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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꿀벌 김화숙 Mar 16. 2024

강도 만난 사람, 사마리아 사람, 그리고 사회복지사

직장 다니는 미자립 교회 사모, 가장 그리고 싶지 않던 내 미래였다

          

하프타임은 과연 작전타임이었다. 나에 대해, 일에 대해, 그리고 신앙까지, 다시 생각하는 시간이었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10장 30~37절의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를 보자.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를 만난다. 죽도록 두들겨 맞고 발가벗겨져 버려진다. 어떤 제사장이 지나다 그를 피해 간다. 한 레위인도 지나가 버린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다가간다. 먼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후에 그를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 돌봐 준다. 이튿날 숙소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주며 말한다. “이 사람을 돌봐 주세요. 돈이 더 들면 돌아와서 갚을게요.”  

    

여기까지 이야기한 후 예수는 자기를 시험하고 있는 율법학자에게 도로 질문한다.

“당신이 생각할 때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인가요?” 그는 예수에게 답한다.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그러자 예수가 말한다. “가서 당신도 이와 같이 하세요.”     


이전에 나는 ‘사마리아 사람’을 영적 의미로 ‘하나님을 떠나 죄와 죽음 아래 고통받는 인간’이라 이해했다. 인간 실존은 영혼이 강도 맞은 상태라며 말이다. 종교인들은 위선 떨며 지나쳤지만 예수는 내게 구원자였다.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은 나도 사람들에게 좋은 이웃으로 다가가야 한다. 그런 식의 이해였다.     


비유가 어느 날 다르게 읽혔다. 강도 맞은 사람이 현실의 내 모습으로 보였다. 나는 진짜 탈탈 털린 알몸이요 영혼조차 빈손이었으니까. 몸과 맘이 상처투성인 것도 같았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믿고 따랐다고? 하나님이 강도였나? ‘거룩한’ 사람들이 강도? 그걸 다 알 수 없으니 더더욱 강도 맞은 꼴이로다.

      

사마리아 사람도 새롭게 보였다. 유대인에게 사마리아는 무시와 혐오와 차별의 대상 아니던가. 사마리아 사람이란 인종적, 종교적, 정치사회적으로 하찮고 낮은 존재를 대표했다. 요즘 말로 '소수자'가 강도 맞은 사람에좋은 이웃이라니! 내가 지금까지 엘리트주의와 권위주의 관점으로 성경을 읽은 게 부끄러웠다. 지지리 궁상 인생이, 주변인들이, 그리고 못난 나도, 사람 예수로 읽혔다. 사람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여성 목사 T와 여성 쉼터    

 

집 근처에 여성 목사가 담임하는 교회가 있었다. 여신협 회원 여성 목사라니 만나보고 싶어 직접 찾아갔다. 목사 T는 나보다 몇살 연상의 40대 후반 비혼 여성이었다. 100명 정도의 교회와 부설 기관으로 가정폭력피해 여성들을 위한 '쉼터'를 돌보고 있었다. 만나자마자 T와 나는 여성 연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바로 얼마전에 한 남성 목사가 총신대에서 ‘기저귀 찬 여자는 강단에 설 수 없다’며 헛소리한 게 생각나서였다. 신자의 다수는 여성이지만 목회자의 압도적 다수는 남성인 개신교 바닥에서 동년배의 여성 목사라니. 내 눈에 T는 참 멋있고 존경스러웠다. 어쩌면 부러웠는지도 모른다. 기왕 하나님의 일할 바엔 나도 목사 할걸. 어쩌다 남편을 ‘주님의 종’으로 돕는 사모가 돼 버렸는지.


“남자는 돕는 배필이 필요한데 여자는 돕는 배필 없이도 잘만 목회하는군요. 독신 남성 목회자 봤나요? 여신협 회원 중에만 해도 독신 여성 목사 많이 봤어요. 이건 뭘까요? 여성이 훨씬 유능하고 독립적이다? 여성의 창조 목적이 남자를 돕는 거란 말 좀 거시기하지 않아요? 하하하…”

“남녀는 서로에게 잘 맞는 짝으로 창조되었다고 보는 게 원뜻에 가깝죠. 여자만 남자를 돕는 배필이라 쓴 건 기록 당시의 가부장적인 관점이 묻어난 번역이라고 보는 해석이 많잖아죠.”   

