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은 비우되 마음은 비우는 게 능사가 아니더라
2016년 연말 나는 생애 처음으로 가출했다.
암수술 후 세 번째 새 해를 앞두고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서였다. "이게 나라냐" 촛불이 타오를 때였다. 몸과 마음을 다해 촛불 집회에 동참하다 보니 촛불이 내 삶에 옮겨 붙었다. "이게 결혼이냐" "이게 길이냐" 내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할 게 자꾸만 보였다. 분노가 나를 이끌었고 나는 따라야 했다. 자신에게 집중하며 나는 서울 성곽길을 걷고 또 걸었다.
마음 비우지 마세요!
세 시간 정도 걷고 길상사에 닿으니 12시가 넘었다. 화장실에 들러 땀에 전 내복을 갈아입었다. 햇볕 드는 공양간 창가에서 채식 비빔밥 한 그릇을 꼭꼭 씹어 즐겼다. 내 또래 중년 아줌마들이 많이 보였다. 내 나이 만 54세, 결혼 26주년이 지나도록 이런 자유여행은 처음이었다. 가출하길 잘했다.
“등산을 많이 하시나 봐요. 옷 색깔이 참 곱네요.”
점심 후 절 카페에서 차 한잔 놓고 앉았는데 누가 말을 걸었다. 나보다 조금 젊어 보이는 우아한 아줌마가 미소 지으며 마주 앉았다. 아웃도어에 땀 절은 나와 달리 그는 화장하고 잘 차려입은 멋쟁이였다.
“감사합니다. 성곽길을 땀 흘려 걸을 땐 이게 편하더라고요.”
“멋지네요. 저도 한 번 해봤으면 좋겠어요. 절에 몇 년을 다녀도 성곽길 못 걸어봤어요.”
집 나와 만 하루가 넘어가니 입이 근질근질하던 참이었다. 낯선 동무를 거절할 내가 아니었다.
“어머나! 한 번도요? 저랑 이따 같이 가실래요? 오후에도 좀 걸을 수 있는데.”
“정말요? 에효……. 보세요. 산길 걸을 복장이 아니네요. 체력이 좋으신가 봐요.”
“체력요? 길러보려고 이러잖아요. 근데…… 혹시 이 근처 따뜻하고 싼 숙소 아는 데 없어요? 제가 가출했거든요. 한옥에서 잤는데 추워서요.”
내쳐 수다 떠는 나를 우아한 벗이 눈을 똥그랗게 뜨며 바라봤다.
“어머나, 가출이라 그랬어요?”
“네. 가출 선언하고 3박 4일 목표로 나왔어요. 이제 한 밤 잤는데 숙소가 말썽이네요.”
순간 우아씨, 내 쪽으로 가까이 다가앉으며 말을 이었다.
“세상에! 너무 부러워요. 나도 가출 한 번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니 이 엄동설한에 가출한 사람이 부럽다는 우아씨, 괜찮은 숙소 이야기엔 전혀 관심 없어 보였다.
그는 대기업 임원 남편과 남매를 둔 '부족함 없는' 전업주부였다. 남편이 연말 휴가를 몰아 쓰느라 며칠째 집에 있는데 자꾸 부딪치니 나왔단다. 손끝 하나 꼼짝하지 않는 남편에게 우아씨는 삼시 세끼 차려야 했다. 결혼 22년. 오늘따라 점심 차릴 게 진저리 나게 싫었다. 남편은 아내를 애처럼 귀여워하는데 애들 키울 땐 어린이날에 남편한테 선물을 받았단다. 나이 먹을수록 그가 간섭하고 통제하는 남편이더란다. 답답해서 발길 닿는 대로 나왔는데 오는 게 절이었다. 숨을 돌리고는 그가 덧붙였다.
"조금 전 남편이 전화로 뭐라는지 아세요? 아니 밥시간인데 당신 어디야?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이래요. 그 소리 듣는데, 아휴~ 아무 말하고 싶지 않아서 전화 끊어버렸어요."
“우와~ 대박! 남편 장난 아닌 걸요? 많이 답답하시겠네요.”
나의 추임새를 따라 그는 남편 흉을 더 보더니 다시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절에 오니 마음이 좀 가라앉네요. 여기 오니 좋죠?”
“좋죠. 이런 데가 있으니 서울이 참 매력적이죠." 맞장구를 치고 내가 또 물었다.
"여기 오면 어떻게 마음이 가라앉아요?”
“절에 오면 제가 마음을 비우게 되는 거죠. 비우면...... 다시 살아가게 되더라고요.”
엥? 재미있던 이야기가 갑자기 찬물을 맞은 기분이었다. 그냥 있을 내가 아니었다.
“어떻게 하는 게 마음을 비우는 건지 좀 더 얘기해 줄 수 있어요?”
“그렇죠 뭐. 남편은 절대 안 바뀌는 걸 아니까 결국 내가 비우는 거죠.”
살짝 한숨 섞인 우아씨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늘 그렇게 하셨어요? 비우는 게 어떻게 하는 거냐니깐요? 비워진 마음 약발은 얼마나 지속되던가요?”
쏟아지는 내 질문에 우아씨가 잠시 눈빛이 흔들리더니 또 한숨을 쉬었다.
“그렇잖아요. 바뀔 사람이면 제가 다르게 시도해 보죠. 제가 마음 안 비우면 못 사니까. 답이 없는 걸요.”
순간 나도 모르게 감정이입이 되면서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버렸다.
“아뇨. 잠깐요! 마음 비우지 마세요! 제발요~~. 화가 나고 미치겠는데도 남편에게 맞춰주기만 하는 게 답이 되나요? 남편도 맘을 비우든가 같이 바꾸는 노력을 해야지. 혼자 비우고 다시 화나고, 대전제가 잘못된 거 아닐까요? 비울 게 있어야 비우죠. 마음 비우지 마요~”
어쩌나. 우아한 동무가 내 앞에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살짝 당황한 나는 맘에도 없는 사과를 했다.
“어머 죄송해요, 괜한 소리를 했나 봐요. 힘들게 마음 비우는 분한테. 제 요즘 생각이 그래서 흥분했어요.”
“아니에요. 언니,라고 부를게요. 언니 말 들으니 가슴이 뻥 뚫리는 거 같아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나 봐요. 맞아요. 저도 그렇게 살길 바라죠. 싸우기도 해 봤어요. 저는 남편을 이길 수가 없어요. 결국, 남편이 화내면 그만이죠. 이러면, 남편 화내는 거 아닐까, 그거부터 고민하게 돼요. 결국 내 마음을 비우게 되죠.”
오랜 친구처럼 우리는 공감을 주고받았다. 나는 내가 가출한 이유도 결국 비슷하다, 암 이야기, 갱년기 이야기에 내 남편 흉까지 늘어놨다. 우아씨, 가출을 허락했으면 너무 좋은 남편 아닌가요? 나, 결국 도찐개찐이다. 우아씨, 그래도 그 정도면. 나, 겉모양에 속지 말라. 속이 남성 중심적인 건 똑같다…….
아~~ 몸은 비우되 마음은 비우는 게 능사가 아니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