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꿀벌 김화숙 Mar 21. 2024

예수, 종교를 비판하다, 결혼을 흔들다

익숙한 종교의 옷을 벗고 예수로 옷 입도록 도운 내 ‘인생 책’이었다.

# 브런치북 시스템 상 30 꼭지가 상한선인가? 추가 목차 형성이 안 되네요. 연재 브런치북 업데이트로 계속 발행되는지는 다음 꼭지 써보고 판단하겠습니다. 안 되면 4장 나머지 꼭지와 5장은 종이책으로만.



       

“종교에 넌더리가 난다고? 예수도 그랬다!”

책 뒤표지 카피가 튀어나올 듯 내 눈을 사로잡았다. 그 밑에 이어지는 질문도 그랬다.

“나사렛 예수는 반종교적인 선동가인가?”

“그가 전하고자 한 말은 우리가 믿고 있는 것보다 급진적인 내용인가?”

“기독교는 핵심을 놓치고 있는가?”     


브룩시 카베이의 《예수, 종교를 비판하다》는 덕이 골라서 함께 읽은 우리의 인생 책이다. 저자는 자신이 던진 질문에 모두 “그렇다”라고 답했다. 종교와 영성에 관련된 예수의 역할에 집중한 책이었다. “제도적 종교를 뒤엎는 예수의 영성과의 마주침”이란 부제는 나를 부르는 예수의 초대장이었다.    


       

종교냐 예수 영성이냐      


길어야 5년이면 새로운 후반전일 거라 기대한 건 큰 오산이었다. 새천년 10년이 지나도 내 삶은 점점 더 ‘흔들리는 갈대’ 일뿐, 새로운 ‘성과’ 같은 건 없었다. 세 아이 엄마, 미자립 가정교회 사모, 사회복지사. 주말도 없이 바빴지만 나는 계속 읽고 쓰는 예술가였다. ‘물가에 심은 저 나무들같이 흔들리잖네’ 대신 질문과 회의와 흔들림이 있었다. 판이 흔들리는 세월이었다.    

 

기성 종교 비판이야 선교단체에서부터 귀가 닳도록 들은 소리였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신앙”이라며 종교생활하지 말고 믿음으로 살라는 단체였으니까. 그러나 과연 그곳에서 배운 게 ‘더 순수한 신앙’이었을까? 나는 종교가 아닌 예수의 영성을 배우고 따랐을까? 내 삶은 제대로 된 기초 위에 서 있었을까?

   

시공간의 거리가 확보될수록 당연하던 게 낯설 보였다. 종교라면 성경에 나오는 유대교 바리새인들인 줄 알았다. 종교 전통과 율법에 갇혀 예수를 죽인 그들과 오늘의 기독교가 다르다 믿고 싶었을 것이다. 단체의 규칙과 조직 논리에 충성하고 권력과 사람을 믿고 의지했음에도 내가 그들과 닮은 걸 몰랐으니까. 책 덕분에 나는 제도로서의 기독교보다는 예수 영성에 눈을 뜨게 되었다.


“제도적인 종교를 통하지 않고 하나님을 알 수 있다. 그 열쇠는 예수다.”

“예수의 주된 사명은 종교를 부수어 버리고, 대신 그 자리에 인간의 모습을 하고 인간의 상황 속으로 온 거룩한 존재인 자기 자신을 놓는 것이다.”

“성경은 종교제도에 중독된 노예 상태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해 줄 단서를 간직하고 있다. 동시에 성스러운 존재와 직접 결합할 것을 권하고 있다.”         


 

파란색 장미의 화요일  

   

흔들린 건 종교만이 아니었다. 서너 가정이 우리 집에 모여 가정교회 '대안 공동체'로 교제하던 때였다. 덕이 하는 설교 말곤 형식이랄 것도 없고 규칙도 없었다. 그럼에도 나를 들러싼 모든 게 답답해 보이곤 했다. 쥐꼬리 월급 받으며 종종대자신이 노예처럼 보였다. 덕과 말이 안 통한다는 느낌이 가장 큰 괴로움이었다.
  

《예수, 종교를 비판하다》 3장에 딱 우리 이야기가 있었다. 종교와 예수 영성을 비교하는 ‘파란색 장미의 화요일’이란 비유였다. 등장인물 이름만 숙과 덕으로 바꿔 비유를 정리해 보자.  

   

숙과 덕은 결혼한 지 몇 년 된 부부다. 안정된 생활이지만 열정과 로맨스가 빠진 생활이었다. 반복된 일상과 틀에 박힌 애정 고백에 숙이 만족하지 못한다는 걸 덕은 알고 있었다. 변화의 시도가 필요했다. 어느 화요일 저녁 6시 이들의 집에 보모 앤이 왔다. “덕이 오라고 했어요.” 처음 있는 서프라이즈였다. 덕은 앤에게 아이들을 보게 하고 숙이 외출준비를 하게 했다. 몇 분 후 숙덕은 멋지게 차려입고 차를 타고 이탈리아식 식당에 갔다. 촛불이 켜진 예약석에 두 사람은 포도주를 마시며 낭만적인 대화 속에 저녁 식사를 했다. 덕이 준비한 카드와 파란색 장미를 내밀었을 때 숙은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두 사람은 가장 멋진 한 주를 보냈다.

