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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빈 Jul 11. 2024

 조울병만큼 공평한 병이 없다

<17화-충동성과 과대 이상증>

4년간 3곳의 정신과를 다닌 끝에 조울병(양극성 정동 장애) 판정을 받았습니다. 꾸준한 치료로 현재는 많이 회복되었고 스스로를 탐구하고 싶어 심리학도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듣고, 느끼고, 생각한 걸 기록하고자 합니다.


44. 마흔네 번째 진료-(23.10.16 월요일)

“선생님 안녕하세요. 어제 아버지가 갑자기 문자를 보냈어요. 학원 마치고 이야기를 하자고 하셨는데 너무 떨렸습니다. 피하고 싶었어요. 제가 사라지거나 아버지가 사라졌으면 좋겠어요. 이런 감정이 지난번에 이야기하신 수동적 공격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어쨌든 아버지를 만나서 이야기했는데 어떤 대학에, 어떤 학과를 갈 것인지 물어보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수능 성적도 안 나왔는데 어떻게 이런 걸 답 할 수 있을까요?”


“00 씨. 지금 이 행동 패턴이 본인에게 보일까요? 수동적 공격은 아니고요, 이전과 같이 회피와 비슷한 행위이죠. 어떤 부분이 회피인 줄 파악할 수 있을까요? 내가 싫어하는 말을 할 사람, 내가 듣고 싶지 않은 말을 할 것이 예상되면 그 상황 자체를 피하려고 하는 것이죠. 수능이 끝나고 어떻게 할 것인지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는 거잖아요? 물론 어떤 대학에, 어떤 도시로 가겠다. 이건 12월 이후에 알 수 있는 것이죠. 그렇지만 지금 나는 원하는 성적이 나오면 A를 하겠다, 내가 원하는 만큼 성적이 안 나오면 B를 하겠다. 이런 생각은 할 수 있죠. 지금 상황은 아이가 숙제를 안 했는데 계속해서 했는지 물어보는 사람을 피하려고 하는 것과 같아요. 내가 혹은 아버지가 사라졌으면 하는 것도 동일한 맥락이죠. 불편한 상황,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을 마주할게 뻔히 예상되니 그전에 피하려는 것이고요. 이렇게 하나씩 알아가야 해요.”


“아 그리고 또 궁금한 게 있어요. 진료를 보면서 의대를 가고 싶다고 생각하고, 정신과 의사가 되겠다는 사고에 사로잡힌 게 조울병의 조증에 가까운 증상이라고 하셨잖아요? 지인 중에 경찰대를 나와서 경찰을 하시다가 20대 후반에 사표를 쓰고 수능 공부를 해서 6개월 만에 의대에 들어가신 분이 있어요. 이 분도 자신의 미래를 고민하다가 정신과 의사라는 꿈을 가지고 의대에 도전했고요. 이 분과 저는 어떤 차이가 있나요?”


“제가 방금 들은 이야기를 통해서만 이야기하자면 지인분의 고민이 한순간에 표현된 것 같지만 오랜 시간 고민했을 것입니다. 이 길이 내 길이 맞는지, 이만큼 커리어를 쌓아왔는데 이제 와서 바꾸는 게 맞는 것인지 내면에서 엄청난 고민을 하셨겠죠. 예전에 경찰대 성적이 높았을 때는 의대와 맞먹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경찰대를 선택한 분들은 후회하는 분들을 종종 봤어요. 그분은 많은 것들을 생각하고 고민하고 또 현실성이라고 하는 제가 항상 강조하는 Realistc이라는 부분도 고민해 봤을 것 같네요. 이전에 경찰대 갈 성적이 나왔으면 조금만 하면 다시 감을 잡아서 공부하면 될 수도 있으니깐요. 그런데 우리는 그런 상황이 아니었잖아요. 차이를 좀 알겠어요?”


