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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개의 국가 자격증

언니의 국가 자격증 열두 개가 지난날의 나를 토닥여주었다.

by 꿀벌 김화숙

“300명 이상 어린이집 원장, 보육교사, 베이비시터, 한식 조리사, 중식 조리사, 양식 조리사, 간호조무사, 요양보호사, 사회복지사, 병원코디네이터, 미용사, 운전면허 1종.”


국가 자격증이 모두 12가지다. 장롱에 넣어둔 종이 쪼가리가 아니라 거의가 현실에서 일하고 돈 벌어 먹고사는데 쓰인 자격증들이다. 가장 오래전 것은 40년 된 미용사와 운전면허증이고 가장 최근의 것은 간호조무사와 병원코디네이터다. 지금까지 가장 길게 사용 중인 자격증은 요양보호사다. 이 자격증으로 병원에서 간병인 일을 하고 있다. 우리 언니 이야기다.


“세상에 국가 자격증을 12개나? 언니야, 이 정도일 줄은 몰랐대이.”

“난 왜 몰랐지? 이건 완전 압축판 한국 현대 여성 노동사야.”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언니의 70년 인생 파노라마를 한눈에 다 보여주는 자격증들, 세상에 모두 돌봄 노동 관련 것들이었다. 영화 <빵과 장미>에서 동생 마야와 언니 로사의 대사가 생각났다. 가족을 먹여 살리느라 몸 파는 일까지 했다는 로사에게 마야는 흐느끼며 그랬다. “몰랐어. 난 정말 몰랐어.” 로사는 소리쳤다. “몰랐어? 몰랐다고?” 고백하자. 나도 몰랐다. 아니, 어렴풋이 보고 안다고 착각한 그 여성사였다.


언니네서 1박2일한 짧은 여름휴가 덕분이었다. 3개월씩 창원과 서울을 오가며 돌봄 받는 시엄마를 창원에 모셔드리는 길에 대구에서 언니와 만났다. 언니가 사주는 점심을 넷이 먹고, 짝꿍과 시엄마는 창원으로, 나는 다음 날 짝꿍이 올 때까지 언니와 지내는 일정이었다. 짝꿍이 노모 돌봄을 맡은 덕에, 내가 ‘좋은’ 맏며느리 노릇을 벗은 덕에 누리는 ‘자매의 시간’이었다. 엄마 장례식 후 자매끼리 만나 놀자던 소원이 9개월 만에야 이루어진 셈이었다.


나보다 여섯 살 많은 언니는 2남 3녀의 맏이요 친정의 큰딸이다. 셋째인 나와는 자매이면서도 삶이 일찌감치 다른 경로를 걸어온 경우다. 20대 초반에 결혼한 언니는 아들딸이 다 독립한 졸혼 15년 차 1인가구로 살고 있다. 19년 전 내 오빠가 세상 떠난 후부터는 친정 부모에겐 맏아들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만년 K장녀다. 영덕 부모님께 일 있을 때, 대구 언니가 가장 먼저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작년 가을 친정엄마가 돌아가실 때도 언니가 마지막까지 엄마 곁을 지킨 보호자였다.


언니는 9인승을 2인승으로 개조한 큰 캠핑카를 몰고 나왔다. 그 차로 우리는 엄마 아빠가 봉안된 영천 호국원에 다녀오며 해지는 줄 모르고 수다잔치를 벌였다. 대구 사는 여동생과 제부가 합류해 저녁도 먹었다. 사느라 바빠 자매들끼리 같이 놀러 다녀본 경험이 없었구나, 부모 생신이나 돌봄 일로만 모이고 흩어졌구나, 실감하는 시간이었다. 열두 개의 국가 자격증을 가진 언니의 커다란 캠핑카를 타고 자매 캠핑하는 날이 언제 올지 기다려진다.


박철의 시 <그 아이의 연대기>를 따라 내가 쓴 모방 시 <그 아이의 호랑이 연대기> 중 한 연을 옮겨 본다. 언니 오빠가 어린 내 ‘가슴에 짐’으로 등장하는 대목이다.