     

다음 주 화요일 저녁 정확히 같은 시간에 또 앤이 왔다. 숙덕은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식당에서 같은 저녁을 먹었다. 같은 카드와 파란색 장미가 이상했지만, 두 주 연속이라니! 숙은 덕의 노력에 감동했다. 한 주 후 파란색 장미의 화요일이 다시 반복됐다. 숙이 새로운 이야기를 하려 할 때마다 덕은 지난주와 같은 주제, 같은 질문과 농담으로 돌아갔다. 숙은 결국 다른 이유로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다시 파란색 장미의 화요일이 왔다면?

    

파란색 장미의 화요일, 얼마나 로맨틱한가. 그러나 섬뜩한 비유 속에 종교와 영성의 차이가 보였다. 비유 속의 덕이 관계를 위해 노력하긴 했다. 형식에 불과한 것을 본질로 잘못 이해했고 관계를 종교로 바꾼 게 문제였다. 누구와도 할 수 있는 데이트가 됐고, 마음을 몰라도 사랑이 없어도 움직이는 자동장치가 돼 버렸다.    

     

숙덕부부의 현주소로 보였다. 그를 사랑하며 받들고 산 20년 부부생활이 ‘종교’로 설명되다니. 좋은 아내 좋은 남편이란 환상이 파란색 장미의 화요일일 수 있었다. 나는 사납게 화내지 않고 부드럽게 질문하고 대화하는 아내로 살았다. 나와 말이 안 통해도 덕은 늘 ‘좋은 남편’ 소리를 들었다. 설교 준비하는 그를 위해 나는 스스로를 검열했고 주일이 오기 전에 회개했다. 못다 한 말이 가슴에 와글거리면 출근해서 친절한 메일을 보냈다. 본질을 종교로 바꿔 사는 줄 모르고 불평불만하는 자신만 탓하면서.


반면 덕은 나만큼 흔들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후 숙덕의 결혼생활은 격변의 시기를 맞이한다. 그 이야기는 2022년에 낸 《내 몸은 내가 접수한다》에 리얼하게 썼다. 혁명전야까지는 예쁘고 부드러운 말로 최선의 종교생활이 계속되었다.)    


            



숙덕숙덕 이메일 부부싸움 (2011. 1. 27.)   

   

1) 숙이 덕에게


당신은 아실까요?    

지금 아내가 며칠째 사랑받지 못하는 기분에 빠져 있다는 것을. 제법 오래 저기압인데도 역시 당신은 변함없이 침묵하는 바위죠. 내버려 두면 기분 풀리겠지. 삐지는 사람 상대할 필요 없다는 태도로 일관하죠. 정보를 주고받는 이야기는 하지만 우리 관계에 대한 깊은 대화는 한마디 시도도 없이 어제도 결국 잠들더군요. 그만큼 당신께 나는 별 볼 일 없는 존재더군요.    

 

나라는 존재가 처음부터 참 기능적인 역할로 묶였다는 회의가 또 들었어요. 죽을병이 들지 않는 한 변함없이 출근하고 퇴근하고 밥하고, 애들 가르치고, 모든 일을 무조건 감사하고 불평 없이 잘하는 역할. 하하 호호 애들하고 웃고. 주말에도 집안일, 주일에도 밥. 어쩔 거냐고.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데 불평한다고 뭐가 나오겠어요. 얄짤없죠. 습관적으로 변덕 부리는 여자니까요. 깊이 상대할 필요가 없다는 그 태도, 20년간 변함없어서 정말 실망스러워요. 애들이 삐져도 왜 그러냐 묻고 들어보는 게 인지상정인데, 한 번쯤 물어볼 수도 있지 않나요?    

  

내가 또 뭘 놓쳤냐, 무엇에 마음이 상했냐, 당신한테서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더군요. 직장 일이 요즘 스트레스가 많냐, 아니면 호르몬 탓인지, 그냥 기분이 나쁜 건지, 고민이 있는 거냐, 정 어려우면 갱년기 증상이냐, 어디 아프냐, 그래도 되잖아요. 그 정도는 사랑표현으로 질문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우리는 도대체 무슨 관계일까요?     


