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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빈 Jul 16. 2024

정신과 환자는 정신과 의사가 될 수 있을까?

<18화-의사도, 상담사도 아무도 이 병에 걸린 적이 없습니다>

4년간 3곳의 정신과를 다닌 끝에 조울병(양극성 정동 장애) 판정을 받았습니다. 꾸준한 치료로 현재는 많이 회복되었고 스스로를 탐구하고 싶어 심리학도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듣고, 느끼고, 생각한 걸 기록하고자 합니다.


46. 마흔여섯 번째 진료-(23.10.30 월요일)

“00 씨, 오늘 평소 일정보다 빨리 오게 됐죠? 무슨 일 있었어요?”


“기분이 평소보다 더 요동치는 것 같아요. 너무 불안하고요. 수능이 20일도 채 안 남았는데 마치 3년 전 군 입대를 앞두었을 때와 느낌이 비슷한 것 같아요. 군대라는, 수능이라는 큰 무언가를 앞둘 때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회피 증상이 두드러져요. 침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하루 종일 우울해하고 도피하려고 해요. 그런 생각도 들었어요. ‘만약 수능날 시험장에 안 가면 어떻게 하지?’ 스스로에 대한 두려움도요”


“00 씨 수능이라는 게 인생을 결정짓는, 삶을 평가 내리기 위해 응시하는 게 아니에요. 수능이라는 시험제도 속의 자신의 위치를 알기 위해서 인 거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인생을 살 것인지, 어떤 성격인지와도 무관하고요. 시험을 치기 전까지는 내 실력이 정확히 어떤지 모르죠. ‘어 나 생각보다 잘하는 것 같은데?’하면서도 정말 낮은 성적이 나올 수도. ‘아 나는 안 될 것 같은데?’ 싶으면서도 막상 해보면 정말 좋은 성적이 나올 수도 있는 것이고요. 즉, 지금 수능이라는 환경에서 내 실력의 현재 위치가 어디인가를 깨닫기 위해서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오히려 좋은 기회라고 생각 들어요. 객관적으로 측정되니 이제 더 이상 아버지와 갈등을 벌일 필요도 없고요. 좋은 성적이 나오면 ‘아 내가 역시 맞았구나’ 그렇지 않으면 ‘아, 아버지 생각이 맞았네’라고 깨닫는 것이죠. 스스로를. 오늘 해준 이야기 잘 생각해 보고 다시 만나요.”


얼마 전에 주치의 선생님이 내게 해주신 말이 떠올랐다.

“00 씨, 왜 좋은 성적을 받아야 하죠? 지금 00 씨는 벌써부터 결과를 재단하고 도피하려고 하는 것이잖아요. 이게 안 되면 나는 할 필요 없다고 도망치는 거고요. 지금까지 수능 공부를 꾸준히 해온 것도 아니고 공부를 특출 나게 잘했던 것도 아닌데 1년 만에 괄목할 성과를 얻으려는 건, 그게 오히려 ‘세상의 이치’에 안 맞지 않을까요?


47. 마흔일곱 번째 진료-(23.11.08 수요일)

“00 씨. 수능 이제 8일 남았죠? 1주일 하고 하루 더. 다 와보니 어때요? 할 수 있죠? 제가 진짜 머리끄덩이 잡고 끌고 왔는데 (웃음) 2주 전만 하더라도 엄청 힘들어했잖아요. 우리가 항상 이야기했던 게 뭐였죠? 회피. 이상과 현실의 간격 속에서 괴로워하고, 미리 결과를 재단하고 거기서 도망가려고 하는 것. 그걸 막기 위해 우리가 함께 발맞춰온 것이고요. 이제 중요한 건 제가 옆에 없더라도 00 씨 스스로 할 수 있는 힘을 키워야 한다는 거예요.”


“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선생님이 지난주에 저한테 수능 끝난 후 어떤 길을 걸을 것인지, 무엇을 하며 경제생활을 할지, 내가 좋아하는 건 무엇인지 대략적으로나마 생각해 보라고 하셨잖아요.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돌고 돌아서 다시 의대 그중에서 정신건강의학과에 흥미가 있어요. 정신과 의사한테 진료받는 정신과 환자가 물어보기 민망한데 정신과 쪽으로 걸어가는 건 어떨까요? 과거랑 다른 게 있는데 이게 정말 맞다면 3,4년 투자할 의향도 있어요.”


