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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경 Jun 09. 2019

층간소음과 롤케이크

나는 이제 진정한 갑질을 시작할 것이다

여기가 천국이구나. 

눈물이 났다. 거실의 소파에 편안하고 깊숙이 몸을 뉘었다. 이제 아이들을 따라다니며 뛰지 말라고 잔소리를 해대거나, 일찍 재우기 위해 초저녁부터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이제 난 자유다. 새로 이사 온 나의 천국은 301동 103호. 여기 우리 집이다. 천국에서는 늦잠을 잘 수도 있고 하루 종일 집 안에 있어도 된다. 아이들이 무얼 하건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집 안에서 공을 차거나 이불 위에서 레슬링 하는 걸 보며 그저 깔깔 웃기만 하면 된다. 난 지금 5년째 천국 살이 중이다.      


꼬박 2년을 지옥에서 살았다. 지옥에서 토요일 아침 늦잠은 사치였다. 눈을 뜨면 세수도 못하고 빈속으로 나서야 했다. 아래층 아주머니는 평일, 주말 가릴 것 없이 하루 종일 집을 지키는 우울증 환자였다. 조금 굼뜨게 준비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인터폰과 핸드폰이 울려댔다. 정신없이 싸들고 나간 볶음밥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공원으로 놀이터로 옮겨 다니며 금쪽같은 주말을 보냈다. 그게 힘들어 단독 주택인 시댁도 자주 갔다. 늦은 밤이 되어 차에서 잠든 아이들을 조심조심 안고 올라와 침대에 누이면 하루가 끝났다. 평일도 서럽긴 마찬가지였다. 퇴근길에 어린이집에 들러 아이들을 데리고 왔지만 집에 들어갈 순 없었다. 아이들이 배고프고 지칠 때까지 간식으로 연명하며 놀이터를 배회했다. 출근할 때 입고 나선 불편한 복장으로 놀이터를 지켰다. 아이들만 두고 자리를 비우는 게 불안했던 엄마는 옷 갈아입으러 잠시 집에 올라갔다오는 시간도 부담스러웠다. 블라우스에 스커트를 입고 놀이터에 앉아있는 저 아줌마 뭐지 하는 덜떪한 시선은 익숙했다. 지금 같으면 스마트폰이 있어 덜 지루했을 텐데 수다 떨 동네 친구 하나 없던 나는 그 시간이 참 길게 느껴졌다. 퇴근길에 사 들고 온 빵을 씹으며 놀이터가 부서져라 날뛰는 아이들을 보며 아들을 키운다는 것이 절절히 실감하고 있었다. 딸 엄마는 싱크대 밑에서 죽고, 아들 엄마는 길바닥에서 죽는다던데 이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닌 건 알지만 어쨌건 길바닥에서 죽게 생긴 건 마찬가지였다.



지옥을 탈출해보려 많은 노력을 했다. 케이크를 살 땐 꼭 두 개를 샀고 명절 때면 과일 상자를 챙겼다. 좋은걸 선물받으면 안 쓰고 잘 뒀다가 아이를 앞세워 아래층으로 갔다. 그렇게 하면 지옥도 그런대로 지낼만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신경질적인 얼굴로 그것들을 들고 들어가던 아줌마의 모습에 아이는 다시는 같이 가지 않겠다 했다. 아줌마의 인내심도 나의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일상도 한계에 다다랐다. 우리는 계획에 없던 집을 사기로 했다. 홧김에 집을 사기로 했다. 홧김에 사는 것 치고는 덩어리가 좀 컸지만 그만큼 절실했다. 그것도 모두가 말리는 1층집을. 매매 계약을 하고 이사를 준비하던 중 전화를 한 통 받았다. ‘층간소음분쟁조정위원회’에서 우리 아래층의 신고를 받았다며 상담 전화를 하신 거다. 내가 우울증이 심할 땐 이도 저도 아무것에도 의욕이 없던데 어째 아래층 아줌마는 매사 적극적이시다. 인자하고 차분한 음성으로 내 얘기에 귀기울여주시는 상담 직원에게 심하게 수다를 펼쳤다. 우리 가족들이 얼마나 조심하고 지내는지, 거실 전체를 도배한 층간소음 매트가 무려 80만 원어치라는 것과 아래층에 가져다 드린 음식 종류까지. 방언이 터졌다. ‘그 분도 굉장히 힘든 직업을 가졌구나’ 라는 생각은 한참 뒤에야 들었다. 이사 예정이라는 나의 말에 안심하시길래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훈훈하게 통화를 마무리했다.      




