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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빈 Jul 03. 2024

왜 사랑하고 믿어주는 사람 등에 칼을 꽂으려 해요?

<16화-당신의 상황은 부모 때문이 아닙니다>

4년간 3곳의 정신과를 다닌 끝에 조울병(양극성 정동 장애) 판정을 받았습니다. 꾸준한 치료로 현재는 많이 회복되었고 스스로를 탐구하고 싶어 심리학도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듣고, 느끼고, 생각한 걸 기록하고자 합니다.


41. 마흔한 번째 진료-(23.10.09 월요일)

“선생님 안녕하세요. 정말 자주 보는 것 같아요. 지난번 검사 결과를 알려주셨을 때 제가 사회성이 현저하게 떨어진다고 하셨는데  경계성 성격장애 관련한 책을 읽어보니 제 증상이랑 똑같더라고요. 상대에 대해 집착하고, 그 사람에 대한 평가가 극단으로 치닫고. 사회성이 떨어지는 게 곧 경계성 성격장애랑 같은 건가요? 저는 어디에 해당하나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00 씨가 물어본 사회성이 떨어지는 것과 경계성 성격장애는 다른 건데, 지금 두 개 모두 가지고 있어요. 언제는 상대방이 진심을 좋았다가 한때는 이 사람을 진심으로 증오하고 극과 극을 달리는 것이죠. 저한테 면담을 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그렇고, 자살시도나 자해 등 충동적인 생각이 드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고요. 어떤 특별한 치료법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제 지금 상태를 알았으니 앞으로가 중요한 것이죠. 앞으로 대학을 가고, 사회에 나가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수많은 일에 부딪힐 겁니다.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고 새로운 상황을 맞닥뜨릴 때 새로운 생각이 들 것이고요. 그때 저랑 이야기해 나가면서 잡아나가는 것이죠. 마침 제가 잘하는 부분이고요. 나르시스틱 한 부분과 타인에 의존하는 것도 동시에 오는 것입니다. 자기애성 성격장애는 결핍에서 오는데 그 결핍을 메우기 위해 사람한테 매달리는 것이고요. 시간적으로 경제적으로 여유가 되면 수능 끝나고 꼭 심리 상담을 지속적으로 받아야 해요. 특히 성격적 부분의 치료를 할 때는 상담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42. 마흔두 번째 진료-(23.10.11 수요일)

“안녕하세요. 선생님 너무 기분이 이상해서 또 찾아오게 되었네요. 서점에서 자기애성 성격장애 관련한 책을 읽었어요. 내면이 무너져 내리는 걸 느꼈어요.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의 내 행동들을 하나하나 관찰하고 평가하는 듯했어요. 가장 핵심적인 생각은 ‘이런 상태면 살아서 의미가 있나? 타인에게나 자신에게나 이렇게 무거운 짐을 안길 거면.. 깔끔하게 죽는 게 더 현명하지 않을까? 어차피 이런 병적 증상이 있으니 사람과 관계를 맺기도 어려울 것이고, 연애를 하기는 불가능할 것이고, 도무지 미래가 안 보여요. 나로 인해서 누군가가 이렇게 힘들어하는 걸 보고 싶지도 않아요.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선생님 찾아와서 면담하고 약 먹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저의 운명일까요? 너무 지치는 것 같아요. 그냥 스스로한테 힘이 빠지는 것 같아요. 끊임없이 죽음을 갈구하는 자아와 끊임없이 삶을 갈구하는 두 자아  끊임없이 술래잡기하는 것처럼요.”


