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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소리야. 도대체

마술은 그럴 때 통한다

by 강물처럼 Nov 29.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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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기야 금마 어딘가에서 전신주가 넘어졌다는 뉴스가 들렸다. 바람이 거세다. 따로 태풍 소식이 있는 것도 아닌데 사흘이 다 지나도록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있다.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은 눈 속에 찬데.

학교 다닐 적에 배웠던 시조 하나가 그대로 떠올랐다. 삭풍은 나무 끝에, 실감 나는 꿈 속인 듯 하나씩 시선이 옮겨갔다. 삭풍, 나무, 끝에. 지금 부는 것이 삭풍이었구나. 메시지가 왔다.

그러니까 창민이는 그 말이 나왔던가 보다. 7줄로 된 하얀 메시지가 눈이 내리는 바탕 화면에서 - 마치 눈 속에 차가운 밝은 달 마냥 - 곱게 서 있었다.

Salar de Uyuni is one of the most visited natural wonders of South America, too. All year round a lot of people visit this place to take pictures of its unique natural beauty.

중학교 2학년 영어 천재 교과서 8과에 나오는 지문 가운에 한 토막이다. 중학교 2학년은 어떤 나이일까.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좋은 나이일까. 그 무언가에는 '포기'라는 말도 눈에 띄지 않게 들어 있을 것이다. 저 문장 두 개는 최상급, 분사, 부정사를 알아야 제대로 풀이되는 문장이다. 외국어는 단어만 알면 된다고 외치는 것은 밭이렁에 머리만 박고 안심하는 꿩과 같다. 곧 중학교 3학년에 올라가야 하는 창민이는 학원에서 영어를 배운 적이 없다. 여기에 온 지 3주가 채 못 됐다. 아이에게 무엇을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감이 서지 않을 때 선택이 요구된다. 그 선택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선택을 해도 상관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 시험은 봐야 하고 아는 것은 없고, 그렇게 묵인되는 것들이 얼마나 많던가.

무엇도 선택하지 않는 선택을 탓할 수만은 없다. 최상급을 알려면 형용사나 부사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부정사를 알려면 동사에 대해서 알아야 하고, 말하자면 저 두 문장을 제대로 알기에는 많이 늦었고 그만큼 시간이 없다.

인칭 대명사, 흔히 말하는 그 I My Me를 - 물론 학교에서 다 배우는 것들이다. - 첫 시간에 따로 배우면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애를 쓰던 아이가 아니었다면 아마 나도 다른 선택을 했을 것이다. 그것은 자존심 같은 것이었을까, 아니면 위기감이었을까. 누구나 중요한 시험이 있었고 있으며 있을 것이다. 얼마나 초조했던가. 얼마나 바랐던 그것이었는지 우리는 이제 다 잊었다. 잊었다고 없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너는 왜 떠냐? I My Me를 써넣던 아이에게 물었던 내 첫 물음이었다. 괜찮아 떨지 마, 잘 왔어!

수술한 이야기를 해줬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 신기해서 반쯤 재미 삼아 그리고 반쯤 진지하게, 내가 좀 특별하다며 말을 꺼낸다. 그동안 그 이야기를 했던 사람들을 보면 대충 분위기가 나보다 약한 사람들이다. 불안해하고 어려워하고 자신 없어하던 사람들이었다. 끝에는 나도 본전을 뽑는다. 그러니까 힘내야 한다고 단호하게 맺는다. 내가 아프지 않았다면 나는 우리 아이들도 그렇고 이렇게 뜬금없이 만나는 아이들을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한 집에 살고 있어도 같이 시간을 보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 많다. 산이와 강이는 12월에 지리산 둘레길 마지막 코스에 간다. 5년을 함께 산길을 거닐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를 뿌듯하게 하는 이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천천히 가면 가지더라. 아이마다 다 다르다는 것을 비로소 실감한다.

영어에 두 가지 to가 있어. 하나는 전치사 to, 다른 하나는 부정사 to. 사람들이 to 부정사, to 부정사 그러는 거 들어봤지? 창민이 옆에 앉았다. 초등학교 때 쓰던 노트 표지가 얄궂어 보였다. 때가 지나면 유치해지는 것도 있다. 바빠도 여기를 배우고 가자고 아이를 붙들었다. 전치사 다음에는 명사가 오고 to 부정사에는 동사가 따라와. 동사의 원형, 이제 그 말은 알잖아? 아이가 끄덕거린다. 문제는 - 현실적으로 공교육이든 사교육이든 - 여기다. I want to go to school.

여기 두 개 중에 어떤 것이 to 부정사냐고 물으면 to school 그런다. 눈치 있는 아이는 재빨리 이게 아닌가? 그러면서 말을 바꾼다. 그 시간이 없다. 거기에 서서 차가 다 지나갈 때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다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대충 타협한다. 명사와 동사는 헷갈리는 영역이 아니다. 그런데 헷갈렸다고 말한다. 그것은 모르는 것이다. 다시 더 처음으로 가야겠다는 마음이 저'절'로' 드느냐 ,아니냐가 to 부정사를 알게 될지, 어떨지를 판가름하게 된다.

그럴 때 눈이 왔으면 좋겠냐는 말로 무대를 싹 바꾼다. 뭐 하고 싶냐고 묻고 뭐 하고 싶다고 괜히 상상도 한다. 그 틈이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아이, 모두 필요하다. 그러니까 우리는 시간이 없어서 가난하다. 가난하기만 하면 그래도 희망이 보이는데 시간이 없다. 그것이 치명적이다. 그 시간 다 어디에 갔는지····.

