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 31일 23시 59분 59초에서, 여태까지 늘 그래 왔던 것처럼 똑같은 속도로 1초가 더 흘러간 것뿐인데 볼펜심 끝 간신히 걸쳐있던 스프링이 튀어 나듯 찰나의 순간에 수많은 지난 일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동안 견고하게 쌓아 올리던 돌담도 삐걱이며 신음소리를 내더니 이내 쏟아져 흐르는 감정들을 주체할 수 없어서 가만히 침대에서 눈 감는 일밖에 할 수가 없었다. 심방과 심실을 거쳐 혈관을 타고 목젖을 지나 서른 개의 방벽 너머를 목표로 전진하는 의젓하지 못한 녀석들을 제지하기 위해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짓눌려 말려들어간 아랫입술의 주름 사이로 가느다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정말. 정말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나보다 더 많은 경험을 하고 더 오랜 삶을 살아온 사람들의 입버릇 같은 '그 흔한 일들'이 오롯이 나의 소유가 되었다. 도전하고 실패하고, 만났다가 헤어지고, 마지막 배웅조차 하지 못한 아득히 먼 길을 떠나는 소중한 사람들의 흔적을 더듬다가, 어쩌다가 흘러내린 삶이었다. 스프링처럼 튀어 오른 기억들을 다시 끼워 넣으려 펜 뚜껑을 돌렸지만 이가 나갔는지 꽉 조여지지 않고 틱- 틱- 자꾸 헛바퀴만 돌았다. 모든 순간의 내 모습들이 아침 출근길 지하철에 몸을 실은 성씨조차 모를 사람들 같았다.
사방으로 튀어 오르는 스프링을 쫓아다니다 침대 아래에서 언제 적부터 있었는지 모를 노트 쪼가리들을 발견했다. 머릿속으로 떠올린 것들을 그려보겠다며 당차게 볼펜 뒤꽁무니를 눌러 펜촉 굴려가면서 채웠던 줄 칸들. 꿈도 목표도 하물며 작은 다짐조차 무엇 하나 끝까지 그려낸 것 없이 방바닥을 나뒹굴다가 발에 치여 밀려들어간, 사실상 버려진 것이나 다름없는 꿈이 집게차의 서늘한 집게 날에 복부가 짓이겨져 가래 끓는 소리를 연신 내뱉는 폐차처럼 먼지 속에서 가느다랗게 떨고 있을 뿐이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했더랬다. 진정한 자신은 이데아나 페르소나들 사이 깊은 곳에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까지의 모든 순간들이 포장지 겉에 기입된 고시정보, 성분표처럼 단 1g도 빠지지 않고 모여진 것이라는 말을 하고 다녔더랬다. 그러면서 삶에서 중요한 것은 과거로 비롯된 변명이 아니라 앞으로의 길을 걷는 발걸음과 의지라며 눈이 반짝였더랬다. 결과론적인 말이지만 참 애송이였고, 애새끼였다. 전에는 시도해도 될까 말까 했던 일들이 이제는 시도조차 하기 힘든 일들이 되어가고 있었다. 애송이가 말하던 그 변명을 서른의 내가 늘어놓고 있었다.
벌써 서른 번째 맞이한 해의 절반이 넘게 지났다.
2021년 1월 1일 00시 00분을 맞이하던 그 순간의 강력한 탄성을 지닌 스프링도 이젠 느슨하고 얇아져서는 헐렁한 펜 뚜껑으로도 쉽게 가두는 것이 가능하게 됐지만 이따금씩 튀어 오르곤 한다. 인정하기가 싫었던 게다. 그토록 부정하던 삶의 형태가 1g씩 1g씩 덧붙어 성분표에 박제되는 것이 끔찍이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게다. 그러니 막 서른이 되었던 순간에 쓰기 시작했던 이 글에 일곱 달 하고도 열두 날이 지나고 나서야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던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