"그쵸 그쵸!"

  

우리는 이런 주제까지 웃으며 수다 떨 수 있었다. 나는 어떻게 살아왔고, 지금은 자유인이며, 앞으로 몇 년 정도 하프타임이라고 다 털어놨다. 우리 가족은 그 다음 주부터 T의 교회 주일예배에 나갔다. 순전히 여성 목사와 감리교회를 경험하고 싶은 끌림이었다. 나는 자원해서 특송도 하고 사람들 속에 섞여 들어갔다.   

   

“김 선생님이 쉼터에 있는 여성들과 성경공부도 하고 상담 좀 해주시면 어떨까요?”    

 

어느 주일에 T가 제안했다. 쉼터에는 젊은이부터 중노년까지, 잠시 다녀가는 경우도 있었지만 아이들까지 데리고 몇 달을 머무는 여성들도 있었다. 부족한 돈과 인력으로 ‘사회사업’을 하는 T에게 나는 더없이 좋은 동역자인 셈이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내가 잘하는 것으로 이웃에게 도움이 될 기회였다.  


                    

강도 만난 사람, 사마리아 사람

          

원래 성폭력과 가정폭력 상담은 전문 교육을 받고 자격증이 있어야 하는 분야이다. 쉼터는 전문 인력을 쓸 형편이 아니었는데 도움을 원하는 여성들은 많으니, T는 나처럼 ‘훈련된’ 아줌마를 통해 피해 여성들을 지지하고 싶었을 것이다.


한 주 최소 두세 번 여성들과 성경공부와 상담을 했다. 그곳은 폭력이 만연한 세상에서 강도 맞은 사람들의 쉼터였다. 남편의 폭력을 피해 맨발로 도망쳐온 사람들, 이야기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울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꺼내보인 상처에 나는 고개가 숙여졌다. 살기 위해 도망쳐 나온 사람들께 내 마음이 이어졌다.

 

나는 그들과 나를 동일시하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엄마를 장작으로 때리는 걸 목격한 아이였고 매맞는 아이였다.  폭력을 폭력이라 명명할 언어가 없던 내 지난날을 돌아볼 수 있었다. 덮어두고 회피하던 상처를 마주할 새 언어를 배울 수 있었다. 영적 학대, 가스라이팅, 가부장제, 여성혐오, 성차별, 남성 권력…  

     

시간이 가면서 T는 내 상담과 수고에 감사하며 현금이 든 봉투를 주었다.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긴 세월 같은 일을 했지만 돈을 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명’의 이름으로 내 시간과 수고를 무급으로 맘대로 부린 시스템은 문제적임에 틀림없었다. 사모라고 평생 그림자 노동을 요구받는 것 역시 폭력일 수 있었다. 여성 쉼터에서 하는 일로 나는 소액이나마 사례비를 받고 감사인사를 듣고 있었다.  

   

그때 나와 함께한 쉼터 여성들께 감사하고 싶다. 강도 만난 처지에서 누군가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는 걸 그분들은 알까. 인생의 바닥에서 내가 만난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이 세상 구조가 어떻게 일그러지고 기울어 있는지, 그 속에서 내가 여성으로 산다는 게 무얼 의미하는지, 똑똑히 보게 했기 때문이다.




사회복지사 양성과정


"김선생님, 사회복지사가 되시면 어떨까요?"

2004년 봄에 T가 또 새로운 제안을 했다. 한 번도 생각한 적 없는 직업이었다.

"사회복지사요? 자격증 말인가요?"

"그렇죠. 지금 이미 최고의 사회복지사잖아요. 교육 받을 기회가 있어서 도와드리고 싶어요."

T는 진지했다.


