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꿀벌 김화숙 Dec 12. 2020

암환자가 되고 나서 가장 후회하는 것

내가 내 몸을 방치하고 무지하게 살았구나


아래 네 분은 내가 칠보산 자연생활교육원에서 사귄 벗들이다. 내가 글을 쓴다고 밝히고 기록하며 귀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지혜와 통찰을 나눠 준 벗들께 감사하며, 가능한 육성 그대로 정리한다.



1. 김수연(여, 가명, 60대) 직장암 2년


2018년 4월부터 병원을 다녔는데 진단이 안 나왔다. 7월에 서울에서 직장암 진단받고 11월에 수술받기까지 오래 기다리게 하더라. 대기하면서 부산에서 대학병원에 한방병원도 다녔는데 좋아지지 않았다. 서울에 묵으며 대기했다가 11월에야 수술했다. 퇴원해서는 암 통합병원 다니고 제주도에 수시로 채식하는 공동체 다니며 요양했다.


몸은 좋아지지 않았다. 통합병원 한 달 다녔다. 전이가 의심될 만큼 뼈까지 아팠다. 요즘은 등이 아프고 가슴 안쪽도 아프다. 온갖 검사 해도 원인을 알 수 없다. PET 검사로도 안 나타났다. 다음 달 예약된 상태다. 전이나 재발이 마음 쓰인다. 몸과 마음이 지치니 스트레스 주는 곳은 싫더라. 식사 챙기는 게 힘들어 여기 다시 올 거 같다.


일 계속하며 몸 관리 어려워 딸에게 넘겨주었다. 잘해주고 있다. 나는 남편이 없어 다행이다. 아줌마 암 환자들에겐 남편도 자식도 짐이다. 아무도 없는 아줌마가 제일 복 받은 사람으로 통한다. 요양원에서 암 환자가 남편 때문에 시달리는 거 봤다. 멀쩡한 남편이 수시로 먹을 게 없다, 뭐 해달라 전화했다. 환자가 남편 음식 해 주고 오다가 결국 폭발했다. 남편들 정말 잘못 배웠더라.


나도 그리 살았다. 남편이 먼저 떠났으니 짐이 없다. 암 환자가 되고 나서 가장 후회되는 건 내가 매사에 너무 잘하려 했다는 거다. 싫은 소리를 안 했다. 시집와서 시부모에 시누이 부부까지 같이 살았다. 내가 다 하려니 짐이 과했다. 아무도 내 사정을 몰라줬다. 말하지 않고 살았다. 돈 문제로 틀어지니 고마운 소리는 없고 시누이네는 얼굴도 안 보고 산다.


우리 형제들이 참 많은데 중간인 내가 친정어머니를 돌아가실 때까지 5년 모셨다. 어머니들 사위 있는 딸 집을 불편해하잖나. 사위 없는 우리 집에 계셨다. 나 혼자 하니 너무 지치고 내가 병이 난 줄도 몰랐다. 혼자 5년간이나 할 거 뭐 있었나 싶다. 형제들한테 협조 요청하면 "우리 죄인 만들지 말고 요양원 보내라." 답이 왔다. 말 들을걸. 요양원 싫어하던 어머니 눈빛 생각하면 힘들지만…….



2. 고미라(여, 가명, 60대) 오랜 식이장애


나는 겉모양은 멀쩡해도 병이 오래됐다. 지금은 병 자랑한다. 식이장애가 뭔지 아나? 폭식증. 먹는 걸 절제할 수 없다. 냉장고를 뒤져 끝까지 먹는다. 후회하며 토한다. 안 먹고 견뎌보려면 미친다. 우울증이 밀려온다. 내가 무가치하게 느껴진다. 정신과 다니는데 약 기운으로 또 우울해진다. 기운이 빠지면서 길 가다 차에 뛰어들고 싶어 진다. 무섭다. 세끼 적정량 먹으며 햇볕 쬐고 운동하는 게 최선이다.


