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원의 스펙트럼 1 -Scenery
6. 토고의 흙길과 가축과 아이
가나는 유쾌했다. 열대과일을 실컷 먹었고 친근한 사람들과 사진도 많이 찍었다. 우리는 가나를 거쳐 토고에 도착했다. 가나만 하더라도 대부분 아스팔트 길이었는데, 토고는 온통 빨간 흙 길이었다. 도시 한복판엔 큰강이 있었는데, 아낙들은 그곳에서 빨래를 하고 아이들이 수영을 하던 그 강은 전체가 쓰레기로 뒤덮혀 있었다. 거길 차로 지날 때 마다 오수의 냄새로 정말 숨 쉬기가 힘들 정도였다. 숙소 근처, 그 흙길에 가축들이 돌아다니며 온갖 배변과 쓰레기가 흙과 뒤섞여있었는데 거기엔 사람의 아이도 함께 뒹굴고 있었다.
7. 호객하지 않는 좌판
잘못된 인식이 생길까 봐 조심히 쓰는 부분이지만, 처음 가 본 아프리카의 느낌은 우리가 미디어에서 보는 잘못된 원시부족 같이 현대 문물이 없는 그런 극단적인 상황은 결코 아니었다. 아프리카 대륙의 각 국가들은 각각의 개발 정도나 빈부격차가 매우 심한 편이라 '아프리카'라고 하나로 묶어서 생각하는 것도 잘못된 거라는 걸 알게 되었다. 우리가 처음 도착한 가나의 공항에서는 시외버스 터미널 느낌을 받았다면, 토고를 거쳐 이동한 탄자니아 공항에서는 얼핏 미국 공항의 느낌을 받았다. 미국 어느 공항과 비슷한 냄새를 맡았던 것 같기도 하고.
분명, 우리가 TV에서 보는 원시 수준이 아니며, 개발도상국으로 봐야 하는 것이 맞는데 내가 정말 이해가 안 갔던 것은, 숙소에서 처음 나와서 본 그 길거리에서는 좌판을 여는 상인들이 호객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왜 그런지 가이드분께 여쭤봤더니 저 사람들은 태어나서 본 게 저렇게 좌판을 열고 있는 모습뿐이라, 그저 부모를 따라 좌판을 열고만 있는 거라고. 충격이었다. 정말로, 어느 아이 엄마는 갓난아이를 데리고 좌판 위에 그저 앉아만 있었다.
8. 내 위치, 가고 싶은 곳의 좌표의 중요성.
한국전쟁 후 우리나라 GDP가 아프리카 어느 국가와 맞먹었다고 했는데, 만약 우리가 경제성장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저 모습과 비슷했을 거라 생각하니 정말 오싹해지면서 동시에, 왜 그 격차를 만들었을까를 생각하게 되었었다.
아프리카는, 정확히 내가 갔던 토고 어느 인가의 상황에서는. 이들이 외국 매체를 접할 경로가 없다는 것이었다. TV나 핸드폰(2009년은 스마트폰 보급이 이제 막 시작되는 때였다)이 없더라도, 신문의 값은 굉장히 저렴하기 때문에 누구나 접할 수 있는 언론매체라 여겼었는데 거기선 그마저도 아니었다.
그 당시의 내가 이곳에는 언론사가 없는지에 대한 질문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신문이 보급되면 이들의 삶이 나아질 거라 확신했다. 우리와 우리의 차이를 만든 건 바로 정신적 ‘지향점’을 만들게 한 것과 동시에 우리의 현재 상황을 알 수 있게끔 하는 ‘인지’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해외 다른 국가들이 얼마나 잘 살고 있고, 상대적으로 우리가 얼마나 열악한 위치에 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잘 살아보세’ 새마을 운동이 먹혔고 그 열망에 따라 목표를 이룩한 것이리라 19살의 나는 생각했다. 나는 이때 오래도록 예체능만 하다가 뒤늦게 공부를 시작했고 대학 입시를 앞두고 인문계열의 학부 과를 정하려니 도저히 방향성이 정해지지 않아 큰 고민을 안고 있었다. 그러던 내가 얼마 하지 않는 신문이라도 이들이 보면 생각과 목표가 달라지겠지? 란 생각으로 나중에 재단 만들어 여기에서 언론사를 만들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려면 사업을 해야겠다며 상경계열로 틀었던 계기가 되었다. 지금은 참 그때 용감했고 멋졌구나 라며 가끔 기억하는 소중한 터닝포인트이며, 훗날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단 생각을 해본다.
9. 인생의 지도
또한 저 때의 생각은 스스로에 대한 ‘인지’와 가고자 하는 정확한 ‘지점’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깨달았던 경험이기도 하다. 그리고 문득 생각난 것은 내 별명은 김네비게이션이다. 처음 가는 곳도 지도만 있으면 척척 알아서 간다. 어느 해외를 혼자 여행해도 구글 지도만 있으면 되는데 길을 잃지 않는 나만의 방법은 ‘내 위치와 가야 할 곳의 방향을 아는 것’이다. 뭔가 인생에서 길을 잃지 않는 방법도 이와 비슷할 거라 문득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