당시 참여정부는 쉼터처럼 열악한 복지 시설을 조건부를 거쳐 신고시설로 만드는 '사회복지시설 양성화' 정책을 시행하고 있었다. 서울 공주 광주 등 전국 5개 대학에 개설한 '보건복지부 위탁 사회복지사 양성과정'도 그 일환이었다. 사회복지 종사자들은 24주 또는 12주 수업으로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받을 수 있었다. T가 시설장으로서 12주간 먼저 하고 다음 학기엔 나를 공부하게 해주고 싶다는 게 T의 뜻이었다.


"지금은 개척 교회가 자립하기 어려운 시대잖아요. 부군께서 신학대학원 마치고 본격적으로 개척하더라도 사모님이 일해서 돈 벌어야 할 가능성이 높죠. 사회복지사 자격증 받고 취업하는 게 맞다 싶어서요."


T는 애 셋 딸린 우리에게 개척교회는 결코 경제적인 보장이 안 될 거라 했다. 직장 다니는 미자립 교회 사모, 가장 그리고 싶지 않던 내 미래 모습이었다. 여성 쉼터에서 봉사하는 나는 '어쩌다' 사회복지사가 돼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남 섬긴다고 하던 일이 다 사회복지사 역할을 닮아 있었다. 솔직히 부끄러웠다. 자신의 형편을 직시하지 못하는 내가 보였기 때문이다. 


T가 서울로 학교 다니는 12주 동안 내가 시설의 지킴이가 됐다. 양성과정은 1주일 내내 아주 빡빡하게 출석하고 학점을 따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매일 출근해 사무도 보고 전화도 받고 사람들도 돌봤다. 2004년 여름 졸업하면서 T는 나를 가을학기 양성과정에 추천해 주었다. 나처럼 대졸인 경우, 1년 이상 사회복지 시설에서 재직 중인 자, 또는 조건부신고시설로 신고한 시설의 종사자로서, 시군구의 확인을 받아 지원할 수 있었다.    

 

나는 엄밀히 말해 그 과정에 지원하기엔 종사자로서 자격이 모자랐다. 내가 재직자로서 시군구의 확인을 받으려 해도 아무런 자료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4대보험에 가입된 '등록된 직원'으로 일한 게 아니었기 때문에 시청엔 나와 관련된 서류가 없었다. T는 시청 사회복지과에 나를 데려가 담당 공무원에게 큰 소리로 호통치며 나를 변호했다.  

   

"열악한 시설이라 조건부 신고시설 아닙니까. 직원을 제대로 월급줄 형편이 아니라 조금밖에 못 주며 고생시켰다잖아요. 확인할 수 없다고요? 사회복지사 양성과정 교육이라도 받을 수 있게 해 주고 싶다는데 못 알아듣겠어요? 당신들 우리가 고생할 때 뭐 해준 거 있다고 지금 와서 되네 안 되네 길을 막아요. 어서 확인서 떼 주세요!"


T의 지지로 나는 시군구 확인을 받고 사회복지사 양성과정에 입학할 수 있었다. 등록금 334,000원도 T가 대 주었다. 사회복지학 개론과 일반상식 필기시험과 면접을 통과한 후 12주간 학생이 되었다. '정치학을 이렇게 열심히 공부했더라면 세상이 변했을 텐데', 그럴만큼 나는 재미있게 공부했다. 나는 우수한 성적으로 사회복지사 2급 자격증을 받고 졸업했다. 계속 쉼터에 출근하는 나를 어느날 T가 말렸다. 


“쉼터는 제대로 월급을 못 드리니 김선생님을 떠나보내는 게 맞아요. 그동안 저를 도와주신 것만도 엄청난 거 아시죠? 뭐라 감사할지 모르겠어요. 여기 걱정은 마시고 어서 구직하고 일하세요. 어디서든 잘하실 거예요. 다섯 식구 생활하고 목회도 계속 해야죠.” 

T는 내게 끝까지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2004년 연말 나는 사회복지사로 취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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