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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범한지혜 Oct 16. 2023

그는 집사인가, 변호사인가

“집사변호사”라는 말 들어보셨나요? 변호사 입장에서 이 단어를 언급하자니 참 거북스럽습니다만,  요즈음은 “집사”라는 말도 생소한데, “집사변호사”라니… 그런데 이 말이 판결문에까지 등장했습니다. 아래 인용해둔 판결입니다. 


실제 사건은 사기 및 자본시장법 위반 등으로 구속된 피고인이 변호사 6명을 고용해 총 51회 정도 변호사들을 번갈아 가며 하루 종일 접견교통권을 행사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변호사 접견교통이 아니라 감방 안에서 개인 용무도 보고 회사 업무 지시도 한 겁니다. 


검사는 변호사와의 접견교통권를 가장해서 사실은 개인 용무와 회사 업무를 보았으므로 속임수(위계)를 써서 교도관들의 교정업무를 방해했다고 보아 “위계공무집행방해죄”로 기소했습니다. 


하지만 법원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표면상 교도관들의 공무집행이 현실적으로 곤란해질 정도에 이르지 않았다고 판단했으나, 변호인의 접견교통권을 함부로 제한하는 것이 극도로 조심스러웠던 것으로 보입니다. 위계공무집행방해죄가 성립한다고 하면 변호인의 접견교통권이 어느 정도라도 제한되는 결과가 초래되니까요. 



피고인의 변호인 접견교통권 행사가 한계를 일탈한 규율위반행위에 해당하더라도 그 행위가 위계공무집행방해죄의 ‘위계’에 해당하려면 행위자가 상대방에게 오인, 착각, 부지를 일으키게 하여 그 오인, 착각, 부지를 이용함으로써 상대방이 이에 따라 그릇된 행위나 처분을 하여야만 한다. 만약 그러한 행위가 구체적인 직무집행을 저지하거나 현실적으로 곤란하게 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은 경우에는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죄로 처벌할 수 없다.
대법원 2022. 6. 30. 선고 2021도244 판결


우리 법은 체포 또는 구속된 사람이 변호인과 접견교통할 권리는 법률이 함부로 할 수 없는 헌법상 권리이고, 어떤 경우에도 양보할 수 없는 가치라 볼 수 있습니다. 헌법재판소는 체포 또는 구속된 사람의 헌법상 권리일 뿐만 아니라 변호사의 변호권 측면에서도 헌법상 권리라 판단합니다. 변호인 조력 받을 권리를 제대로 보장하지 않았던 과거 역사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지당한 판단입니다. 


헌법
제12조 ④ 누구든지 체포 또는 구속을 당한 때에는 즉시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다만, 형사피고인이 스스로 변호인을 구할 수 없을 때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가 변호인을 붙인다.


대기업을 고용주로 둔 대형 로펌에서 형사팀에 고용된 새내기 변호사들을 이렇게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내가 이러려고 변호사가 됐나”하는 생각에 대형 로펌을 관두고 나오는 일도 생깁니다. 위 사건에서도 실제로 로펌 대표는 소속 변호사들을 집사변호사로 업무하게 한 부분에 대해 변호사 협회의 징계를 받았습니다. 


집사변호사 행태는 변호인의 접견교통권은 변호인 아닌 사람의 접견교통권과 달리 횟수, 시간 등 제한 없이 무제한 허용된다는 점을 이용한 자본주의적 행태라 생각합니다. 이 사건에서도 변호사 6명을 월 300만 원에 고용했으니, 월 1800만 원은 쓴 셈이니 아무나 이럴 수도 없겠지요. 


변호사 업무가 비교적 큰돈을 쉽게 번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으시겠지만, (혹서 또는 혹한의 날씨에 야외에서 신체노동을 하시는 분들께는 죄송한 말씀일 수도 있습니다만) 상당히 높은 강도의 정신노동이자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책 보고 문서 작성하는 것이 골병드는 신체노동이기도 합니다. 한 번 배운 내용 쉽게 꺼내 쓴다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하나도 똑같은 사건은 없고 하나도 복사해서 붙여넣기 할 수 있는 서면이 없습니다. 그러니 변호사로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방 들고 왔다 갔다만 해도 주 3일에 월 300을 보장한다는 것이 달콤하게 들릴 수 있었을 겁니다. 


물론 사정상 잠시 집사변호사로 일할 수도 있습니다. 개인적인 관계에서 불가피하게 해주었을 수도 있고요. 하지만 독이 든 사과입니다. 지금 시작하는 젊은 변호사님들이 이런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처음 한두입은 새콤달콤한 사과맛이지만, 그 사과에 내가 먹히고 마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진정하게 실력을 길러 나가지 않으면 5년 10년 뒤의 변호사로서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10년 넘게 이 영역에서 살아오다 보니 구력이 쌓여서 기량이 올라가는 점도 분명히 있지만, 처음 한 번 시험에 합격한 공부로는 잘 먹고 잘 살기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1년에 수 천개의 새로운 중요 판례가 쏟아지고, 법은 또 어찌 그리 자주 바뀌는지... 사건을 처리하면서도 늘 공부하고 연구해야 합니다. 좋은 변호사가 되기 위해서는 틈틈히 논문도 보고 판례도 연구해야 합니다. 힘들어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저는 죽을 때까지 변호사이고 싶습니다. 뒷방 늙은이 말고 현역 최고령 할머니 변호사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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