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땡그리엄마 May 20. 2020

엄마 과학자 생존기 - 23

23. 애는 부모 책임인데, 학생은 누구 책임인가?

23. 애는 부모 책임인데, 학생은 누구의 책임인가?



누군가 필자에게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좋았던 시절이 언제냐고 묻느냐면,

필자는 대학원생 때를 말할 것이다.

물론 더럽게 힘들었던 시절이 언제냐고 묻느냐면,

그 역시 대학원생 나부랭이던 시절을 말할 것이다.

엄마의 삶과 학생이던 삶을 비교해보자면, 학생이던 시절이 세상에서 가장 좋았던 시절임은 부정할 수가 없을 것이다.


왜 굳이 이 시절이 좋은 시절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것은 내가 가져야 했던 책임이라는 무게의 크기가 가장 작았던 시절이기 때문일 것이다.

엄마가 되어 한 생명을 책임지고 보듬는 책임보다는,

그저 배우기만 하면 되는 학생 시절이 훨씬 편했다.


이공계 대학원이라고 하면 다들 가운 입고 고글 쓰고 멋들어지게 실험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기존 본인의 포스팅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이공계 실험실의 생활은 청소와 정리의 순환이다.

실험을 배우고, 연구를 배우는 과정은 가사노동과 별반 다르지 않으며, 가사노동을 우리가 부모에게 배우듯 부모라 생각하면 빡이 치겠으나 아무튼 스승을 통해 노하우가 담긴 실험 노동을 배우는 격이다.

그러한 이유로 어떤 스승에게 배우느냐가 업계에서는 가장 중요하다.

그나마 다행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우리가 부모를 선택함에 있어서는 절대 선택권이 1도 없겠으나,

그래도 스승은 나름 선택권이 존재한다. 고로 잘 골라야 한다는 것이 학계의 선배들이 남기는 정설이다.


이공계 대학원생들 뿐만 아니라 모든 대학원생들이 그러하겠으나..

하튼 대학원생 (이라 쓰고 전생에 죄를 지은 사람이라 칭한다) 들이 학위 과정 동안 배우는 것들은,

그저 그런 지식이 아니다.

우리는 독립된 연구자로서, 훗날 수행하게 될 주 업무인 '연구를 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연구의 범주라는 것이 학계마다 포함하는 것이 다르겠으나,

어떤 의미에서 이공계에서의 연구란 벤치 사이언스라 불리는 실험(=테크닉)과 이론의 결합을 배운다.

음.......

의학드라마에서 레지던트 혹은 인턴들이 교수님께 매번 혼나면서 하는 거랑 비슷하다 보면 된다.

그분들은 그 과정을 통해 의학이라는 것을 배우는 거고

나 같은 사람들은 이를 통해 연구라는 것을 배운다.


의학드라마를 보다 보면 우리는 간혹 심각한 씬을 마주한다.

그러한 씬은 대게 레지던트인 조연급 혹은 주연급 배우가 미숙한 경험을 바탕으로 잘못된 판단을 내리고,

이로 인해 환자는 생사를 넘나드는 엄청난 비극을 마주하며,

이 사고를 친 배우는 멘붕에 빠진다.

그러면 곧 대가께서 나타나시어 이 일을 해결해주시고,

참된 스승의 가르침을 사고 친 배우에게 짜잔 하고 선사하신 뒤 발걸음도 총총총 떠나곤 한다.


음.... 그래 이공계 연구자들은 이런 비슷한 일을 겪는다.

다만 우리가 생사의 길로에 세우는 것이 "사람"이 아니라 "실험 결과" 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 역시 멘붕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으면 대가 (=지도교수님)께서 나타나시고 우리에게 참된 가르침 (=고상한 욕)등을 날려주신달까.....(추신: 모두 이런 것은 아닙니다.....)


도제식 교육은 스승의 노하우를 제자가 그대로 물려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다.

여기의 전제는 스승의 품성과 지식이 풍부하고, 제자를 육성하는 것에 매우 적극적인 분이라는 것과

제자 역시 스승을 존경하고, 그의 노하우를 물려받겠노라 의욕이 아주 뿜 뿜 해야 한다.

사실 도제식 교육 시스템은 굉장히 많은 단점을 가지고 있으므로 (당신들이 아는 뉴스에 나온 그런 것.....) 

일단 단점은 패스하고.....

이 시스템의 포인트 한 가지를 언급해보자면, 학생은 스승의 소관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포인트 덕에 본인은 출산휴가를 받았고, 복귀 후엔 출퇴근 시간도 조절이 가능했다.

그리고 학생이기 때문에 잘 몰라도 괜찮았고 (공부하면 되니깐~)

학생이기 때문에 실수를 해도 괜찮았다 (다음에 안 하면 되니까~).

학생이기 때문에 우리는 실험실의 업무를 담당하지만, 실험실 안전관리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의 책임이 아니었다.


이공계 실험실이란 게 다 케바케지만,

유기합성 실험실은 위험하다.

유기용매라는 것들은 증기에도 불이 붙을 정도로 불과 친분이 두꺼운 데다가,

사용하는 시약에는 금속이 첨가되어 있는 경우도 있어서, 역시 금속 덕분에 반응성이 높아 불이 잘 난다.


정리하면 이렇다.

