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이별의 책
관계의 틈에 돋은 모서리에 찔리고
생의 모퉁이에서 걸려 넘어진 것이
어찌 한두 번이었을까.
그러나 그곳 역시 지금에 닿기 위해
지나야만 했던 골목이었다.
차마 놓지 못한 꿈과 부르지 못할 이름,
상처로 남은 순간을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
하지만 그 모든 순간은
나의 밤을 수놓는 별이 되었다
잃어버린 이름들로 생의 이야기를 써왔다.
상실의 목록으로 가득한 삶의 서가에서
그날의 반짝임은 그림자마저 희미해지고
찬란했던 여름밤은 세월의 바람에 빛이 바랬다.
떨어지는 것이 꽃잎뿐일까.
멀어지는 것들이 사랑뿐일까.
이 별에서의 모든 순간이 이별이었다.
행위와 이별하는 연습을 한다.
욕심을 내려놓는 법을 배운다.
이제는 수명을 다한 인연에 아파하지 않는다.
모든 것과 이별할 날이 올 것임을 받아들이자
생은 비로소 온전해졌다. 기쁨이 내게 밀려들었다.
바람은 계절을 데리고 온다. 파도는 나를 이끌고 간다.
나는 언제나 초록의 한가운데에 서있다.
제멋대로 뻗은 가지. 내키는 대로 부는 바람.
나는 이 별에 잠시 머무는 여행자.
그러니 이뤄야 할 것은 없다.
누리지 않으면 안 될 지금이 있을 뿐이다.
부디 타고 남은 마음이 없기를 바란다.
다가온 것들을 온 힘을 다해 껴안는 매일이기를.
이 별에서의 여행이 끝나는 날.
즐거운 소풍이었다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찰나의 놀라움을 마술이라 부르고
계속되는 경이를 인생이라 부른다.
꽃이 흩날리는 순간이 봄의 절정이듯
흔들리며 나아가는 지금도 클라이맥스
우주에서 생명이란 얼마나 드문 현상이던가.
이토록 커다란 선물을 누리기에
인생이란 여행은 너무나 짧다.
마음 주지 않은 이들, 헛된 소유욕
질투와 두려움 따위에 낭비하기에
세상은 너무나 아름답다.
날이 더우면 과일이 달고
비가 내리면 초록이 돋는다.
날이 추우면 사랑을 안고
얼음이 얼면 두 손을 꼭 잡자.
물 빠지면 조개 잡고 물이 들면 노를 젓자
햇볕이 들면 빨래를 널고
바람이 불면 노래 부르자.
걷고 마시고 먹고 춤을 추자.
이 별에서의 소풍을 오롯이 누리기로 하자.
죽음은 살아있는 모든 존재에게
적용되는 단 하나의 명제일 테지
밤을 피할 수 없다면 별을 따라 걸어야지
빛을 향한 여정을 계속해야지
살아있는 모든 것을 사랑해야지
이 별에서 마주한 모든 풍경을 껴안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