잠자리도 그래요. 말초를 건드리면 반사적으로 반응하는 기계도 아닌데, 나라는 인간에 대한 관심과 열정은 전혀 보이지 않는데, 나는 당신이 낯설기만 한데, 아무 말도 로맨틱한 분위기도 없는데, 기분이 안 동하는 딱딱한 마음인데. 그냥 슬그머니 건드리면 확 기분 풀고 달아올라 주길 바라는 듯이, 그러다간 눈치 보며 조용히 물러나는 태도. 사랑을 위해 분위기를 바꾸고 열의를 쏟을 가치가 없는 거겠죠. 차라리 잘 됐다 생각하는지도 모르죠.     


지난 주일 예배 후 U의 투정을 들으며 당신 아내 살짝 외로움을 느꼈다는 거 알까요? 젊은 부부가 문득 아름답고 살아있어 보여 부러울라 그랬어요. 남 부러워하지 않으려 노력하건만 내가 ‘양’을 부러워하다니. 포기를 배우지 않은 U가 젊고 아리따워 보였고요. 당신에게 나는 어떤 존재인지 묻고 싶더군요. U의 짜증에 일방적으로 당하는 기분에 몰려도 V는 어려운 상황을 말로 잘 수습하더군요. 아내와 끝까지 씨름하는 V가 참 멋있는 남자로 보였어요. 나는 그런 원색적인 싸움 오래 포기하고 살고 있다는 거, 당신은 아시나요?


그 부부처럼 대화하고 싸워보고 싶고 말고요. 둘만의 시간을 내라, 분위기 내고 대화하자, 나한테 비싼 거 사달라, 좋은 거 먹자. 그러나 이런 요구가 제 입밖으로 도무지 안 나와요. 하면 당신만 더 힘들게 하고 나는 얻는  없이 허탈하게, 망할 게 무섭거든요. 내가 입 다물고 있으면 당신은 만사 오케이라고 해석하는 거 같아요. 말 안 할수록 실은 내 속엔 뭔가 계속 쌓여가고 있다는 거, 이 답답하고 갇힌 기분. 당신은 상상이나 할까요?  

   

당신은 그러시겠지요. 마찬가지 기분이었다고. 신혼 때 폴란드에서 그렇게 확인했더랬죠. 아내가 삐지면 남편도 버림받은 기분이라, 무가치하고 사랑받지 못하는 기분이라고. 무능하고 한심한 남편이 되는 기분, 무시당하는 기분, 그걸 어쩔 줄 몰라서 그랬다고, 또 그러겠지요. 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그게 문제더군요. 그러니 남편을 그런 기분 느끼도록 두는 못된 아내가 먼저 회개하고 마음을 풀어야 맞겠지요. 주일이 오기 전에. 늘 그랬으니까요.     


그런 식으로 계속 살아보자고요.

무엇이 기다리는지 가보자고요.     

     


2) 덕이 숙에게


내 여자에게     

당신이 기대하는 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알아요. 당신이 사랑받지 못하는 기분에 빠져 있다는 것을 말이죠. '내버려 두면 풀리겠지, 삐지는 사람 상대할 필요가 없다' 그건 아니고. 별 볼 일 없는 존재라는 느낌, 나에게 귀한 당신이지만 당신이 느끼는 그 느낌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분명 신호를 보내고 브레이크를 걸었는데 잠들어버리는 날 보고 당신은 얼마나 허망하고 황당할까. 당신의 기분만 생각하면 이리저리 해볼 텐데…

 

난 왜 이리 옹졸하고 비겁할까. 좋은 감정이든 불편한 감정이든 감정을 나누는 게 참 어렵구나 절감합니다. 무조건적 사랑이 부족한 거라고 해버리면 간단한 것이기는 하지만. 아내로 엄마로 직장인으로 사모로 누가 보기에도 근사한 당신입니다. 남편이 자랑할 수 있고, 아이들이 자랑할 수 있고, 직장상사가 자랑할 수 있고, 교회 성도들이 자랑할 수 있는 사모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당신은 여자이고, 여자로서의 당신을 알아줄 사람은 세상천지에 내가 유일한데, 나뿐인데.... 내 여자의 마음을 그토록 황폐하도록 방치한 건 전적으로 나의 잘못입니다. 직장일이든, 호르몬이든, 그냥 기분이든, 그 무엇이든 마음대로 털어놓기 부담스러운 남자… 그렇다고 먼저 물어봐 주지도 않는 남자… 잠자리도 그런 차원의 연장이고…     


다른 남편, 다른 아내 이야기 하는 건 무섭고 위험한 건데, 그럼에도 하는 건 그만큼 당신은 여자이고 여자로서 행복하고 싶다는 마음인 줄 압니다. 물론 당신이 여자이고 싶은 만큼 나도 남자이고 싶지요. 당신과 나, 한 여자와 한 남자로서 하늘 가는 그날까지 잘살아 봅시다. 지금 드러난 게 변명할 수 없는 나의 모습이지만, 좀 더 열심히 한 여자의 남자로 살아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여보, 사랑해요.

이전 29화 아티스트 웨이, 나는 예술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