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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거지 쌓아두고 데이트 나간 아들커플이 사랑스럽다

정월대보름밥을 먹고 성평등하고 자유로운 시대를 상상한다.

by 꿀벌 김화숙

"설거지는 내가 저녁에 와서 할게. 그대로 둬, 알았지 엄마?"


여자친구 유하를 데려와 같이 점심 먹고 둘이 데이트 나가며 아들이 당부한 말이었다. 암암, 설거지 제때 안 한다고 무슨 일 나는 거 아니다. 저녁이 되도록 싱크대에 그득한 설거지 안 된 그릇들. 이게 무슨 대수인가. 정월대보름밥을 먹고 놀다 데이트하러 나간 아들과 그 여자친구 유하를 생각한다. 내 취향저격 선물까지 받아서인가, 내 입꼬리가 자꾸 올라간다.


"엄마랑 누나 여행 가기 전, 이번 주에 유하랑 점심 한 번 먹을까?"

아들이 이런 제안을 한 게 그저께였다. 유하가 긴 여행에서 돌아온 기념인데 내가 다음 주에 2주간 또 떠날 계획이 있으니 지금이 적기라는 거였다. 아들커플과 엄마아빠랑 같이 밥 먹자니 얼마나 좋은가. 문제는 딱 하나, 비건 식당 찾아 삼만리 할 건가. 편히 집에서 먹잔다. 대신 아들이 요리를 좀 하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좋고말고. 그래, 스물일곱 우리 막내아들과 동갑내기 여자친구랑 같이 밥 먹은 게 언제더라? 밥하고 손대접하는 일이 번거롭지 않을리가! 그럼에도 비건에겐 집밥이 맘 편하다. 맘에 드는 식당 찾기도, 만족스런 식사 하기도, 얼마나 힘든지 많이 경험했다. 그렇게 잡은 날이 오늘이었고, 마침 대보름밥으로 점심을 먹게 됐다.


정월대보름, 알고 보면 참 크고 중요한 전통명절인데 푸대접받는 절기다. 어릴 적 시골에선 농악소리며 지신밟기 쥐불놀이 등 동네축제였더랬다. 바쁘게 사는 도시에선 정월대보름은 오곡밥이나 먹으면 다행이랄까. 기분 좀 내면 밥과 나물을 평소보다 조금 마음 써서 해 먹는 정도였다. 매일 먹는 게 나물이요 현미잡곡밥인 비건에게 오곡밥에 나물이 별 거 아니어서? 아무튼 올핸 아들 커플 덕에 정월대보름이 명절이었다.


내가 밥과 나물을 준비하고 아들이 국을 맡았다. 여자친구를 초대해 음식 준비하는 아들. 비건식을 준비하고 식재료와 맛에 대해 대화가 가능한 멋진 젊은이다. 유튜브에서 본 황태미나리쑥갓 탕에서 황태 빼고 자기 나름 응용한단다. 다시마 채수에다 두부 넣고 팽이버섯 애호박 대파와 끓인 미나리쑥갓탕. 들기름과 소금 고춧가루로 낸 맛이 깔끔하다. 미나리쑥갓을 건져 고추장과 들깻가루에 찍어먹으라 일러준다.


평범하고도 특별한 오곡밥과 나물 성찬이었다. 현미, 찹쌀, 맵쌀, 보리, 귀리, 클로렐라쌀, 팥이 어우러진 밥. 불렸다가 볶은 건가지, 된장과 허브와 생참깨를 갈아 넣고 뭉근히 조린 시래기, 불려서 삶아 고추장과 과즙으로 무친 키다리나물, 참기름에 무친 김나물. 토마토 고수 파슬리를 주재료로 한 샐러드 한 접시씩, 그리고 배추김치를 곁들여 먹었다. 커피를 마시며 네 사람이 완벽 평어 수다를 즐겼다.


아들 커플을 생각하는데 왜 내 입꼬리가 올라갈까. 남자친구 부모와 평어하는 유하, 채식을 맛있게 먹는 것까지 사랑스럽고 고맙다. 우리 아들이야 늘 먹지만 정월대보름 오곡밥과 묵나물 맛을 모르는 젊은이들 나는 안다. 즐겁게 먹고 설거지는 두고 데이트 나간 아들커플이 사랑스럽다. 믿는 구석이 있어야 가능한 선택이다. 내가 저들처럼 젊었을 때, 덕이네 집에서 난 언제나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에 있던 무수리였거든.


정월대보름밥을 먹고 성평등하고 자유로운 시대를 상상한다. 아들과 유하가 살아갈, 그들이 만들어갈 새로운 시대를 응원하고 상상한다. 흐린 저녁 하늘에 안 보이는 정월대보름달이 내 가슴에만 휘영청 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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