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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 Oct 05. 2024

이별하는 연습

이별하는 연습


 이 책은 줄넘기 하나에서 시작되었다. 십 년 동안 하루를 열어주었던 행위와의 이별은 쉽지 않았다. 사람들은 별 거 아닌 일에 유난 떠는 것처럼 볼 테지만 내게는 오랜 친구를 떠나보내는 아픔이다. 지금 놓아버리고 나면 두 번 다시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갓 줄넘기를 시작한 조카들이 이단 뛰기며 엇갈려 뛰기를 연습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해야 한다. 당연했던 일이 다시는 하지 못할 일이 되는 것, 그것은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만큼 서럽다. 아직은 아니라며 애를 써보지만 이제 내 다리는 제자리 뛰기조차 버거워한다. 행위는 이별을 통보하지 않는다. 행위와의 이별은 어떤 구애의 몸짓도 소용없다. 가슴에 열이 올라 예전만큼 술을 마시지 못한다. 밤새워 노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 되었다. 개운한 기분으로 아침을 맞이한 것이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여기저기 아픈 곳이 늘어난다. 조금만 뛰어도 숨이 차고 쉽게 지치고 다친다. 예전에 자연스러웠던 동작들을 지금은 할 수 없게 되었다. 서글픈 일이지만 받아들여야 한다. 눈치채지 못하고 끝나버리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그때가 아니었으면 하지 못했을 일들이 있다. 이제는 억만금을 줘도 자전거 하나로 전국을 누빌 수 없다. 다시는 쉬지 않고 일했던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 그때, 그때에만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면 지금만 가능한 일도 있겠지. 안녕, 인사도 없이 보내지 않도록 한 걸음씩 살피며 나아가야 할 테지. 나이 들며 몸도, 일상도, 관계도 얼마나 쉽게 부서지는지 깨닫는다. 껍질이 깨졌을 때 어떤 이는 절망에 머물지만 어떤 이는 날갯짓을 시작한다. 익숙했던 세상과 이별했을 때 열리는 세계가 있다.   


 반환점을 지나면 나이 듦은 서글픔과 함께 온다. 걷고 먹고 움직이고 잠이 드는 모든 과정에 아픔이 깃든다. 예전처럼 빨리 뛰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조금만 걸어도 쉬이 지치는 것은 서럽다. 무리하면 반드시 어딘가 삐걱거린다. 발목에 염증이 생기고 무릎이 시리고 허리가 아파온다. 예전처럼 많이 먹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이가 약해져 씹지 못하는 음식이 느는 건 서글프다. 단단하고 질긴 음식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기름지고 매운 음식을 먹으면 반드시 탈이 난다. 예전처럼 무거운 물건을 번쩍 들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관절의 활동 범위가 좁아지는 일은 씁쓸하다. 조금씩 움직임이 잦아들며 느린 죽음을 맞이하는 기분이다. 서글픔이 그것뿐일까. 멀리 보지 못하고 힘차게 숨 쉬지 못하며 자주 아프다. 퇴화는 세월이 쌓일수록 가파르지만 감당하는 수밖에 없다. 이렇게 무너지면 끝이라는 생각에 영양제를 챙겨 먹고 운동을 시작하지만 노화는 늦출 수 있을 뿐 막을 수는 없는 종류의 것이 아닌가. 이러한 퇴행의 과정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퇴화도 진화처럼 변화를 이루는 부분임을 납득하는 수밖에 없다. 어차피 살아있는 모든 것은 죽는다. 생로병사가 각각 떨어진 별도의 단계가 아니라 하나로 묶어 파는 상품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어차피 아무 노력 없이 공짜로 받은 선물이 아니던가. 지금껏 누린 모든 것이 축복이었다. 당연하게 여긴 모든 순간이 기적이었다.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아직 이 정도라 다행이다. 속도를 늦추기 위해 할 수 있는 전부를 해야 하지만 계속 일어날 일이라면 나이 듦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빨리 걷지 못하면 풍경을 누리며 걷는 법을 배우면 된다. 자극적인 음식을 먹지 못하면 재료 본연의 맛을 즐기면 된다. 무거운 것을 들지 못하면 짐을 내려놓고 가볍게 사는 법을 배우면 된다. 무사히 깬 아침마다 감사해야만 한다. 멀리 보지 못하면 가까이 있는 기쁨을 찾으면 된다. 숨 쉴 때마다 생명의 기운을 들인다고 여기자. 아플 때면 돌봐달라는 몸의 신호라 생각하자. 신호조차 없는 것이 훨씬 무서운 일이 아니던가. 한 발을 쓰지 못하면 온몸으로 걷는 법을 배우면 된다. 예전에 당연했던 일들을 못하게 되었다 생각했지만 사실 그것 역시 원래 내 것이 아니었다. 세상을 먹고 마시며 잠시 누린 행복이라 생각하자. 지금 당연하다 여기는 행동도 언젠가 이별해야 할 일이다. 어차피 이별해야 한다면 힘껏 껴안고 보내주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나이 들며 잃어가는 것이 아니다. 세월을 들여 내가 되어가는 것이다. 원래의 나로 돌아가는 길이다. 지구라는 별을 타고 은하계를 여행할 기회가 있었으니 얼마나 근사한가. 푸른 지구 위에서 별들을 구경했고 무수한 계절에 머물렀다. 무수한 일출과 일몰을 지켜보았고 그 사이에서 사랑하고 꿈을 꾸었다. 그러고도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삶을 누릴 기회가 생긴 것이다. 매 순간 바람은 계절을 싣고 온다. 그러니 바람을 쥘 수 없다고 슬퍼할까. 바람을 피할 수 없다고 괴로워할까. 바람을 타고 날아가고 있는데.    


 안녕과 안녕 사이에서 미련을 남기지 않아야지. 진심을 다한다면 후회할 마음조차 남아있지 않을 테니까. 부를 수 없는 이름, 이루지 못한 꿈들이 나를 증거 할 테니까.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랑을 향해 노래를 부르며 나아가야지. 아름다운 것들을 음미하며 걸어가야지. 사랑을 껴안고 춤을 춰야지. 나를 부르는 목소리를 따라 별을 향해 나아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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