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라는 상상의 세계
딸의 임신소식을 전화로 들을 때만 해도 내가 임신했을 때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단지 나 대신 딸이 엄마가 되고 어머니 대신 내가 할머니가 되면서 자리가 바뀌었을 뿐이라고.
시부모님이 내 임신 소식을 듣고 잘했다고 말씀하시며 기뻐하신 강도에 비하면 나는 성격상 좀 덤덤한 편이었다. 그냥 딸이 때가 되어 결혼을 했고 때가 되어 임신을 했으니 나도 때가 되면 할머니가 될 테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그것을 받아들여진 것뿐이다.
하지만 임신 후 출산까지 딸이 임산부로서 엄마가 되는 준비를 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새로운 세계를 만나게 되었다.
나는 임신 소식을 알고 육아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딸이 임신을 하면 주려고 고이 간직하고 있었는데 딸은 몇 장 읽어보고는 아무 관심이 없어 지금도 내 방 책꽂이에 꽂혀있다. 반면 딸이 우리 집에 오는 날 예쁜 상자에 손주의 초음파 사진과 임신 테스크기에 날짜를 쓰고 리본을 달아서 나에게 선물을 주었다.
" 할아버지, 할머니. 반가워요. 저는 포포예요. 건강하게 자라서 따뜻한 4월에 만나요!"
딸이 선물해 준 보물상자에서 '포포'라는 태명이 생기고 초음파 사진과 임신테스트기의 선명한 두줄을 보는 순간 나 또한 선명하게 '할. 머. 니'가 되어 있었다.
누군가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순간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가 된다. 딸이 태명으로 뭐가 좋을까 물어보았을 때까지만 해도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딸과 사위가 그들만의 소망을 담아 태명을 '포포'라고 지어주는 순간 손자는 더 특별하고 생생한 존재로 다가왔다. 카드에 적힌 '할머니'라는 단어를 본 순간, '포포'와 함께 나도 '할머니'로 태어났다는 묘한 감정이 몽글거리며 피어났다.
그림책 <이름 짓기 좋아하는 할머니>에는 친구들이 자기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 홀로 남은 할머니가 나온다.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할머니는 자기 집, 오래된 자가용, 낡은 벤치, 삐걱거리는 침대에게 이름을 지어준다. 어느 날 갈색 강아지 한 마리가 할머니 집에 찾아온다. 강아지가 자신보다 오래 살지 못할 거란 두려움 때문에 할머니는 이름을 지어주지 않고 먹을 것만 주어 돌려보낸다. 그날 이후 강아지는 매일 할머니에 집에 찾아오고 할머니는 그때마다 먹을 것을 주어 돌려보낸다. 몇 개월이 지나 강아지는 어엿한 개가 되었지만 여전히 할머니는 이름을 지어주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개가 오지 않자 할머니는 개를 찾으러 나선다. 떠돌이 개를 모아 놓은 사육장에서 사육사가 개의 이름을 물어온다. 그때 할머니는 자신과 함께 했던 소중한 친구들의 이름과 얼굴들을 떠올리게 된다. 그들과의 만남과 시간이 행운이었음을 깨닫게 된 할머니는 개의 이름을 '러키'라 지어 부른다. 사육장 한 구석에서 러키가 할머니의 소리를 듣고 달려 나온다.
내가 누군가의 이름을 짓는 순간, 서로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된다. 할머니의 개 러키, 러키의 주인 할머니. 이름을 지어주는 이나 이름지음을 받는 존재나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게 된다. 이름 짓기 좋아하는 할머니의 경우는 관계가 먼저 형성된 후에 이름이 지어진 경우지만 나 같은 경우에는 손자의 태명을 부르며 기다림이 시작되고 있다.
부를 이름이 생기니 상상력도 커져만 간다. 어떤 아이가 태어날까, 나는 어떤 할머니가 되면 좋을까, 아이가 태어나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내가 할머니가 되어 살아가는 삶은 또 어떤 모습일까.
이름 짓기 좋아하는 할머니가 갈색 개에게 매일 먹이를 주었듯이 나 또한 포포가 태어날 때까지 계속 할머니로서의 나의 모습과 역할을 상상하게 된다. 아무도 나에게 무언가를 시키지 않았는데 저절로 무언가를 하고 싶어졌다.
그리고 포포에게 전할 말을 일기에 적었다.
"포포야! 할머니는 너와 동화책을 볼 날을 기다리며 동화책을 모으고 있다.
건강하게 용기를 내어 세상에 나오길 기도하며 기대하고 있을게."
내가 '포포야~'하고 불렀을 때 알 수 없는 신비의 세계가 새롭게 다가오리라 상상하면서 오늘도 나는 동화책을 사모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