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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꿀벌 김화숙 Feb 10. 2024

질문 여자 눈물 남자

사내 마음 알고 싶은 범띠가시내는 그를 사랑하기로 마음먹어 버렸다


가시내야 가시내야 범띠 가시내야

사내 마음 울려놓고 싶은 범띠 가시내

울고가는 사내들도 한심하다만

돌아서면 그리워라 범띠 가시내    

 

1970년에 나온 ‘범띠 가시내’는 1962년생 범띠 가시내의 인생노래였다. 초등학생이 뜻이나 알고 불렀나 싶지만, 내겐 호랑이 본능이 있었다. 왈가닥이라도 괜찮다는 응원가였고 듣기 싫던, ‘아들이었어야는데'라는 저주를 풀어주는 마법이었다. 얼마나 불렀댔던지 지금도 가사를 다 기억하고 있을 정도다.     


특히 재미난 대목은 “사내 마음 울려놓고 싶은”과 “울고 가는 사내들도 한심하다만”이었다. 심신이 조숙한 내게 남자애들은 다 한심해 였다. 나한테 까불다 혼쭐이 난 녀석들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2절 마지막은 반전의 맛이었다. 울고 가는 사내들이 한심하다면서도 “사내 마음 알고 싶은 범띠 가시내”가 바로 나였기  때문이다.   


        

그 남자 그 여자의 첫날밤     


신혼여행 첫날밤 우리는 일찍 침대에 들었다. 처음으로 한 방에 나란히 우리 몸이 있었다. 가벼운 입맞춤을 하며 덕이 나를 안았다. 비행기에서 시작하다 만 대화를 어떻게 마무리할 것인가, 생각하면서 나는 덕이 많이 긴장하고 있다는 걸 간파했다. 잠옷 입은 내 팔과 어깨를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그가 말했다.

“마음 준비가 안 되면 오늘은 손만 잡고 당신 곁에서 잘게요.”

몸도 마음도 지친 우리는 그렇게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나란히 잠에 빠져들었다.

      

둘째 날엔 종일 대절 택시로 여기저기를 구경했다. 낙산사에서 내려다 본 바위와 동해는 9월의 햇빛 아래 미치도록 아름다웠다. 겉옷을 벗어들고 나란히 거니는 두 사람은 행복한 신혼부부의 모습이었으리라. 삶은 얼마나 모순 덩어리며 판타지보다 더 판타지인지. 나는 어떻게 여기까지 와서 이러고 있는가. 질문이 나를 따라다녔다. 이 남자는 무슨 생각으로 나와 결혼했는지, 왜 나여야 하는지…   


88말쯤 군대에서 휴가나온 덕을 C가 따로 불러 확인했단다. 혹 나하고 약속했거나 책임질 일 한 거 있냐고. 그런 거 없다고 하니, 둘이 잘 맞는 짝이니 결혼하겠냐 물었고 덕이 좋다고 했단다.

“하나님이 내 맘을 아시는구나. 기도를 들어주셨구나, 너무나 감사했어요. 나만 좋아하며 기도해 왔아직 숙 마음을 모른다고 정직하게 말했어요. 당신 맘이 궁금해서, 잠이 안 오는 날이 많았는데…”     


덕이 나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내가 겪어야 했던 '마녀사냥'의 기억이 살아났다. 3년 전의 일이었다.  

“덕은 고지식한 사람이라 한 번 맘에 두면 잘 안 변하거든. 너처럼 자유분방한 여자들이 생각 없이 행동하면 남자는 실족하기 딱인 거 몰라? 자매는 형제 마음을 도둑질하지 않도록 근신하고 영적 싸움을 해야 해." 따로 또는 공개적으로 나를 그렇게나 모욕하고 판단하던 C가 덕에겐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는 거다.      


“우리 둘 일인데 왜 나는 빼고 그랬대요? 당신은 왜 내 마음을 안 물었죠? 편지로라도 확인할 수 있었잖아.”

C가 나한테 하고 숙에게 하나 보다 했죠. 다음 방향을 기다리다가 그만… ”     


이런 바보같은 대화가 어디 있냐 묻지 마라. 신혼여행 와서 뭐 하고 있냐고, 그게 난데 어쩌란 말이냐. 남자 유혹한단 소리 들을까봐, 침묵하다 그리되었다. 신혼여행 둘째 밤도 우리는 그렇게 나란히 잠들었다.



