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엄마에게 《숙덕숙덕 사모의 그림자 탈출기》를 보냈다
엄마가 저렇게 입이 찢어져라 웃어젖히며 남은 생을 즐긴다면
사진 속 두 여성 노인이 입안이 다 보이도록 파안대소하고 있다. 이가 빠진 잇몸도 보인다. 봉두난발 은발이 히피같다. 손에 생맥주 잔을 들고 흔들의자에 앉았으니 저러다 맥주를 쏟을 것만 같다. 얼마나 생생하고 유쾌한 표정인가. 허나 장승이나 탈바가지 작품이라면 몰라도 현실에선 만나기 힘든 노인 얼굴이렸다.
가만히 보니 역시 어디엔가 전시돼 있는 인형이겠다. 인형이면 어떠냐, 볼수록 기분좋아지니 걸작이다. 이게 어떤 경로로 내 손에 들어왔더라? 가물가물하다. 하도 맘에 들어 보고 또 보다가 내 전화기 갤러리에 저장했던 기억만 난다. 내 글에 섬네일로 쓰려는 빅픽쳐였을까. 저작권 문제 되는 건 아니겠지?
친정엄마 사진을 고르다가 이걸 쓰게 됐다. 왜 엄마 사진을 안 쓰냐고? 오늘따라 맘에 드는 사진을 찾을 수가 없어서다. 엄마한테 갈 때마다 사진을 찍건만 엄마 표정은 늘 아프다. 활짝 웃는 엄마를 보는 게 어릴 적부터 내 소원이었다. 도무지 웃는 엄마 사진이 없다. 나는 엄마를 웃게 하고 싶어 무던히도 착한 딸이 되려 했더랬다. 아직도 포기한 건 아니지만, 그래, 안 웃고 살 수도 있지, 지금은 좀 내려놨다.
책 읽으며 엄만 또 울겠지
엄마에게 어제 부친 《숙덕숙덕 사모의 그림자 탈출기》가 잘 도착했단다. 책 나온 지 벌써 두 달인데 이제야 보냈다. 엄마가 계속 아파서 책 읽을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는데 책 보내면 힘들게 읽으려 할 테고 눈도 불편하고 몸도 더 불편해질 거 아닌가. 엄마를 울게 하고 싶지 않아서기도 했다.
"니는 어째 이래 글로 엄마를 울리노. 참 잘 썼대이."
2년 전 《내 몸은 내가 접수한다》때 엄마가 눈물로 한 말이었다. 받고 3분의 1 정도 읽는데 사흘이 걸렸다고 했다. 그리고 그 책을 완독 하기까지 엄마는 며칠 건너 두 번을 더 전화했다. 눈이 붓도록 울었다며. 딸자식이 살아온 걸 엄마라고 다 알리가 있나. 엄마는 거듭 말했다. 나를 좀 더 알게 됐다고.
몸 불편한 엄마를 책으로 또 울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번 책은 지난번 보다 더 놀랄 내용이 많기 때문이다. 당신의 딸이 그토록 성차별과 가스라이팅으로 고통받았다니, 믿음으로 피를 토하듯 쓴 걸 알면 엄마 맘이 얼마나 아프겠는가. 그런데 결국 안 부칠 수가 없게 됐다. 지난번 책 읽은 두 사람이 책 나왔으면 빨리 보내달란다, 엄마 전화가 왔다. 바로 3권 보냈다. 정말이라면 한 권은 엄마가 결국 읽게 될 것이겠다.
안 그래도 많이 웃지 않는 엄마가 내 책 때문에 더 울게 될까 마음이 아프다. 아니다, 알고 보면 유쾌하고 좋은 내용도 많다. 이 딸이 알고 보니 이래 멋있는 사람이구나, 또 확인하고 많이 웃게 될지도 모른다. 지난번에도 엄마는 거듭 말했으니까. "네가 옳다. 네가 맞다."라고. 이번에도 내 책을 읽을 수 있을 만큼만 엄마 기력이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와 함께 입이 찢어져라 웃게 되길 바란다.
파안대소하는 엄마를 그리며
아흔이 낼 모레인 노모가 가끔이나마 저 섬네일 속 노인들처럼 파안대소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꼬. 이건 내 욕심일까, 집착일까? 얼마나 사는 게 고달팠으면 그리 됐겠나, 내가 엄마 웃게 해 줄 만큼 잘 난 딸이 못 돼서일까? 그런 생각 다 부질없다. 엄마의 한평생이 내 마음을 아프게 할 뿐이다. 엄격한 성격에 보수적인 교회문화까지 덧칠되어 엄마는 잘 웃지 않는 '권사님'이 돼 버렸다.
"아니, 엄마, 예수 뭐 하러 믿어? 예수 안 믿는 사람들도 유쾌하게 웃고 사는데 엄마 예수는 뭐야?"
"자식들이 엄마한테 잘하려 애쓰는데 맨날 찌뿌둥한 얼굴이면 엄만 기분이 좋아? 하나님 아버지라며?"
"엄마, 할렐루야 아멘 하면 뭐 해? 하나님 사랑하려 애쓰지 말고 엄마 자신을 받아들이고 사랑해 주라고~~"
겁 없는 중년이 된 내가 엄마에게 이런 팩폭을 퍼붓곤 했다. 다행히 엄마는 내게 수긍하는 편이었다. 그렇다고 엄마가 쉽게 달라지랴. 엄마한테 갈 때마다 나는 웃는 엄마 얼굴이 보고 싶었다. 부모 노릇하며 알게 됐기 때문이겠다. 자식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이 웃음 아닐까? 아이들이 부모에게 값없이 웃음 선물을 주었듯 말이다. 좋은 부모 돼 보겠다고 나도 한 심각했더랬는데,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이제 다음 주 금요일이면 엄마한테 간다. 포항 병원 들러 약 받고 영해 엄마 집에서 겨우 한 밤 자고 떠나온다. 짧은 만남, 엄마와 마주보고 많이 웃고 와야지. 노환 엄마의 웃지 않는 얼굴이 나와 함께 풀어지고 웃는 시간이길 소망한다. 피식 웃으면 어때. 소리내어 박장대소 파안대소하면 더욱 좋으리.
어느새 엄마가 또 나를 말리며 웃는 소리가 들리는 거 같다.
"야야 입 좀 덜 벌리고 웃어라. 남 흉 보구마느."
"아이구, 시끄럽대이 좀 조용히 웃어라 마."
"사모님이 저래 입을 벌리고 웃어대면 교양없다고 교인들이 흉 안 보더나?"
.....
파안대소 박장대소로 고달픈 인생 살아내게 하소서.
이 말도 안 되게 답답한 세상 구석구석이 웃음 소리로 시끄럽게 하소서.
섬네일의 저 노인들처럼 입이 찢어져라 웃어젖히며 살게 하소서.
엄마가 저 노인들처럼 입이 찢어져라 웃을 수 있다면....
엄마가 저렇게 입이 찢어져라 웃어젖히며 남은 생을 즐긴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