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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경 May 12. 2019

흐린 날엔 떡볶이를 먹습니다

아무렴 어떤가, 내겐 떡볶이가 있다

기운이 빠지고 우울한 기분이 들면 떡볶이를 사다 먹는다. 살다보니 죽고 싶을 만큼 우울할 때도 있었는데 이대로 죽기엔 떡볶이를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이 진지하게 아쉬웠다. 떡볶이를 먹어야 하기 위해 사는 건 아니지만 떡볶이 덕분에 이만큼이라도 사는 건 분명하다.   


아이들이 먹고 싶다할 땐 이것저것 넣고 기꺼이 만들지만 나를 위한 떡볶이는 사다 먹어야 한다. 그래야 효과가 있다. 오늘을 어디서 살까. 동네엔 모두 네 개의 떡볶이집이 있는데 고맙게도 얼마 전에 하나가 더 생겼다. 새로 생긴 가게는 ’뚱땡이 떡볶이‘인데 줄여서 ’뚱떡‘이라 부른다. 떡이 얼마나 뚱뚱하길래. 하여튼 환영한다. 오늘을 뭘 함께 먹을까. 순대, 오뎅, 오랜만에 튀김? 잠시 혼란스럽다. 제각기 매력적이다. 나 같은 영혼을 위해 모둠 세트가 있다는 것도 고맙다. 스마트폰과 함께 먹을지, 티브이 앞에 앉을지도 결정해야 한다. 아이 한글 학습지를 신청할 때 선물로 받은 한글상이 필요하다. 이 상에 앉아 차례로 한글을 뗐던 아이들이 영어책을 읽어댈 만큼 자랐다. 이젠 우리 집과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 되었지만, 떡볶이 먹을 때를 생각하여 버리지 않았다. 


먹을 준비를 하는 동안 기분은 한결 나아졌다. 얼굴과 입술을 벌겋게 해서 식식대며 먹는다. 입은 맵고 배는 불러온다. 맵다고 물을 많이 마셨더니 배가 땅땅해졌다. 괜찮다. 믹스 두 봉지를 털어 커피를 탄다. 역시 믹스다. 똘똘한 놈이다. 제 할 일이 뭔지 정확히 알고 있다. 어쩌면 이 느낌이 좋아 떡볶이를 먹는 건지도 모르겠다. 달달한 케이크에는 아메리카노가 딱이듯 떡볶이엔 믹스다. 떡볶이에서 시작하여 오뎅, 순대, 튀김, 음료수, 커피 믹스까지. 모두 떡볶이에서 시작된 일이다. 모두 떡볶이 때문이다. 


떡볶이로 마음을 달래는 건 좋은 습관은 아니지만 술이나 담배, 도박이나 주식 투자보다는 건전하고 경제적인 습관이라 위안하며 평소에도 떡볶이집 간판을 눈여겨 본다. 떡볶이를 결심한 때부터 커피잔을 다 비울 때까지 대략 한 시간이 걸린다. 정신없이 떡볶이에 집중하는 한 시간이면 머릿속을 떠돌던 고민과 근심, 갈등과 불편함이 깔끔해진다. 없어지지는 않는다. 어떤 고민과 문제도 떡볶이를 먹는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달라지는 건 내 마음이다. 괜찮다고 말한다. 잠시나마 괜찮다고 토닥여준다. 내가 빠져있는 그 고민은 생각보다 그렇게 무겁고 심각한 일은 아니라고. 착한 떡볶이는 그렇게 나를 위로한다. 떡볶이 가게 중 한 군데를 고르고 떡볶이와 함께 먹을 음료수를 고르느라 잊혀 버릴 만큼 별것도 아닌 일이었다며 나를 토닥인다.      


그렇게 숱한 떡볶이들을 먹었다. 떡볶이들 덕분에 조금 덜 울고, 덜 상처받고, 덜 아프게 어찌어찌 여기까지 왔다. 학부모가 교실에 찾아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삿대질 해댔던 날, 아이가 반에서 큰 싸움을 하는 바람에 학교에 불려가 죄송합니다며 고개를 열 번쯤 숙였던 날도 떡볶이를 사다 먹었다. 직장에서 억울하게 일을 당해도 실단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끙끙 앓다가 일어나 앉아 떡볶이를 먹었고, 아이의 발달이 온전치 못하다는 의사의 영혼 없는 진단을 듣고 온 날도 떡볶이가 사다 달라고 남편을 졸랐다. 울지 않으려 떡볶이를 먹었다. 떡을 씹으며 눈물을 삼켰다. 먹지 않으면 우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우는 건 혼자 몰래 해야 하는데, 떡볶이는 아이들과 함께 웃으며 할 수 있다. 예정에 없던 떡볶이 파티에 철없는 아이들은 신이 난다. 속 모르는 남편은 좋지도 않은 음식을 뭘 그렇게 자주 먹냐며 핀잔을 준다. 상한 속을 털어놓는 대신 떡볶이를 옆에 앉혀 떡볶이를 권한다. 콧물을 닦아가며 함께 먹는다. 안 먹을 것처럼 그러더니 많이도 먹는다. 남편에게도 다 말하기 어려운 복잡하고 쓰린 속이지만 이렇게 함께 먹어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다음엔 1인분 더 사야겠다며 아쉬운 파티가 끝난다.      


힘들 일은 매일 있다. 아무렴 어떤가. 내겐 떡볶이가 있다.      



더 깊은 이야기, 영상에서 만나요. 

유튜브 [이은경TV] 

https://www.youtube.com/channel/UCwBfDJmnPe-dP5dsHNTm17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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