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꺼풀이 무겁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자리를 떠난 지 오래였다. 그들의 발자국만 남은 자리에서 나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얼마나 빠르게 갈 수 있을까, 어디로 가면 되는 걸까, 언제쯤 도착하게 되는 걸까.
항상 그랬다. 언제나 모든 생각과 고민은 입구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일단 걸어볼까, 무릎을 움찔이면 의문의 녀석이 속삭였다.
그게 맞아? 괜찮은 거야? 모든 것의 시작은 모든 것의 끝이야.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어야 하고, 그 끝은 시작에서 결정되는 거야. 제대로 다 준비한 거야? 빠진 건 없는 거야? 어디로 갈 건데?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는 결정한 거야? 정말 확실한 거야?
나는 그 물음에 어느 하나도 답하지 못했다. 단 한 가지의 확실한 명제만 존재했다. 난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 뻐근한 눈가를 손바닥으로 덮고 누르자 새까만 시야에 반짝이는 알갱이들이 커졌다 줄어들었다.
손목시계를 살폈다. 숫자와 시계 프레임의 경계가 모호할 정도로 시야가 흐릿했다. 나는 미간을 모으고 안압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 이 자리에 선 지 사십 분이 지나고 있었다.
이제는 진짜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순 없잖아. 뭐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닐까. 일단 발걸음을 떼고 어디로든 시작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닐까. 그러면 의문의 녀석이 대답했다.
뭔가 해야 할 것 같아서 시작하는 건 안 하는 것만도 못 해. 너도 알잖아. 그러니까 내가 있는 거잖아. 그렇게 출발한 사람들은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거야. 그리고 너도 나처럼 그들에게 들리지 않게 될 거야.
의문의 녀석은 조소를 섞어 마지막 말을 속삭였다.
넌 이미 알아. 내가 이렇게 말하지 않아도. 이미 알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잖아. 어떻게든 되겠지 하면서 아직도 가만히 서있을 뿐이잖아. 넌 지금 이 상태로 한 걸음을 떼면 아무것도 아닌 결과만 만들어낼 뿐이야. 난 너를 위해서 말하는 거야.
지랄마. 니가 뭐라 떠들든 나는 시작해야 돼. 그래야 하니까.
의문의 녀석이 혀를 찼다. 분명히 경고했어.
입구에서 서성거린 지 사십오 분이 지난 시점에서야 나는 결심했다. 나는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화면에 집중했다. 노래는 점점 디미누엔도가 되고, 깜빡거리는 검은 선에 첫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손가락을 분주하게 움직이며 빠르게 문서를 채워나갔다.
"눈꺼풀은 무겁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자리를 떠난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