아이들이 집 안에서 편히 걷고 뛰고 놀기만 하면 소원이 없겠다는 마음 하나만으로 선택한 집이었는데 뜻밖의 기분 좋은 일이 하나 더해졌다. 처음으로 ‘갑질’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내가 갑이라는 건 1층에 이사 간 첫 날, 바로 알게 됐다. 어수선한 집을 정리하고 있는데 벨이 울린다. 딱 우리 애들 만한 남매를 앞세운 서글서글한 인상의 위층 아줌마였다. 

“안녕하세요, 위층에 살고 있어요. 오늘 이사 오셨죠? 저희 아들이 여섯 살이에요. 조심시킨다고 하는데 남자아이라 어렵네요. 늦은 시간에 못 뛰게 하고 일찍 재울게요. 이해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윗집 엄마의 손에는 롤케이크가 들려 있었다. 언제나 사다 바치던 그 롤케이크를 내가 받게 된 것이다. 엄마들이 주고받은 롤케이크는 뭐랄까 갑과 을의 상징처럼 느껴졌다. 난 갑이 되어 있었고, 을에게 취할 태도를 결정할 선택권이 있었다.


“아이고, 아이고.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 애들 보세요. 저희 애들 뛰는 소리에 윗집 소리 들릴 새 없어요. 걱정하지 말고 괜히 애 혼내지 마세요. 저희도 다 겪어봤어요. 애가 무슨 죄에요. 밝게 키워야지요. 앞으로는 이런 거 안 주셔도 되니까 맘 편하게 지내세요.” 

처음 보는 엄마 앞에서 또 방언이 터졌다. 그렇게 우리는 친해졌고 나의 천국을 부러워하던 윗집은 전세 만기를 기다려 1층집을 매매하여 이사 갔다. 그들도 우리처럼 천국에 입주한 것이다. 그 뒤로 두 집이 더 이사 왔고 나는 똑같은 방언을 하며 갑질을 즐기고 있다. 세 번째 윗집인 지금 가족은 고만고만한 아이가 셋인 것이 범죄라도 되는 양 멀리서도 나를 보기만 하면 고개부터 숙인다. 

“많이 시끄러우시죠. 죄송해요.”

냉동실에 있던 거라며 만두 한 팩을 들고 온 애기 엄마를 보며 눈물이 났다. 아이를 셋이나 낳아 바지런하게 키우느라 고생하는 아기 엄마가 왜 죄인처럼 고개를 숙여야 할까. 나도 예전에 저런 표정과 모습이었겠구나. 그 모습이 짠하여 자꾸 눈물이 나, 서둘러 올려 보냈다.      




이제 난 진정한 갑질을 시작하겠다. 

‘아기 엄마 힘내요’라고 예쁜 손글씨 메모를 붙인 케잌을 윗집 현관 앞에 살짝 가져다 두련다. ‘우리는 정말 괜찮으니 집에서 아이들 잔소리 하지 말고 편하게 지내요’ 라고도 쓸 거다. 이른 아침부터 콩콩 뛰어대는 세 명의 아이들 때문에 실은 그다지 괜찮지 않지만, 이 갑질을 즐기기 위해 괜찮은 사람이 될 거다. 위층 아기 엄마와 그녀의 사랑스러운 세 아이에게 세상은 따뜻하고 이해받을 수 있는 곳이라는 걸 똑똑히 느끼게 해 주려 한다. 


그 동안 매거진에 보내주신 사랑과 응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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