사내 마음 알고 싶은 범띠 가시내     


셋째 날 오후 영덕행 버스에 올랐다. 친정에서 한 밤 자고 밀양 시집에서 두 밤 자고 토요일 서울로 가는 계획이었다. 우리의 대화를 마무리해야 했다.

     

“나는 당신에게 뭔가요?”

어려운 시험문제를 받아든 아이처럼 덕은 다시 굳은 얼굴이 됐다. 대답을 기다리지 못하고 내가 말했다.

“우리 결혼 여기서 없었던 걸로 해요.”

우물쭈물하더니 덕이 더듬더듬 말했다. 조금만 더 알아듣기 쉬운 말로 해 달라고. 이건 말이 안 된다, 어떻게 하라고 분명히 말해 주면 그렇게 고치겠다고…

“내 말을 못 알아듣는데 어떻게 더 설명해요? 꼭 나여야 할 이유는 없어요. 지금이 때라고 봐요.”  


말할수록 내 가슴은 더 답답한데 그는 또 말이 없었다. 나는 차창밖 먼 산만 하염없이 바라보며 기다렸다. 갑자기 옆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덕이 눈물을 훔치며 울고 있었다. 시간은 가고 나는 초조해졌다.       

“지금 우는 건 대답이 못 돼요. 무슨 생각으로 우는지 말로 해 달라고요.”

남자는 울고 있는데 여자 마음은 더 각성하고 냉정해지고 있었다.  


“시골 엄마가 생각나네요. 내가 4학년 때 마산으로 전학 갔잖아요. 어쩌다 집에 오면 종일 나가서 공차고 놀다 다시 마산으로 갔나 봐요. 엄마가 어느 날 그랬어요. 내 아들 아닌 거 같다고요. 엄마는 아들하고 같이 이야기도 하고 싶었던 거 같아요. 그런데 나는 엄마한텐 관심도 없고 친구들하고 놀기만 했으니.”     

“지금 내 마음이 어머니 마음이라 이해한다는 뜻인가요?”

날이 선 내 말에 그가 고개를 강하게 가로저었다.

“그게 아니라 당신 맘을 조금 알 거 같아서요.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무신경한 게 보이네요. 나는 결혼할 수 있어서 너무 행복했는데 어째서 당신한테 내 마음을 표현하지 못했을까요. 사랑하는 사람을 답답한 기분에 버려두고도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그게 정말 미안해요…”     


덕은 계속 울었다. 이러려고 한 건 아닌데 이게 뭔가. 그가 내 말을 들으려 하고 자기 마음도 보는 거 같았다. 냉정하던 내 맘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졸지에 나쁜 남자가 되어 울다가 방언이 터졌나, 그가 조금 힘있게 말을 이어갔다.  


“당신 맘 알게 해줘서 고마워요. 난 당신이라서 너무 감사했어요. 전적인 은혜였요. 당신도 그렇게 안다고 생각했어요. 쑥맥인데 가진 것도 없고 앞날은 불투명하지만, 당신만 있으면 됐어요. 국내 담임이건 선교사건 다 갈 수 있다 그랬잖아요…” 그리곤 내 손을 잡고 애원하듯 말했다.

“내가 답답하고 한심하죠? 당신 맘 몰라서, 힘들게 해서 미안해요. 내가 사랑할 수 있게 나 좀 도와주세요. 사랑해요. 당신이 필요해요. 당신이 도와주면 다 할게요…”    

       

도와달라는 손을 차마 뿌리칠 수 없었다. 아, 사내 마음 울려놓고 싶은 범띠 가시내였다. 친정집은 가까워오는데, 아 어쩌란 말이냐 이 아픈 가슴을. 울고 가는 사내들도 한심하다만, 사내 마음 알고 싶은 범띠 가시내. 한심한 사내 마음을 받아들이자고 나는 마음을 바꾸고 있었다. 잡은 손에 힘을 주며, 그의 용기가 되고 도와주겠다고, 그를 사랑하자 마음먹어 버렸다. 그게 무슨 뜻인지 1도 모르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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