“처음 진료 시작할 때도 정신과에 관심 있다고 이야기한 것이 기억나네요. 00 씨. 정신과 의사의 자질로 가장 중요한 것이 중도에 있는 것입니다. 수많은 환자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치료자가 먼저 그 중심을 굳건히 다져야 하는 거죠. 그래서 전문의 수련받을 때부터 가장 우선시하는 게 나를 없애는 것이에요. 내 생각을 덜어내고, 들이닥치는 파도에 휩쓸리지 않게 트레이닝을 받는 것이죠. 이를 위해서는 소위 사회에서 이야기하는 보통의, 평범한 삶을 걸어왔어어야 해요. 치료자가 먼저 흔들리면 안 되니깐요. 그런데 00 씨는 보통에서 많이 벗어난 삶을 걸어와서 이 분야에 적합하지 않을뿐더러 성격 특성상 나를 걷어내는 트레이닝을 소화시키기 어려울 거예요.”


“아… 알겠습니다. 감사해요”


주치의 선생님의 방 문을 닫고 나왔다. 이후에 바로 심리상담으로 이어졌다. 심리상담사 선생님께 이 이야기에 대해서 물어봤다


“00 씨 어서 와요. 어떻게 지냈어요?”


“선생님 안녕하세요. 방금 주치의 선생님이랑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서 고민해 보라고 하셔서 생각해 봤는데 돌고 돌아서 다시 정신과에 관심이 가더라고요. 그런데 주치의 선생님은 제가 살아온 환경이 평균과 너무 다르기에 적합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오히려 제가 이 병을 겪었으니 누구보다 환자들을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저는 음.. 원장님 말도 맞고, 00 씨 말도 맞다고 봐요. 그래서 중립적인 입장입니다. 임상에 있는 상담사들 중에서도 가만히 보면 상담하다가 본인이 그 상황에 과몰입을 해서 스스로 먼저 멘탈이 무너지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대학원 때 지도 교수님이 항상 하시던 말이 있죠. “자기 멘탈도 관리 못 하면서 누구 멘탈을 케어해 주나? 환자 2명이 앉아서 뭘 하려고?” 그런데 제 후배 중에도 그런 케이스가 있어요. 본인이 학교 폭력 피해자라서 오랜 기간 심리상담을 받았는데 이것이 계기가 돼서 임상 심리사의 길로 들어왔어요. 그 친구는 학교에 상주하는 상담사를 준비하고 있어요. 자신이 학교에 가게 되면 자신이 겪었던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생기더라도 그 누구보다 피해자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다고요. 사실 의사도, 상담사도 아무도 이 병에 걸려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본인은 그 고통의 길을 걸어왔으니, 그 병과 오랫동안 싸워왔으니 그 누구보다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의 마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것요. 두 가지 길을 모두 생각하지만 진심으로 원한다면, 본인이 원한다면 해봐야죠. 정신과 의사가 안 되더라도 이 분야에 대해서 공부하는 경험은 어떻게든 00 씨에게 분명 도움이 될 거예요.”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아버지와의 관계가 항상 고민이에요. 아버지랑 어떻게 하면 관계가 좋아질 수 있을까요?”


“00 씨는 왜 아버지랑 관계가 좋아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제가 교도소나 소년원에 있을 때 수감자들과 상담하면서 부모님과의 관계를 물어보면 하나같이, 정말 편견이 생길 정도로 안 좋았어요. 닭이 먼저인가, 알이 먼저인가에요. 결국 아버지로부터 시작된 것이죠. 아버지가 심리적으로 건강한 사람이어야지 아들과 건강한 인간관계를 맺고, 그 아들이 성장해서 건강한 사회 구성원이 돼서 또 건강한 가정을 꾸리고, 건강하게 타인과 교류할 수 있는 것인데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졌으니깐요. 아버지는 그렇게 자랐다고 하더라도 아들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깐요. 그래서 전 00 씨 스스로가 건강해졌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건강하게 되면 결국 내 주변 사람들과도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있고, 부모님과도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있으니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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