누군가 말했다. 조울병만큼 공평한 병이 없다고. 나이가 적든 많든. 남자든 여자든. 부유하든 가난하든.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다는 것.



45. 마흔다섯 번째 진료 -(23.10.23 월요일)

“선생님 제 원래 진단코드가 중 등고 우울증, 범불안장애였는데 중등도 우울증, 양극성 장애(조울병)로 바뀌었더라고요. 혹시 저의 어떤 부분이 조울병으로 진단하게 되셨나요?”


“두 가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바로 충동성과 과대 이상증이에요. 충동성은 자살사고나 자해 시도에서 드러났습니다. 00 씨 본인 스스로를 컨트롤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죠. 또 한 가지는 여러 번 말한 것처럼 지금 현실과 과도하게 벗어난 이상을 지니고 있어요. 이것을 현실로 믿는 경향이 있고요. 일반적 우울증에서 이러한 충동성과 과대 이상증이 나타나지 않아요. 그래서 양극성 정동 장애로 진단을 변경하게 되었어요”


“아.. 알겠습니다. 아버지가 왜 철학과를 가려고 하는지에 대해서 계속해서 물어보세요. 내가 철학과를 가는 게 마음에 안 드시나? 트집을 잡고 싶은가?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버지가 00 씨에게 왜 철학과를 가려고 하는가?를 물어보는 건 트집을 잡으려는 건 아닌 것 같고요. 자본주의 사회이자 자유민주주의 사회에 살아가는 한 꼭 필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00 씨, 하고 싶은 것 하고 좋아하는 것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 많지 않아요. 일정 부분 맞추어 나가는 것이죠. 지금 크게 하고 싶은 게 없다고 하더라도 대학을 가는 게 나한테 무슨 의미인지, 대학을 나와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는 고민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죠. 어차피 대학이 종착역이 아니라 중간 단계이잖아요? 어떠한 목표를 가지고 그 목표를 향해 갈 때 ‘지금의 이 단계가 필요한 단계인가?’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라는 것이죠. 물론 00 씨가 항상 이야기하는 공부를 깊게 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싶은 것들도 이유가 되지만 그게 대학 이후에 목표는 아니잖아요? 대학에서 필요한 걸 얻지 못하면, 내가 원하는 게 그곳에 없다면 그 시간과 돈을 들여서 굳이 대학에 갈 필요가 있을까요? 그런 측면에서 아버지가 질문하시는 것 같아요. 그러니 꼭 한번 생각해 봐요.”


“알겠습니다. 선생님 그런데 저한테 왜 조울병과 경계성 성격장애가 생겨났을까요?”


“00 씨, 조울병과 경계성 성격에 대해서 관련 서적을 보면 거의 뭐 성격파탄자처럼 묘사되는데요. 이게 본인한테 왜 생겨났다고 생각하세요? 환경적이나, 유전적이나, 심리적으로나 여러 가지 요인이 섞여 있고 또 연구에서도 명확한 발병 원인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내가 이것을 왜 가졌는지 알아가는 것 자체가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병의 정도가 개인마다 차이는 있지만 어떤 요소가 방아쇠가 되었는지 찾아가는 과정 자체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할 때 내가 지금 어떤 맥락에서, 왜 이런 행위를 하고 이런 감정을 느끼는지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죠. 이건 본인 스스로 하기 힘들 것입니다. 그래서 저랑 같이 이야기하고 또 스스로도 찾아보면서 내면에 대한 성숙도와 이해도를 높여나가는 것이고요. 그 속에서 유년 시절 얽혔던 실타래를 제대로 풀어내면 앞으로 삶에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보통 유년 시절 보호자와의 관계가 제대로 성립되지 않거나, 끊임없이 억압돼 있는 상태에 지속되면 어느 순간 폭발하는 것이죠. 억눌러왔던 감정을 회피하기 위해 조증 상태를 만들어낸다고 볼 수 있는 것이고요. 좀 도움이 되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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