나는 형편이 좋고 자식 둘 다 잘 돼 있다. 신랑도 요샌 나한테 잘하려 애쓴다. 여기 전세 얻어 주고 태워 주고 태우러 온다. 잘한다는 게 내 가려운 곳보다는 엉뚱한 데 긁는 경우가 많지만. 중매결혼했는데 살아보니 너무 안 맞는 거라. 우리 시대 여자들은 남자한테 내숭 떨어야 했다. 얌전하고 고분고분한 여자로. 나는 이 남자가 너무 무뚝뚝하고 어려웠다. 외동딸로 귀하게 컸는데 결혼해 보니 딴 세상이었다. 말 안 통하고 숨 막혔다. 못 알아듣는 남자 앞에 불만 없는 척해야 했다.


답답하고 외로우면 먹는 것으로 달랬다. 결혼 초부터 그랬다. 식성이 좋아 그런 줄 알았다. 계속 배고픈 느낌이었다. 살이 찌면 다이어트했다. 먹고 토하기를 반복하다 결국 병원에 갔다. 아무한테도 안 알렸다. 돈은 있으니까 문제없는 척했다. 점점 조울증이 심해지더라. 자식들한테 먼저 알리고 신랑도 알게 했다. 안 다녀본 데 없다. 생식 좋더라. 정신과 약으론 해결 안 된다. 내숭으론 안 된다. 이젠 하고 싶은 말 한다…….



3. 하경미(여, 가명, 50대) 난소암 1년


2019년 5월 난소 다 들어냈다. 항암 3회 후 더 못하겠더라. 멘토로 황재수 씨 웅촌 찾아갔다. 그는 암 발병 25년 넘었는데 극단적 채식으로 완치했다. 물과 음식이 치유에 90프로 이상 중요하다고 했다. 표준치료가 끝이 아니란 걸 알게 됐다. 생활을 바꿔야 된다고 했다. 나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적용했다. 항암 끝남과 동시에 채식하고 경주 자연 요양원에 두 달 있었다. 잘 맞았다. 고기 생각 안 났다. 몸 살린다 생각하고 잡념 이겼다. 다시 암에 안 걸리게 배우려 한다. 여긴 10월 다녀간 후 또 왔다.


6월에 속초 뉴스타트 센터로 갔다. 많은 위안받았다. 나는 종교가 없던 사람인데 힐링이 됐다. 전기 있어야 노트북 쓸 수 있듯 사람의 영적 에너지가 하나님이란 말 100% 공감했다. 내 몸의 치유 근간에 접속할 기회라 믿게 됐다. 우리 집안에 암 환자 없는데 나만 걸렸다. 강의 들은 후 마음의 안정 찾게 됐다. 음식은 내 노력의 한 부분이고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한다. 몸 좋아지고 있다.


처음에 아랫배가 아파 장염인 줄 알았다. 내과 의사가 촉진하더니 큰 병원 가라 했다. 2차 병원에서 다음날 CT 찍자 했다. 바로 대학 병원 응급실로 갔다. 종양 수치가 너무 높으니까 난소암 확실한 거 같다더라. 2일 동안 검사하고 서울 큰 병원으로 갔다. 항암 3회 하고 개복 수술했다. 수술 후 퇴원 날에서 3일 연장했다가 퇴원했다. 퇴원 때 항암 하고 서울 두 번 더 가서 항암 했다. CT 마지막 찍은 게 5월이었다. 의문이 드는 건 방사선 계속해야 하나? 이거다.


병원에는 3개월 한 번씩 오라는데 6개월간 안 가고 있다. 요양병원 가서 피검사만 한다. 난소암은 종양 수치가 중요하다. CT 자꾸 찍어도 되나 이상구 박사님께 여쭤봤더니 해롭다더라. 미슬토 면역치료제 실비보험 돼서 자가 치료하고 있다. 여기 수시로 오고 싶다. 몸무게 6킬로 빠졌는데 몸 느낌은 더 좋다. 계란까지만 먹는다. 코로나 끝나면 하나님 좀 더 가까이 만날 길 찾고 싶다. 지금까지 가 본 적 없는데 교회든 성당이든, 영적으로 치유되는 길을 찾고 싶다.


