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년 차 희귀 난치병 환자의 추억
대학병원에 가면 환자복을 입은 아기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성인 환자들이 입는 얌전한 디자인의 환자복과 달리 알록달록 우주선 무늬가 박혀 있는 소아용 환자복을 입고 있지만 그마저도 크기 때문에 소매와 바짓단은 몇 번 접어져 있다. 머리카락은 아직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서 없거나 아니면 투병 생활을 하느라 삭발했거나 둘 중의 하나로 대체로 숱이 부족한 편이다. 성인 환자들은 보통 손등이나 팔에 주삿바늘을 꽂아 링거를 연결하지만 소아의 경우 혈관이 가늘어 잘 잡히지 않기 때문에 주로 발등에 꽂는다. 주삿바늘을 고정하는 네모난 스티커는 앙증맞은 통통한 발을 온통 덮고 있고 주사 라인을 따라가다 보면 용도를 알 수 없는 갖가지 주사액들이 막대기에 주렁주렁 걸려있다. 이 막대기는 성인 환자라면 휠체어에 고정되어 있겠지만 아기들은 병원용 유모차에 고정되어 있다. 아기들은 유모차에서 쪽쪽이를 물고 잠을 자기도 하고 신기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사람들을 쳐다보기도 하며 유모차를 미는 엄마를 향해 안아 달라고 팔을 뻗기도 한다. 병원복을 입지 않은 아기들과 똑같이.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 시즌2’에 대학병원에 대해 이런 대사가 있다. “여기는 3차 병원이야. 여기까지 왔다는 건 더는 없다는 뜻이야.” 그렇다. 대학병원은 먼저 간 작은 병원에서 해결이 안 되어 큰 병원 가보라는 말을 듣고 온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그만큼 중한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전국에서 모여든 이곳에서 아기 환자를 보면, 그 작고 보송보송한 얼굴로 천진난만한 표정을 짓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 수밖에 없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보이는데 어떻게 이곳까지 오게 되었니. 꼭 와야 한다면 건강하게 자라다가 건강하게 살다가 나중에 동네병원도 들렸다가 중형병원도 들렸다가 노년에야 오면 좋을 텐데 어떻게 모든 과정을 건너뛰고 태어나자마자 이곳으로 오게 되었니.
나는 18개월 때 심장의 이상을 발견한 이후 6개월에 한 번씩 서울아산병원 소아심장과에 다니며 심장초음파 검사를 받았다. 고등학생이었던 어느 날 엄마와 함께 심장초음파 검사실 앞에서 대기를 하고 있었는데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자지러지는 듯한 울음소리가 안쪽에서 한참 동안 계속되었다. 간호사 선생님이 몇 번 들어갔다 나오셔도 울음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성인은 초음파 검사를 그냥 하지만 만 3세 이하의 아기는 수면제를 먹여 재우고 검사한다. 아기가 움직이면 심장을 자세히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아기가 잠들지 않아 검사를 못하고 있는 상황인 것 같았다. 울음소리를 한참이나 듣고 있다가 엄마가 말했다.
“너도 많이 울었어. 어찌나 많이 울었는지 수면제를 먹여도 잠에 안 들더라고. 어휴. 유리 딸 그때 왜 그렇게 울었을까.”
그때 알았다. 소아 심장검사실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부모들과 목 놓아 울고 있는 아기의 모습이 곧 우리 가족의 과거였던 것을. 나는 기억을 못 하지만 우리에겐 분명히 그런 시간이 있었다. 내가 알지 못했던 시간이 내 눈앞에서 재현되기 시작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기띠를 매고 순서를 기다리는 어머니, 심장 초음파 검사를 얌전히 받으면 장난감을 사주겠다고 아이에게 약속하는 아버지, 오늘 무슨 검사하러 온 줄도 모른 채 구석에 마련된 플라스틱 모형 집을 들락거리는 귀여운 아이가 보였다. 나도 저 장난감 집에서 놀았을까. 젊은 시절의 어여쁘고 멋진 엄마, 아빠와 어렸던 나는 이 병원에서, 소아심장과에서, 검사실과 진료실에서 어떤 시간을 보냈을까. 그 시간이 항상 슬프지만은 않았기를 바랐다.
내가 기억하는 인생 최초의 순간부터 아산병원은 언제나 함께였다. 소아심장과 담당 선생님은 내가 부모님 품에 안겨 진료실에 들어온 때부터 어느 날 스스로 걸어 들어오는 것과 어느 날 중학교 교복을 입고 오는 것과 어느 날 대학교에 입학하는 것까지 보셨다. 나는 선생님의 주름이 하나하나 늘어나는 것과 검고 빽빽하던 머리가 하얗게 세어가는 것을 보았다. 내가 성인심장과로 옮겨진 22살까지 약 20년간 선생님은 나의 성장을, 나는 선생님의 나이 듦을 지켜보며 우리는 함께 오랜 시간을 공유했다.
선생님은 열 손가락 중 양쪽 검지 두 개만 사용하는 독수리 타법으로 항상 자판을 눈으로 보면서 치셨다. 한 글자 한 글자 자음과 모음을 연결하며 진료기록을 남기다가 고개를 들어 화면을 확인하면 알 수 없는 영어 알파벳들이 쭉 나열되어 있었다. 안타깝게도 자판 설정은 자주 영문으로 되어있었다. 그걸 지켜보는 나와 엄마는 ‘어떡해…’하며 마음속으로 탄식이 절로 나왔지만 선생님은 역시 프로페셔널이셨다. 표정 변화 하나 없이 Backspace 키를 찾아 오른손 검지로 꾹 눌러 공들여 썼던 알파벳들이 주욱 지운 다음 새로운 마음으로 한/영 변환키를 누르고 진료기록을 처음부터 다시 작성하셨다. 인간미가 느껴지는 선생님의 모습이 좋았다. 선생님의 말투는 다정하지 않아도 항상 나의 말을 잘 들어주셨고 격려해 주셨기 때문에 선생님의 진료는 항상 다정했다. 소아 담당의 답게 가슴 앞주머니에 꽂혀있던 캐릭터 볼펜이 선생님의 본심을 증명했다.
간호사 선생님들과 병원 직원분들의 친절함 역시 내 추억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성인이 된 이후 엑스레이 검사를 위해 접수를 하려는데 내 이름을 듣고 나를 알아보신 직원분이 계셨다. 예전에 소아심장과에서 일할 때 내 이름을 많이 보아서 기억한다고 하셨다. 병원 곳곳에 아기였던 나를 어른으로 키운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곳에서 18개월 때부터 진료받기 시작해 중간중간 우여곡절도 겪고 치료도 받고 나는 지금의 30대가 되었다. 병원은 내게 고향과도 같았다. 이곳에 오면 이상하게 익숙하고 편안한 느낌이 든다.
진료를 본 어느 날 익숙한 병원 1층 로비를 걷다가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만든 참여형 미디어아트 디스플레이를 발견했다. 아이들이 신나게 디스플레이 화면 속의 물고기를 쫓아다니며 손으로 터치하고 있었다. 터치당한 물고기는 뿅 하고 사라졌다. 잠시 이곳이 병원인지 키즈카페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나 때는 이런 게 없었는데 말이야. 세상이 참 좋아졌구먼!’ 하며 한참을 구경하다가 나도 아산병원 출신 어린이니까 동참하여 물고기를 잡아보았다. 이곳에 와야만 하는 어린이 환자들이 병원을 너무 삭막한 곳으로 기억하지 않길, 어린 나이부터 만난 병이 그들에게 너무 무겁지 않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