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모든 채소는 생식이 가능하다는 게 내 지론이다
"와~ 시금치를 샐러드로도 먹는구나!"
벌써 30년도 더 전 일이다.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 식당에서 점심 메뉴 중에 시금치 샐러드가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시금치라 반가운데 샐러드라, 놀랍고 낯설었다. 그러나 다른 채소와 어우러진 샐러드는 맛있었다. 그후 질문이 나를 떠나지 않았다. 시금치 샐러드가 그렇게 놀랄 일이었을까? 온 세상이 참기름 양념한 데친 시금치 무침 아니면 시금치 된장국만 먹을 린 없잖아?잘 설명할 수 없는데 억울함이랄까 배신감 같은 감정이었다.
"그래. 데치고 헹구고 양념하는 번거로움 대신 생채소로 먹으면 간편하고 좋지!"
"음... 상큼하고 맛있잖아!"
아직 결혼 전 자유의 몸이었건만 나는 본능적으로 힘 덜 들이고 먹는 자연식에 끌렸다. 생 시금치 데친 시금치 영양 성분 차이는 그 다음 문제였다. 온종일 음식하느라 바쁜 여자로 살까 두려웠을까. 아마도 엄마를 사랑하는 딸로서 엄마의 푸념을 잊지 못했으리라. 엄마가 행복하지 않은 걸 눈치챈 딸이었으니까.
"내가 시집오던 그날부터 손 끝에 물 마를 여가 없이 살았다."
"칭칭시하에 조롱조롱 딸린 얼라들에 농사일에 곱던 손이 갈고리가 다 됐다."
어린 내가 봐도 "손 끝에 물이 마를 새 없는" 엄마였다. 늘 밥 하느라 빨래하느라 물 긷느라 엄마 손은 젖어 있었다. 밭에서 논에서 땀에 젖어 돌아와도 또 밥을 하는 엄마. 눈치 빠른 딸은 엄마가 안쓰러웠고, 엄마를 거드느라 나이 답잖게 손이 험한 아이로 자라 갔다. 그래서 "손 끝에 물 한 방울 안 적시게" 하겠다는 남자에게 혹하는 여자들이 있었나 보다. 지금 보면 지독히 비현실적이고 뜬구름 잡는 프러포즈인데 말이다.
아무튼, 시금치 샐러드와의 조우는 작은 시작에 불과했다. 폴란드에 가 보니 시금치를 갈아 시퍼런 얼음덩이로 팔고 있었다. 분명 '시금치'라 적혀 있었다. 그 초록 얼음덩이가 수프도 되고 밀가루반죽도 되는 식재료였다. 겨울이 길고 채소가 귀한 나라에서 시금치를 저장해 먹는 방법이었다. 너풀대는 시금치나물은 그게 가능한 환경의 식문화, 먹고 사는 방법이란 나라 수만큼 사람 수만큼 많을 수 있었다.
요즘 한국에서 시금치 샐러드에 놀라는 사람 있을까? 그 촌년은 이제 어지간한 채소는 생채소로 즐기는 기후미식가로 살고 있다. 거의 모든 채소는 생식이 가능하다는 게 내 지론이다. 덕분에 기후미식이 특별한 게 아니다. 가능하면 생무로 즐기되 때론 무나물로 화식도 하는 식이다. 시험 보는 딸과 함께한 오피스텔 합숙 1주간도 그랬다. 화식도 했지만, 비건 모녀는 에너지 소비 적게 쓰는 생식도 즐겼다.
엊저녁 오피스텔에서 먹은 마지막 저녁 식탁엔 며칠 전 된장국 끓여 먹고 남겨둔 생시금치 잎사귀가 쌈으로 올랐다. 현미밥에 매생이국, 생파프리카, 생당근, 피클, 검정콩조림 등등. 겨울이 제철이지만 갈수록 시금치가 비싸니 귀하다. 시금치나물도 시금치 샐러드도 맛있다. 힘 덜 드는 기후미식 시금치 쌈 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