남편이 울어주고 돌봐 주니 다른 모습 알아가고 있다. 아들 하나 대학생인데 하나님께 맡기려 한다. 내게 집중하기로 했다. 직장 다니면서 집안일 혼자 다 했다. 슈퍼우먼인 줄 알고 일했다. 병원 갈 일 없었으니 다들 나를 차돌이라 그랬다. 나 자신에 대해 몰랐고 자신에게 집중하지 못했다. 처음엔 너무 놀랐고 땅속으로 꺼지는 느낌이었다. 자신감 제로였다. 아픈 거 자체가 너무 힘들고 부끄러웠다. 딱딱 거리고 잘난척하고 다녔는데 병들었다는 게 믿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60% 정도 회복된 거 같다…….



4. 박미희(여, 가명, 50대) 간암 3년(재발)


나는 가족력 있는 B형 간염 보균자였다. 엄마가 간암으로 돌아가셨다. 항체가 안 생겨 오랫동안 항바이러스제 먹고 있다. 2017년 7월 서울 큰 병원에서 간암 진단받고 간 절제 수술받았다. 퇴원 후 운동하고 스스로 관리한다고 했다. 9개월 만에 재발하더라. 다시 개복 수술하고 나니 재발이 너무 무서워졌다. 간 몇 프로나 잘라 냈는지 묻지도 못했다. 정신이 번쩍 나서 유튜브도 찾아보고 책도 읽으며 자연치유에 눈뜨게 됐다. 작년부터 여기 전세 얻어놓고 정기적으로 온다. 집에 있을 땐 도시락 싸서 산에 종일 있다 오기도 했다.


B형 간염 보균자는 항바이러스제 평생 먹는 것 말곤 방법이 없는 줄 알았다. 항바이러스제 안 먹고 B형 간염 항체 생기고 간암 수술 후 6년 지난 친구를 만나니 너무 반갑다. 아줌마 간암 멘토 달라 기도했는데 들어주신 거 같다. 자주 보면 좋겠다. 서로 경험 나누는 친구 하자. 내가 잘하고 있나 불안할 때가 많았다. 병원 하라는 대로 오가는 게 의미 있나 재발 후에 비로소 고민되더라. 다 했는데 뭐냐, 의문이 생기잖나.


가장 큰 바람은 더 재발하지 않는 거다. 순간순간 두려웠는데 건강한 친구 보니 용기가 난다. 집은 내가 없어도 문제 될 거 없다. 나만 잘 관리하면 된다. 내 인생에 지금만큼 좋은 때가 없었다. 나를 위해 시간을 쓰고 내 몸에 좋은 걸 하고 나를 돌본다. 그렇게 살아본 적이 없더라. 암 덕분이다 싶을 정도로 감사하다. 딱 한 가지 고민은 큰 아들이다. 서른다섯 살인데 얘가 B형 간염 보균자다. 모체 수직감염이었다. 둘째 땐 낳고 바로 예방 접종했는데 큰 애 때는 그런 시대였다.


아들 볼 땐 마음이 힘들다. 엄마가 보균자로 암 수술에 재발까지 했는데 자기랑 상관없는 것처럼 산다. 직장 다니니 맨날 고기 먹고 몸 관리를 안 하는 게 보인다. 내가 너무 무지하게 살았던 게 마음 아프다. 아들은 아직 항바이러스제는 안 먹는다. 간 수치 안 높은 보균자라 문제없는 줄 안다. 몸 관리하란 소리 귓등으로도 안 듣는다. 간 수치 높지 않은 게 좋은 뜻이 아니란 게 충격이다. 면역체계가 제대로 작동 못해서 그렇게 나온다는 게 설득된다. 우리 아들이 엄마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았으면. 어떻게 말이 통할 수 있을까…….



이전 08화 그렇다면 내가 책을 써야겠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