한 장우산을 집어 들었다. 적당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펼치면 안쪽은 바랜 은빛 장막이 펼쳐지고 바깥은 우주보다 까만 지붕이 된다. 장화를 신고 우산을 펼치며 집을 나서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분명 재촉하는 L의 전화라고 생각하며 확인도 하지 않았다. 한 손엔 우산, 다른 손에는 가방을 들고 있어 여유도 없었다.
늦지 않게 갈 테니 차분히 기다리렴. 전화를 받지도 않은 채 텔레파시 같은 걸 보내봤다. L이 잘 받았는지 울리던 전화가 끊겼다.
L과 P는 고향에서 같이 서울로 올라온 오랜 친구 사이였다. L과 같은 대학을 다녔던 내가 둘 사이에 끼어 셋이 절친한 사이가 된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어디서든 있는 듯 없는 듯 말이 없는 나와, 항상 존재감을 넘치게 흘리고 다니는 L 사이에 P가 윤활유 작용을 했다. L은 나처럼 차분한 성격이 부럽다고 했으며 P의 어른스러움을 닮고 싶다고 했다. P는 항상 직설적으로 말을 했다. 그러나 상대의 기분을 나쁘게 하는 방식은 결코 아니었다. 말을 고르고 골라서 해도 실수를 하는 나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L은 되는 대로 말을 내뱉지만, 사람들은 그걸 애교 정도로 넘겨주는 것 같았다.
비슷한 구석이 별로 없어도 친해진다. 그렇지만 더러는 우리 셋이 닮았다고 했다. 생김새나 분위기 같은 것이. 말도 안 된다고 웃었지만, 같이 지낸 지 오래되다 보니 자연스레 취향도 비슷해지긴 한 모양이었다. 절대 변하지 않는 것도 있지만.
오늘은 P가 인도에서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오랜만에 셋이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주말 외출을 기피하는 내가 나갈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비가 부슬부슬 떨어져서 우산을 써도 온몸이 젖는 것 같았다. 그래도 아침만큼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L과 P를 만나면 항상 기분이 좋아져서 귀가하게 된다. 그 시간을 생각하면 빗속을 걸어도 가뿐했다.
3년 전, 아직 부모님과 함께 살던 때였다. 출근 전부터 으슬으슬하더니 10시도 채 안 되어 몸에 열이 펄펄 끓어 결국 오후 반차를 쓰고 나왔다. 집 앞 내과를 가서 진료를 받고 약을 처방받았다. 집에 돌아가 약 먹고 자고 싶다는 생각밖엔 들지 않았다. 비틀거리며 집 현관문을 열었고,
정갈한 현관이 비뚤게 보였다.
엄마 신발이 보이지 않았다, 이 시간에 외출할 사람이 아닌데, 하고 생각을 했던가,
힘겹게 신발을 벗어 신발장에 넣을 요량으로 신발장을 열었다,
엄마가 늘 신는 신발이 신발장 안에 있었고,
또 낯선 신발이 한 켤레, 있었다.
내 발보다도 엄마 발보다도 한참이나 더 큰 구두였다. 자연스럽게 색이 바랜 갈색 구두 한 켤레였다. 왜 여기 이게 들어있는지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분명 열이 나서 헛것이 보이는 거라고, 손을 뻗었다. 촉감도 낯설었다. 내 손가락만 다른 공간에 있는 것 같았다. 이 신발이 여기 있으면 안 되는데. 있을 순 없는데. 내가 어떻게 쫓아낸 신발인데.
무거운 몸을 일으켜 돌아섰더니 엄마가 황망하고도 안타까운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 아파서 왔니? 어서 들어와서 씻고 쉬렴, 하며 나에게 다가와 다독이려고 했다. 나는 느릿하지만 확실하게 엄마의 손을 뿌리쳤다.
이거 그 인간 신발이지? 그 인간 지금 여기 있어?
목소리가 갈라져서 터져 나왔다. 엄마는 곤란하다는 눈빛으로 안방과 나를 번갈아 보았다. 그래도 아빠한테 그 인간이 뭐니, 작게 타박하는 소리가 흘러갔다.
엄마, 미쳤어? 그 자식한테 당한 게 얼만데 다시 보고 싶어? 그 자식 내가 죽여버릴 거야! 죽여버릴 거라고!
악을 쓰며 부엌으로 달려갔다. 엉망인 몸으로 식칼을 집어 들었다. 말리는 엄마를 살짝 밀치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술에 취해 바닥에 너부러져 자는 그 인간이 눈에 들어왔다. 흐릿했다. 바닥에 눌어붙어 그대로 떨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인간의 발목엔 까만 족쇄가 채워져 있었고, 얇은 케이블로 콘센트에 연결돼 있었다.
아아악, 씨발!
열이 더 올랐다.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었고, 비틀거리며 식칼을 방바닥에 꽂았다. 그 인간은 화들짝 놀라 술인지 잠인지에서 깼다. 나를 미친년 보듯 보는 눈빛이 현실인지 환상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눈물이 그냥 줄줄 흘렀다. 나가 죽어, 그냥 나가 죽으라고 이 미친 새끼야! 울음소리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가 목에서 토하듯 쏟아져 나왔다.
엄마가 황급히 들어와 날 끌고 나왔다. 아이고 얘가, 감기몸살 때문에 제정신이 아닌가 보네, 얼른 들어가서 약 먹고 자자, 응? 살살 달래는 그 말투조차 짜증이 나서 다 뿌리치고 다시 현관으로 나왔다. 신발장을 열고 그 인간의 신발을 집어 들어서 현관 밖으로 던져버렸다. 한 짝은 옆집 문에 쿵 부딪혔고, 한 짝은 그 옆의 벽에 부딪히더니 계단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내 신발을 구겨 신고 도망치듯 집 밖으로 나왔다. 야속하게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장마가 시작하는 날이었나. 우산도 미처 챙기지 못했고 그렇게 달려간 곳은 P의 자취방이었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P는 갑작스러운 내 방문에도 놀라지 않고 차분히 맞아 주었다. 따듯한 차와 마른 옷가지를 준비해 주었고 L도 불러 셋이 한자리에 모이게 됐다.
그날로 나는 P와 짧은 동거를 했다. L도 자주 찾아와서 저녁마다 왁자지껄 떠들고 놀았다. P는 그해 공무원 시험에 떨어졌고, 나는 모아둔 돈으로 집을 구해 정말로 독립을 했다. 그래도 우리는 매달 첫째 주 일요일마다 만났다. 어떤 날은 영화를 봤고 어떤 날은 만화방을 갔다. P가 돌연 인도 여행을 가겠다고 한 게 6개월 전이고, 6개월 동안은 L과 둘이서만 만남을 이어갔다.
그날 일에 대해 P도 L도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내가 먼저 말할 때를 기다려 주는 것이다.
어김없이 장마가 시작됐고, 오늘은 나도 말할 수 있을 때가 되었다는 게 느껴졌다. L이 골라준 장화와 P가 내어준 공간이 마음에 단단히 자리 잡았다.
Copyright. 2019. 윤해후.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