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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면허 "2종 격하", 중년은 인생의 어느 계절일까?

자기돌봄의 걸음을 멈추지 말 지어다.

by 꿀벌 김화숙

"2종 격하"

화인처럼 낯선 직인이 딱 찍혔다.

운전면허 적성검사 신체검사서에 보란 듯이 또렷이 찍혔다.

1종 보통이던 내 운전면허는 갱신 자격이 안 돼서 "2종"으로 격하 판정을 받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러나 신체검사 결과니까, 담담하게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내 한쪽 눈이 워낙 안 보였기 때문이다.


재작년 망막박리 수술 후 시력을 회복하지 못한 상태다. 안경끼고 두 눈으로 보면 그래도 세상은 볼 만했고, 일상도 독서도 영화도 컴퓨터 작업도 다 할 수 있었다. 눈을 늘 혹사한다며, 내 몸 중에 유일한 문제는 눈이라며, 눈에게 고맙다, 눈아 미안하다, 그러고 살았다. 하루도 활자 안 보고 모니터 안 보고 지나는 법이 없었다. 아주 가끔, 지지리 초보같이 조심조심 운전하면서도 격하 판정 받을 눈이란 생각은 못 했다.


0.5만 넘으면 격하는 피할 수 있었는데, 굳이 0.4를 준 건, 내가 시력검사판을 너무 못 읽는 걸 검사관이 지나칠 수 없었으리라. 안 보이는 걸 보이는 척 할 수가 없었다. 두 눈으로는 보이는데 왼눈을 가리고 오른쪽 눈으로만 보면 말짱 꽝이었다. 글자도 문자도 다 찌그러지고 흐려져 도무지 읽을 수가 없었다. 0.5로 한 단계만 올려 적어 달라고 떼쓰면 격하를 막을 수 있었을라나? 그럴 맘도 필요도 없었다. 안 보이는 눈으로 굳이 위험을 감수할 만큼 내가 운전에 절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몸의 불완전함을, 노화와 약해짐과 느려짐과 모자람을 인정하는 날이었다. 나이는 숫자일 뿐이라고들 하지만 나이는 나이이기도 하니까. "격하" 받을 만큼 내 오른 눈은 시력이 격하됐으니까. 늦은 40대에 받은 1종 보통 면허와 60대의 나는 강제 작별해야 했고 2종 격하 새 면허증을 받아야 했다.



나무마다 단풍이 들어가고 낙엽이 여기저기 하염없이 지는 이 계절에 "격하" 판정을 받다니. 내 몸의 능력이 가을 낙엽처럼 아래로 떨어지고 격하되고 있다는 소리 같다. 마음은 20대 30대인데, 아니 그 시절의 나보다 지금이 훨씬 에너지 넘치고 건강하고 꿈꾸는 나날인데, 격하라니. 그러나 이의없다. 내 눈이 워낙 안 좋다는 걸 아니까. 그리고 60대 중반으로 가는 나는 분명 젊은이가 아니고 노인이 돼가고 있으니까.


노인 운전자가 큰 교통사고를 낸 뉴스를 보면 자꾸 마음이 쓰이더라니. 안 그래도 지리 감각 운전 감각 없는 사람이 일년에 한두번 운전대를 잡았으니, 운전에 자신감이 붙을 리가 없었다. 운전 잘하는 짝꿍과 살면서 그에게 의지하면서 더 그리됐지 싶다. 외부 강의라도 갈라치면 운전이 가장 걱정인데, 짝꿍은 여건만 되면 나를 위해 운전기사 노릇을 즐기는 사람이다. 이러니 어쩌다 운전할 때면 나는 늘 초보였고 자신이 없었다.


그 불편한 감각이 싫어서 의지적으로 가물에 콩나듯 하던 운전 의지조차 '격하'되는 게 느껴진다. 몇 주전 서울에서 혼자 안산으로 운전해 온 뒤 무슨 큰 일이나 성취한 양 가족톡에 자랑한 게 어쩌면 추억이 될지 모르겠다. 직장 생활 10년여 동안 매일 운전하며 트럭도 몰고 장애인 리프트카도 몰던 게 아득한 옛 이야기 같다. 자유인 11년간 걷고 살다 고니 초보운전 실력에 눈은 나빠져 버렸다. 이런 날 오기 전에 좀 더 열심히 운전할 걸. 쩝!


어차피 우리집 차는 주로 덕과 함께 서울에 있으니, 고민할 게 무어냐. 어디든 가고 싶은대로 걸을 수 있는 두 다리가 고맙다. 운전해 돌아다닐만큼 잘 나가는 작가도 아니다. 두 다리 힘 '격하' 되기 전게, 아니 덜 되게, 자기돌봄의 걸음을 멈추지 말 지어다. 소중한 눈도 잘 돌볼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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