“00 씨 당연히 힘들죠. 그렇다고 왜 못 버텨요? 군대라는 곳도 100명 중에 1명은 맞지 않아서 가지 않아요. 그렇다고 나머지 99명이 행복해서 그곳에 있고 그 시간을 견뎌내는 건 아니에요. 그런데 00 씨는 그걸 못 했잖아요. 맞지 않다고 손사래 칠 것이 아니라, 힘들다고 도망갈 것이 아니라 둥글둥글하게 넘길 수 있는 그런 힘을 키워야 해요. 제가 전에도 설명한 것 같은데 분명히 호전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충분히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어요. 다만 시간과 노력이 걸리죠. 그런데 본인은 지금 당장 원하는 거고요. 저랑 진료를 보면서, 이렇게 검색해 보고 책을 읽으면서 내 병에 대해, 나 자신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지금 00 씨는 아무런 노력을 안 하고 있어요. 제가 뭐라고 했죠? 글 10줄 안으로 적어오라 했죠? 진료시간이 길어져서 그런 게 아니에요. 그건 생각이 깊은 게 아니고 겉도는 것이기에 생각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걸 끊어내야 해요. 혹시 충동적으로 행동한 게 있을까요? 자해했어요? 지금 많이 좋지 않네요.. 약 바꿀 거고 다음 주에 봐요”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냥 지금, 이 상황을 견뎌내지 못하고 자살로 삶을 매듭 지을 수도 있는 거고,  혹은 글쓰기를 너무나 좋아하는 나에게 그 무엇보다 엄청난 선물(=소재)로 만들 수도 있다는 것. 남은 30일만 잘 마무리하면 조울증 환자도, 경계성 인격장애 환자도, 자기애성 인격장애 환자도  수능 칠 수 있고, 대학 갈 수 있고,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걸 보여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건 나만의 이야기로 만들 수도. 어떤 이야기를 써 내려갈까.



43. 마흔세 번째 진료-(23.10.12 목요일)

“선생님 내면에서 뭔가 엄청난 에너지가 쌓이고 있는 것 같아요. 이것이 한 번에 터질 것 같은 느낌이 들고요. 그리고 이 댐이 터지면 저도 제 자신을 컨트롤하지 못할 것 같아요”


“어떤 에너지인가요? 댐이 터진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요?”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냥 이 고통 속에서 서서히 침식되기보다는 한 번에 끊어내고 싶어요”


“00 씨 왜 자살 충동이 들까요? 지금 그건 굉장히 공격적인 성향이에요. 아니,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떠나서 인간 대 인간의 관계로 생각해 봐요. 왜 사랑하고 믿어주는 사람 등에 칼을 꽂으려 해요? 항상 불우한 환경 속에 있으면 내가 위로라도 해주겠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것도 아니잖아요? 지금 00 씨의 상황은 더 이상 부모의 탓이 아닙니다. 본인이 선택하고 걸은 길이고요. 결국 아버지가 다 해주신 것 아닌가요? 공부하고 싶다고 해서 돈도 빌려줘, 여행 가고 싶다고 해서 지원해 줘, 치료 필요하다고 해서 치료도 시켜줘. 뭘 더 해줘야 하는 거죠? 왜 그들한테 ‘너희들 때문에 죽는 거다. 한번 고통을 느껴봐라 ‘고 하는 거죠? 검사에서도 나왔고 똑같은 패턴을 반복하면 안 되잖아요. 작년 11월부터 지금껏 불안이 사라졌던 것이 아니라 잠시 잊었다가, 다시 튀어나오는 이것이 00 씨가 현실을 인지해가는 과정인 것 같아요. 이번 시험은 무언가 성취를 하고 좋은 대학에 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환상을 부수고 나 자신을 아는 게 중요하다고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00 씨가 여행에서 편안함을 느꼈던 이유는 평등함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생각해 보면 지금 우리도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우주라는 거대한 공간에 지구라는 조그마한 행성. 그 지구에서 동아시아 저 끝 어딘가에 붙어있는 들어보지 못한 한국이라는 나라. 그 한국이라는 나라에서도 듣지도, 보지도 못한 대구, 그 대구에서도 수성구, 그 수성구에서도 만촌동이라는 이 조그마한 곳에서 살아가는 거라고요. 그 좁고 좁은 집단 안에서 그냥 공부를 좀 잘하는 사람이 있고, 그냥 돈을 좀 잘 버는 사람이 있고, 그냥 운동을 좀 잘하는 사람이 있죠. 진짜 말 그대로 이름 모를 작은 나라의 들어도 보지도 못한 도시에 사는 한낱 아시아인에 불과합니다. 뭘 그렇게 타인과 비교하고 남들이 뛰어나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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