이공계 실험실은 학생들에게 던전이다.

엄청난 함정이 곳곳에 숨어있는 던전....

뭐 하나 잘못 건드리는 순간, 신입의 실수는 불꽃을 타고 화르륵 실험실을 정말 레알 불 질러버릴 수 있다.....

온갖 슬라임이 난무하는 RPG 게임의 던전 같은 이공계 실험실에서

실험 중 발생할 수 있는 안전사고는, 흡사 게임에서 아이템 잘 못써서 자폭하는 것과 동일한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제식 시스템은 연구실에는 그럭저럭 잘 맞는 방식일 수도 있다.

게임 잘하는 사람이 많은 길드에 있으면 오오오오오래 살아남듯이,

유능한(??) 사수가 많은 랩에 소속되어 있으면 얻어갈 것이 많다.

논문을 얻어갈 수도 있고, 실험 스킬을 더 배워갈 수도 있고....

여차하면 죽을수도 있다.... 심지어 혼자 죽는 게 아니라 길동무를 꽤나 데려갈 수 있는 위험한 곳이다.

따라서 위험한 정리 - 특히 시약 버리는 행위... 자체는 화학물질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경험이 없다면 쉽게 진행되어서는 아니 되는 일이다. 

즉 숙련된 경험과 화학물질, 화학반응에 대한 충분한 이해도가 없다면 무슨 짓을 하건 위험하고, 위험하다는 것은 곧 저승사자랑 소개팅을 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필자가 대학원 시절을 통틀어 시약 버리기를 시전한 시기가 박사과정 때였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나의 지도 박사님들이 그나마 나를 믿고 시약 버리기를 시전할 수 있던 시기는 박사과정에 들어가 나의 내공이 쌓였음이 증명된 이후였던 것이다.

이전 포스팅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필자는 책임자가 가장 마지막이 퇴근한다 배웠다.

실험실 책임자란 그만큼 내공이 있고,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기에 다른 사람들의 실험 세팅만 보아도 위험하다 위험하지 않다를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지막에 실험실을 점검하고 불을 끄고 가라고 배웠다.

당연히 시약을 버림에 있어서도 필자는 버리기 전 직원들이나 후배들에게 시약 정보를 확인하고 버리기를 트레이닝시켰다.

본인이 받은 그대로의 트레이닝이다.

내가 이렇게 배웠기에, 간혹 올라오는 실험실에서 시약을 버리다 일어나는 큰 사고가 이해되지 않는다.


실험실에서 불이 붙는 사고는 늘상 일어날 수 있다.

안전교육을 받는 이유는 일어날 수도 있는 이 사고에 대비하기 위한 교육이다.

실험실에서 시약을 버릴 때 한 명이 혼자 하지 않는 이유는, 불이 났을 때 불 낸 사람 대신 누군가는 불을 꺼야 하기 때문이다.

시약을 버릴 때 박사님들이 우리와 함께 했던 이유는 우리가 불을 내기 전에 말릴 수 있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 스승의 몫이기 때문이다.

또한, 학생의 교육, 능력, 다치지 않게 또 다쳤을 때 병원에 보내는 것 역시 스승의 몫으로 남기 때문이다.


흔히 아이가 다치면 아이의 치료비부터 케어 모두 부모의 책임이라 한다.

그런데 학생이 다치면 이야기가 좀 다르다.

학생은 누군가의 자녀이고, 누군가의 제자이고, 학교라는 사실 가장 안전해야 하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학생이 다치면 서로에게 책임을 묻느라 너무 바쁘다.

특히나 이공계 대학원생이 다치면 사건이 정말 커진다.

이공계 특성상 다쳤다의 개념이 적용될 때는 사실 우리가 아는 아이들이 다치는 정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심각한 화상이거나,

심각한 자상이거나,

혹은 그냥 사망하였거나.....



일반적인 학교에서 학생의 상해사고 시 지급하는 금액의 범주를 훌쩍 넘는다.

살아도 장기간의 부상, 사실상 진로를 변경해야 하는 정도의 심각한 후유장애....

사고가 일어난 학교 그리고 담당 교수로서는 심히 부담스러운 상황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사고 당사자와 그 가족들의 참담함 역시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필자 역시 이공계 던전에서 여러 번의 자잘한 사고 (죽지 않을 만큼의 사고)를 피해 살아남은 1인이기에...

간혹 나오는 실험실 사고의 이야기가 남의 일 같지가 않다.

그래서 좀 더 촘촘한 실험실 안전 규약이 생기길 희망한다.

필자가 배운 것처럼 실험실 안전 담당자가 단순한 기술직이 아닌, 

연구원 출신의 경험 많은 분들로 대체되길 희망한다.

이공계 던전의 특성을 부디 잘 이해하시어, 

이공계 학생들의 상해보험 가입 시 보장 좀 크게 고려해주시길 희망한다.

실험을 하던 이가 다친 후, 후유장애를 얻는 경우 이 학생의 진로를 함께 고민해줄 수 있는 시스템이 존재하길 희망한다.

나는 비록 과도기에 배웠던지라 간혹 죽을뻔한 고비를 넘기며 그나마 다행히 공부했지만,

우리가 돈 주고 학교에 연구를 배우기 위해 들어갔는데, 

굳이 죽을 고비까지 넘겨야 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