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 글쓰기 합평하며 웃고 우는 여성들, 함께 꾸는 작가의 꿈
'함께크는여성울림' 돌봄 글쓰기 8주 과정이 이제 한 주 남았다. 어제도 현장에 12명, 줌으로 1명이 함께 2시간 반 동안 글 합평을 즐겼다. 시간이 갈수록 더 많이 웃고 자유롭게 말하며 즐기는 사람들을 본다. 어떻게 내가 이런 멋진 글 모임을 진행하며, 이런 작가 활동가로 60대를 살고 있는지, 꿈만 같다.
나를 작가로 살게 해 준 브런치가 고맙다. 나는 마흔 살 생일을 보내며 "후반 인생은 작가로 살고 싶다"라고 노래하기 시작했다. 당시엔 작가로 산다는 게 뭔지 구체적인 그림은 없었다. 다만, 보수적인 선교단체에서 씌워진 '목사 사모'라거나 '헌신하는 여종'이란 이름을 벗어나고 싶었다. 한 남자의 배필 말고, 내 목소리와 내 이름으로 말하고 쓰며 '나로' 살고 싶었다.
작가가 되는 것 말곤 내 가슴의 답답함을 풀 길이 안 보였기 때문이다. 지나가는 사람들 붙들고 내 말 좀 들어달라 할 순 없는 노릇 아닌가. 첫 단계로,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들 가정조사서에 엄마를 '작가'라 쓰게 했다. 그리곤 직장 퇴근 후 글쓰기 강좌에 다녔다. 인터넷 시민기자로 자유기고가로 글을 쓰고자 용을 썼다. 블로그를 만들어 썼다. 그러다 52세에 간암 수술을 하면서 브런치를 두드리게 됐다.
내 몸과 삶에 일어난 변화를 브런치로 쓰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첫 도전에 낙방, 두 번째도 낙방, 3번 만에 합격했을 때 나는 58세 백수 아줌마였다. 그날로부터 1746일째인 오늘, 여덟 번째 브런치 북 <나? 글쓰기로 자기 돌봄 중!>에 14번째 꼭지를 쓴다. 돌아보니 브런치에 기대어 누가 알아주든 않든 줄기차게 내 글을 쓸 수 있었다. 첫 매거진 <B형 간염 자연치유 일기>로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 응모하고 떨어진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출판사 56군데로 기획안과 원고를 투고했고 2022년 9월에 내 첫 단독 저서『내 몸은 내가 접수한다』(생각비행)를 낼 수 있었다. 꿈을 이룬 환갑 선물이었다. 다음 책도 브런치북으로 <숙덕숙덕 사모가 미쳤대>로 연재한 후 종이책 『숙덕숙덕 사모의 그림자 탈출기』(생각비행)로 2024년 6월에 나왔다.
브런치 작가 5년이 되는 지금 나는 다음 책 출간을 준비 중이다. 여성단체 벗들과 글쓰기 강좌를 3년째 진행하고 있다. 나만 쓰고 행복하면 무슨 맛인가. 작가의 꿈을 꾸는 벗들이 나와 함께 글을 쓴 후 브런치에 계속 입성하고 있다. 이번 돌봄 글쓰기 강좌가 끝나면 또 몇 사람이 브런치에 입성할 테지. 브런치는 이처럼 나를 작가 활동가로 활개치도록 발판이 돼 주고 수많은 글 벗들과 연결해 주었다.
오늘 쓴 돌봄 주제 짧은 연설문 하나 이어 붙인다.
나는 돌봄이 싫다/5분 연설문
나는 돌봄이 싫다, 이런 제목 어떤가요? 아니, 돌봄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는 인생인데, 돌봄은 필수노동인데, 싫다고 대놓고 말하려니 좀 민망하긴 하네요. 네, 전에는, 한때는 아주 좋아하던 건데 정황과 맥락이 달라지면 싫어지는 거 있잖아요.
