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래너리 오코너 작가의 단편
플래너리 오코너는 남부출신으로 고딕문학의 대표자로
독창적인 자신의 문학 세계를 이룩한 작가라고 한다.
고딕문학도, 플래너리 오코너라는 작가도 몰랐다.
그러나, 그녀의 단편을 하나 읽고 나니,
나는 그녀에 대한 평가가 무엇이든,
그녀의 성취에는 모자랄 듯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뭐지.. 이 독특함은..
인간 군상의 이중성과 허위에 대한 냉철한 통찰,
종교와 구원에 대한 사람들의 세속적인 믿음과 욕망에 등골 서리는 냉소를 흘리는
이 작가의 비범함은 단지 뛰어나다는 말로는 부족하고, 그저 후덜덜 할 뿐이다.
20세기초 조지아 배경으로 평범해 보이는 베일리 가정이 나온다.
베일리 부부와 아기 포함한 세 남매, 그리고, 할머니가 등장인물이다.
할머니는 휴가로 플로리다에 가는 걸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
감옥에서 탈옥한 부적응자가 돌아다니는 상황에 굳이 그곳에 가야 하냐며,
자신이 자란 테네시로 가자고 계속 주장하지만, 가족들에게 무시당한다.
하지만, 할머니는 자신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더라도,
홀로 남아 조지아 집에서 휴가를 보내지 않을 거라는 아이들의 추측대로 같이 길을 나선다.
아들인 베일리가 싫어하지만, 집에 남겨두기 싫어서, 고양이도 몰래 챙기고,
사고라도 나서 죽고 난 뒤에 발견되면 누구나 숙녀라고 생각할 그런 의상을 입은 채로,
베일리가 모는 차에 올라탄다.
그렇게 출발한 여행에서 그들은 할머니의 우연한 착오와 실수 끝에 차사고를 내고,
부적응자를 만나 죽음을 맞게 된다.
21페이지에 불과한 단편인데,
장면과 장면의 전환도 시간의 흐름대로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메인 캐릭터인 할머니의 성격과 사고 치는 스케일도 군더더기 없어서,
독자가 그런 캐릭터라면 이럴만하겠다는 예측을 할 수 있게 빌드업되어 있다.
이 작품 속에 등장한 어느 인물 하나도, 심지어 동물까지도,
자신에게 주어진 천성대로 행동할 뿐, 전혀 착하지 않고,
선해야 된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는다.
우리가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는 건
기존의 사람들이 정돈해 놓은 룰 속에 있다는 것이다.
단어마다 정리가 된 명료한 의미가 있고,
호칭이나 역할에 주어진 이미지가 있다는 거.
그리고, 또한, 그것들에게 의해서 가스라이팅을 오지게 당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할머니는 자애로우며, 현명하고
아이들은 귀여우며, 순진하고,
기독교인들은 안 믿는 사람들보다 도덕적이며,
안 믿는 사람들보다 구원을 더 많이 생각하고 살지 않을까.. 하는 것들 말이다.
그 고정관념을 엎어 버리는 작가의 장치들에 섬뜩하면서도
결국 설득되게 만드는 플래너리 오코너의 힘을 느꼈다.
여행 중에 당한 어처구니없는 사고도 사고지만,
사고로 차에서 튕겨 나가진 가족들이 하나둘씩 모여들 때,
아이들은 사고가 났다고 신나 하면서,
하지만 아무도 안 죽었다며 실망하면서 말하는 대목에서,
어쩌면 이 장면보다 아이들의 천성을 제대로 묘사한 것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렇지 않나.
입 밖으로 내면 불필요한 오해와 구구절절한 구설을 만들기에 피곤하여 참고 있을 뿐,
고정된 관념 속에 좋은 사람과 순수한 감정과 아름다운 시절은
실상 얼마나 어설프게 보정된 이미지이며,
순간에 바스락 없어지기 쉬운 것들인가.
결국 맞닥뜨린 감옥을 탈옥한 부적응자가
숙녀로 올바르게만(?) 살아온 할머니와 주고받는 대화는
구원에 대한 신학개론이며,
그중에서 부적응자가 던지는 본질에 관한 대사들은 레전드 급이었다.
다만, 번역이 아쉽다.
이 짧은 단편에 번역이 왜 이리 매끄럽지 못한 것인지.
문학수첩 출판사보다는 현대문학 출판사가 번역이 더 나으며,
그냥 영어로 읽어도 좋다.
그다지 어렵지 않을 수도 있다.
#좋은사람이 있기나 할까
#플래너리 오코너
#대단한 작가 맞음
#오직 두권의 책을 남김
#단명하심
#기승전_건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