그 노트에, 나는 원한다 -① 나는 미국에 간다 -② 두 문장을 적고 그것을 하나의 문장으로 만들어 보라고 했다. 머뭇거리며 -혹시 틀릴까 봐 주저하며 - 나는 미국에 가기를 원한다,라고 적어놓고 흘낏 나를 본다. 너는 부정사를 배워도 돼. 안심하는 숨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문장을 영어로 바꿨다. I want -① I go to America -② 방금 창민이 네가 만든 문장이 부정사가 세상에 나온 이유야. 이 문장이 I want to go to America가 되는 거지. 그러니까 두 개의 문장을 하나로 엮을 때 필요한 것들이 있는데 그중에 가장 많이 쓰이는 것이 to 부정사가 되는 거야. 네 머릿속에서 무의식적으로 미국에 간다가 미국에 가기를로 바뀌었잖아, 영어도 그렇게 바뀌거든. 간다가 가기를, go가 to go로. 더 깊이 그리고 더 크게 끄덕인다. 블루라이트다.

to 부정사는 그래서 슬픈 존재야. 슬프지만 끝까지 자기 역할을 하는 의지가 굳은 친구지. 동사였지만 큰 문장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거든. 변장하고 사는 거야, 동사로는 살지 못하니까 다른 모습으로 그렇지만 꼭 있어야 미국에도 가고 어디든 갈 수 있거든. 부정사를 잘 배우면 영어가 편해진다. 친구가 될 수도 있어.

To make good friends is helpful to your life.

helpful은 도움이 된다는 뜻이야, 해 봐. 이게 무슨 말이야? 좋은 친구들을 만드는 것은 너의 라이프에 도움이 된다? 언어를 다루는 솜씨가 '복수형'을 다루는 것을 보면 살짝 드러난다. 어린아이들일수록 복수형을 그대로 살린다. 책상들이 있다. 책들이 많다. 차들이 가득하다··· 등등. 라이프는 뭐야? 물으면, 인생? 그러면서 확인한다. make를 보고 친구를 '사귄다'라고 하는 친구들은 언어를 비교적 쉽게 배울 가능성이 많다. 제각각 재능이 다르다는 말을 실감하는 현장이다.

이 문장을 It is helpful to your life to make good friends.로 바꿔 쓰면서 등장하는 것이 '가주어'다. 가짜 주어, 형식적으로만 주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주어 It이다. 너 학교에서 영어 시간에 맨날 가주어, 가주어 하는 소리 들었지? 그때 기분이 어때? 말을 주저하는 창민이를 바라보면서 웃었다. 무슨 소리야, 도대체! 그랬지?

저도 멋쩍은지 피식 웃었다.

겨우 이거였던 거야. 겨우 이만한 것이 거기 박혀서 사람을 괴롭혔던 거라니까. 이제 좀 편할걸? 두 번, 세 번 끄덕이는 아이가 왜 고마울까. 몇 개만 더 해보라고 시간을 줬다. 핸드폰으로 찾는 단어는 아마 동사일 것이다. 동사인 줄 모르는 동사들이 세상에는 참 많다. 조금 더 아는 것이 자랑이 아니듯 조금 덜 아는 것도 창피는 아니어야 한다고 나도 다시 생각한다. 동그라미 6개를 그리는 손이 그제야 아이 같았다.

보어는 뭐예요? 보어? 내가 보어 알려주면 뭐해줄래? 세상에서 제일 쉽게 알려줄 수 있는데? 안 믿는다. 믿지만 믿지 않겠다는 표정이다. 나는 그런 표정이 이 순간 마음에 든다. 마술은 그럴 때 잘 통하니까.

눈을 감고 내가 말하는 것을 상상해 봐. 푸른 하늘. 보여? 네, 그런다. 어디 푸른 하늘이 있을까. 그러면 이제 새를 그려, 새가 난다. 눈꺼풀이 가느다랗게 떨리는 것이 정말 새가 나타났나 싶다. 푸른 하늘에 새가 난다. 잘 보여? 네···. 자, 푸른 하늘 지우자, 푸른 하늘 사라진다. 자, 새만 보이지? 눈을 감고 새를 보는 아이가 웃는다. 나도 웃었다. 새가, 난다. a bird flies. 그려져요. 그것이 문장이야. 왜 그림이 그려지냐면···· 말을 삼키고 이번에도 눈을 감으라고 그러고 속으로 하나, 둘, 셋을 센다. 자, 이번에는 그 사람 생각해. 그 He - 아이에게 He는 누굴까 - 그는 ~~ 이다. He is~~. 그림이 그려져 안 그려져? 안 그려져요. 거기에다 하나 붙인다. 계속 상상해 봐. He is a student. 보여요. 진짜? 네. 세상에는 이런 거짓말도 있다. 눈뜬 나는 안 보이는데 눈 감고 저는 보인다고 하는, 마법 같은 거짓말이.

왜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인 줄 알아? 동사 Is 때문에 그래. 날다 fly는 표현하잖아. Is는 같은 동사이지만 자기표현을 못 해. 그래서 뭐가 필요할까, 하나의 의미를 전달하려면? 자기를 도와줄 수 있는 것, 그것을 보완한다고 그러거든. 불완전한 자기를 보완해 주는 말, 보어가 그렇게 나오는 거야.

동사가 불완전하다는 말 재미있지 않냐? 너는 완전해, 불완전해? 말이 없이 또 웃는다. 엄마, 아빠가 너의 보어야. 사람에게는 누구나 보어가 있어, 누군가의 보어가 되어주면서.

오늘 집에 가서 엄마한테 고맙다고 그래, 내가 완전하게 도와줘서 고맙다고.

'창민이가 좋아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시지에 눈에 쌓인다. 다른 말들은 그대로 눈 속에 묻어놔도 좋을 것 같다. 아이가 좋아한다는 말이 다행이다. 창민이가 엄마한테는 말을 귀엽게 잘하는가 보다. 그러면 됐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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