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심리검사는 치부를 드러내는 일>
4년간 3곳의 정신과를 다닌 끝에 조울병(양극성 정동 장애) 판정을 받았습니다. 꾸준한 치료로 현재는 많이 회복되었고 스스로를 탐구하고 싶어 심리학도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듣고, 느끼고, 생각한 걸 기록하고자 합니다.
(이전화에 이어서 연재됩니다)
진료실 문을 열고 나왔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공기가 달랐다. 느낌이 너무 이상했다. 분명히 내가 듣고 싶었던 검사 결과를 들었는데 왜 이런 감정이 들까.
진료실을 나와 부모님이 저녁 먹자고 했다. 중식당을 가고 싶었는데 어머니가 기름기 없는 한식집으로 가자고 했다. 자리에 앉아서 김치찌개, 고등어구이를 시켜서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내게 질문하셨다.
“너는 결과를 들어보니 어떠니?”
“아직 잘 모르겠어요.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빠는 어떠세요?”
“나는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을 그냥 문서화했다고 생각하는데. 뭐 나도 여러 번 이야기했고, 너도 알고 있는 것 아닌가?”
그 순간 화가 치밀었다. ‘아니 맨날 뭐가 그렇게 잘나서 본인은 모든 게 맞고, 본인은 모든 걸 알고, 본인이 진리라고 생각하지? 도대체 왜?’ 음식이 나왔지만 나는 먹지 못했다. 숨이 가빠졌고 도저히 식당 안에 있기 힘들었다. 그래서 부모님께 집에 가야겠다고 말하고 밥 먹는 중에 나왔다. 집에 갈 수도 없었다. 일단 걷고 싶었다. 눈물이 터져 나왔다. 속으로 소리를 먹으면서 울었다. 울면서 걸었다. 산을 걸으면서 내게 정신과를 가라고 한 누나와 통화를 했다. 누나도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했다. 부모님과 똑같이 말했다. ”00 씨, 지금 00 씨가 만든 허상의 세계를 살고 있는 거 아니에요? 본인의 세계에 갇혀서 거기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데 과거의 경험에만, 미성년자의 경험에만 갇혀서 평생을 살아갈 건가요? 지금 스물네 살의 인생도 살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고, 그걸로 지금까지 치료받았고, 이건 단순히 문서화된 것 아닌가요? 그런데 이것 때문에 왜 그토록 힘들어하는 건가요?”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살 충동이 치솟았다. 심리검사지를 받아 든 나의 감정은 ‘이렇게 해서 앞으로 살아갈 수 있겠나?’ 나는 ‘사회성이 결여된. 육체적 성장만 했지 정신적 연령과 건강은 매우 취약한. 세상에 불필요한 인간’으로 스스로를 받아들였다. ‘이런 상태로 살 거면 사는 게 의미가 있을까? 이럴 거면 왜 살지? 그냥 저 길 위에 달리는 차에 치여서 죽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보고서에서 말한 것처럼 심리적 이득을 취하기 위해 본래의 감정보다 과장된 사고에, 부정적 사고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끊임없이 반추하는 걸 알겠는데 여기서 벗어나지를 못했다.
당시에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뭐 어떻게 해야 하지? 나란 사람은 왜 이렇지? 그냥 사회성 결여된 애새끼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제 주치의 선생님한테 결과 듣기 전에 시험 칠 때보다 떨렸어요. 엄마, 아빠 이렇게 한 분씩 오니 진짜 와.. 무슨 선고를 받는 거구나 싶더라고요. 결과를 들으면서는 정말 떨렸습니다. 떨렸다는 게 겁먹거나 위축돼서 떨린 게 아니라요, 치가 떨린다 할 때 떨린다요. 제가 부정당하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마치 너는 네 한 몸 간수하지도 못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생명체에 불과해!라는 느낌요. 수능이 끝나면 입시는 끝나겠죠. 그렇다고 이 기질이, 이 상황이 진전되는 건 아니잖아요. 없던 사회성이 생겨나고, 끊임없는 반추에서 헤어 나오고, 나르시시스틱 한 면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깐요. 또 선생님한테 혼나겠죠. 그리고 저는 쭈글쭈글해 있을 거고요. 그리고 또다시 며칠 갔다가 또 난관에 부딪히고 또다시 쭈글쭈글하고.. 언제까지 이걸 반복해야 할까요. 내가 이것밖에 안 된다는 것을 못 받아들이는 거 아닌가요.
걷고 걷고 또 걷다가 다시 집에 들어가서 진이 빠져서 잤다. 다음날 다시 정신과를 찾아갔다.
“00 씨 오늘 병원 오는 날이 아닌데 어떻게 왔어요? 무슨 일 있어요?”
“아.. 어제 결과 듣고 너무 마음이 심란했어요. 자살 충동도 강하게 들었고요. 검사 결과를 들으면서 세상에 쓸모없는 존재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00 씨 어느 정도 흔들릴 것 예상했어요. 그래서 사실 수능 끝나고 알려주려고 했어요. 그런데 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안 나왔다고 거짓말할 수도 없고 또 오래도록 기다렸잖아요? 왜 저를 매번 혼내는 사람으로 만들어요? 00 씨가 글에서 적었듯이 치부를 드러내는 게 맞습니다.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내면 깊숙한 곳의 치부를 건드려서 길어 올리는 거죠. 이번 검사 결과 굉장히 잘 나온 것입니다. 저도 검사하면 단점이 있고 문제가 나올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검사를 진행하는 이유는 그 치부를 온전히 드러내고 그것을 인지하기 위한 것이죠. 이전에 알고 있든 모르고 있었든, 현재 나의 상태를 전문적으로 파악하고 지금 내가 어떻게 행동하고 사고하는지 알기 위해서 검사한 것이고요.
문제 하나 낼게요. 지금 00 씨의 행동은 뭘까요? 회피, 감정의 널뜀. 세상 사람들 모두가 그저 행복해서, 그저 즐거워서, 그저 잘 맞아서 본인의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둥글둥글하게 넘기는 거죠. 00 씨도 그게 필요해요. 융통성 있게 넘길 수 있는 법을 아는 것. 감내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 죽기는 뭘 죽어요! 얼른 학원 돌아가서 공부해요. 공부! 이 아까운 시간에 지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