저는 동해안 영덕에서 태어나서 싱싱한 회를 많이 먹고 자랐습니다. 그런데 11년 전 암 수술 후 채식 자연식을 추구하다 보니 회도 생선도 다 싫어졌습니다. 비건으로서 동물을 때려잡아 만든 육식은 상상하기도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짝꿍의 어떤 행동은 익숙한데 어느 날 갑자기 견딜 수 없이 싫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작년까지 좋아하던 옷인데 올핸 맘에 안 들고 싫어지는 경우도 많죠. 네, 돌봄도 언제부턴가 싫어졌습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저는 남 돌보는 아이였습니다. 두 동생에 집안일에 농사일에 친구들까지도 제겐 돌봄의 대상이었습니다. 유년기 기억 하나 가져올게요. 여름 언저리였어요. 3살 아래 남동생을 업고 연년생 여동생을 데리고 엄마가 일하는 밭으로 동생 젖 먹이러 가야 했습니다. 젖먹이 동생이 서너 살, 저는 아마 예닐곱 살이겠죠? 업을 때마다 동생이 무거워서 자꾸 흘러내리니 기우뚱대며 힘들어한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날도 저는 오리 궁둥이로 남동생을 허리 위로 추어올려 업고 손깍지를 끼려 애쓰며 걸었습니다. 동네 앞 옹달샘에서 시원한 샘물도 한 주전자 떴습니다. 여동생과 교대로 주전자를 들 땐 한 손엔 주전자 한 손은 아기를 받쳤습니다. 비탈길을 걸어 개울을 건너고 좁은 도랑을 따라 논둑길을 한참 걸어가야 했습니다. 등에 업힌 남동생은 자꾸만 아래로 쳐지죠, 온몸에 땀은 흐르죠, 여섯 살 소녀에게 너무 무거운 삶이었습니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아이코 비틀, 한순간에 도랑에 고꾸라졌습니다. 도랑은 아이 둘이 쏙 들어갈 깊이였습니다. 물은 얕았지만 등에 업힌 동생 무게에 눌려 저는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습니다. 주전자의 물은 다 쏟아졌고 두 동생은 울어대는데, 저 혼자 아무리 낑낑대도 도랑을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화숙이 어메야~ 얼라들 도랑에 처박혀 울고 있다. 퍼뜩 내려가 봐라~”
건너편 밭에서 일하던 동네 아줌마가 우리를 보고 소리쳐 주었습니다. 잠시 후 엄마가 달려왔고 남동생과 저는 차례로 건져 올려졌습니다. 물에 빠진 생쥐 꼴에 무릎이며 팔은 까져 피가 났지만 저는 울지 않았습니다. 제 관심은 온통 남동생이 안 다쳤는지, 엎질러진 주전자 물은 어쩌나, 그리고 엄마한테 혼나지 않을까에 쏠려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동생 업고 도랑에 처박힌 여섯 살 소녀는 어떤 어른이 되었을까요? 이게 영화의 도입부 장면이라면 영화 전체가 그려지지 않나요? 네 저는 한 살 아래 여동생과도 싸우는 법 없이 청소와 설거지를 도맡는 언니였습니다. 반항할 줄 모르는 착한 청소년기를 거쳐 싸울 줄 모르는 대학생이 되고 선교단체에서 충성과 헌신의 청년으로 남 돌보다가 순종하는 아내로 결혼했습니다. 세 아이 엄마로 좋은 아내요 며느리요 사모로 살다 어느날 도랑에 처박힐 운명이었습니다.
너무 비관적인가요? 그러나 반전이 있습니다. 책 『사랑은 사치인가』에서 벨 훅스는 그의 엄마의 중년이 “더 이상 자기 시간을 죄다 남을 돌보는 데 쓰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짜릿한 시간이더라고 썼습니다. 제 중년도 암 수술 후 “내 몸은 내가 접수한다”, 자연치유와 페미니즘이라는 짜릿한 반전이었죠. 내 목소리로 말하고 쓰는 작가 활동가의 시간이 왔으니까요.
60대인 저는 돌봄이 싫습니다. 여자만의 일이 아닌, 누구나 배우고 해야 할 필수노동인데, 딸이라고, 여자라고, 떠맡겨지는 돌봄이 싫습니다. 저임금과 성차별을 정당화하는 돌봄 정책이 싫습니다. 자기 돌봄 보다 남 돌봄을 강조하는 거짓말이 정말 듣기 싫습니다. 그런 돌봄은 주기도 받기도 싫습니다. 저는 돌봄이 싫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