1972년 10월 가을 추수 후

아이 가족 면 소재지 영해로 이사하다

청소년 언니 오빠는 대구로 돈 벌러 나가고

영해국민학교로 아이와 두 동생 1,2,3학년 다니다

학교 중퇴한 언니 오빠가 아이 가슴에 짐이 되다


그랬다. 중학교 중퇴한 언니 오빠는 어린 내 가슴에 오랫동안 짐으로 있었다. 엄마의 눈물과 엄마아빠의 불화와 내 죄책감의 원인이었다. 딸들이 돈 벌어서 아들 공부시키는 이 나라였지만 오빠는 세 동생들에게 양보만 하다가 간경화 간암으로 48세에 세상을 떠났다. 꿈 많고 재능 있는 언니가 '꺾여버린' 청춘을 사는 게 내 가슴에 짐이었다. 나와 동생들을 위해 책을 사주고 옷을 사주는 언니에게 나는 늘 미안했다. 나는 언니가 양장점에서 만들어주는 교복을 입고 중학교를 졸업했고,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언니는 결혼했다. 내가 대학생활에 겉돌 때, 언니는 미용사로 일하며 조카를 키우는 엄마였다. 내가 선교랍시고 돌아다니다 두 아이 엄마로 한국에 와 보니 언니는 검정고시를 거쳐 방송대까지 졸업하고 어린이집 원장을 하고 있었다. 내가 사역에 바빠 세 아이를 부탁하면 언니는 피자를 직접 만들어주며 며칠씩 돌봐 주는 품 넓은 큰 이모였다.


어린 내 가슴을 누르던 그 짐은 지금 어디로 갔을까? 언니와의 1박 2일 동안 언니의 삶을 들으며 나도 고백했다. 언니 오빠가 못 간 대학을 나만 다닌다는 죄책감이 있었다고. 내가 공장 갔더라면 언니 오빠가 늦게라도 대학에 갔을 텐데, 언니가 그토록 가고 싶어 하던 대학을 나는 정작 엉터리로 다닌다는 부끄러움이 있었다고. 언니가 일하며 살림하며 두 아이 키우며 야학하며 대학 공부하는 동안 나는 세상 물정 모르는 헛똑똑이로 살았다는 부끄러움이 컸다고. 자격지심 때문에 언니와 마음 터놓기 힘든 시절이 있었다고 털어놨다.


열두 개의 국가 자격증이 지난날의 나를 토닥여 주었다. 언니의 청춘은 꺾인 게 아니었다. 자기 앞의 생을 받아들이며, 부지런하고 도전적이며 개척적으로 살아온 언니의 삶의 이야기. 어린 내 가슴의 그 짐은 아침 안개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우리는 돌봄 노동 문제를 비판하면서 동시에 그 속에서 일하며 살아내고 있는 여성 동지로 마주하고 있었다. 이제 부모도 가방끈도 그 무엇도 우리를 쉽게 규정하지 못하는 세계에 우리는 와 있었다. 어른이 된 후에 더 열심히 공부하는 것도 자매는 닮아 있었다. 그러나 글도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리는 언니. 운전도 나보다 훨씬 잘하고 살림도 훨씬 잘하는 내 언니. 몸으로 노동해 돈도 나보다 훨씬 잘 버는 언니. 남편도 자식도 의지하지 않는,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는 멋진 언니와 포옹하는 휴가였다.


짝꿍이 나를 데리러 왔을 때 언니는 먹을 거 한 보따리를 챙겨 차에 실어주었다. 친정엄마가 없는 빈자리에 언니가 서 있었다. 흑마늘, 매실 고추장, 쌀조청, 매실청… 언니가 시간과 마음을 들여 직접 삭히고 고고 달인 귀한 것들이었다. 언니는 오랜 세월 된장 고추장이며 조청이며 청을 다 직접 담가 먹고살며 나눠주는 사람. 나도 그런 노년을 살 거라고, 나는 허풍만 떠는 사람. 그 비싼 흑마늘까지 직접 만들어서 동생들에게 나눠주는 언니였다.


언니는 오늘도 캐리어를 끌고 24시간 간병 13만 원 일당 일하러 갔을 것이다. 어쩌면 한 열흘 일하고 캠핑카를 끌고 어느 강가에서 고요히 자기 돌봄의 시간을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언니한테 받아 온 매실 고추장에 또 밥을 싹싹 비벼 먹다가 훅 인증샷을 찍어 날린다.


“언니야, 고추장 넘 맛있어. 나 혼자 자꾸 고추장에 비벼 먹는다. 완전 빨간색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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