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인간의 존재 이유와 목적을 찾아가는 여정
친구는 신과의 계약 만료로 떠나간 것일까?
인간은 언제나 보이지 않는 ‘계약’이라는 사슬에 묶여 있다. 임대차계약, 자동차 구매계약, 대출계약, 근로계약 등 서면으로 명시된 계약도 있지만, 친구 사이의 약속처럼 구두로 성립되는 계약도 있다. 강제냐 자율이냐는 계약의 내용에 달려 있다. 거슬러 올라가면, 자연권을 위해 정부를 설립하고 제한된 권력을 부여하거나(로크), 모든 권리를 공동체에 이양하되 공동의 일반 의지에 따라 행동한다거나(루소),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등(밀) 논의가 있었지만, 결국 개인의 안전과 자유를 위한 상호 간의 사회계약은 불가피했다. 어디까지나 살기 위한 최소한의 방비일지라도.
데카르트가 신의 존재를 증명했으니, 이어서 이야기해 보자. 인간 개개인은 세상에 태어났다. 사르트르의 말처럼 그냥 세상에 던져졌다는 것은 어쩌면 계약 내용을 잊었거나 알 수 없기 때문에, 생의 지난한 고민 끝에 내린 한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역시 인생의 의미를 찾으라고 했듯, 계약 또는 사명을 찾고 이행하는 과정이 비로소 삶일 것이다. 인간은 계약을 맺고 지키기 위해 태어났다.
나는 신과 계약하고 태어났다, 부모님의 자식으로.
나는 너와 만나 계약했다, 사귀기로, 결혼하기로.
아이는 태어났다, 우리의 자식으로. 아이는 신과 계약하고 태어남과 동시에, 신은 우리와 계약했다.
아이를 간절히 원했던 소망, 그 열렬한 사랑의 결실은 신의 귀에 가닿았다. 이제 우리의 사랑이 넘쳐흘러 아이를 키울 준비가 되었다고 기도했다.
우리는 건방졌다.
무서운 거래였다. 신은 철저히 계산적이었다. 신은 담보를 요구했다. 아내는 회사를 그만두었다. 함께 살던 짧은 신혼생활은 기나긴 주말부부로 바뀌었다. 신은 나의 주재원 근무 시작과 함께 사랑스러운 아이를 보내주었다. 아내 홀로 핏덩이를 키웠다. 나 역시 무리해서 한 달에 한 번 들어왔다. 신은 묻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이를 원하느냐’고. 분명 신은 미래를 봤을 테지만, 우리는 알지 못했다. 유난히 까탈스러운 아이는 밤마다 목청껏 울었다. 참다못한 이웃집 어르신이 새벽에 초인종을 눌렀단다. 홀로 울던 아내는 묵묵히 견뎌냈다. 육아에 가장 힘든 시절, 단신부임으로 해외에 나갔던 나는 평생 죄인이 되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이제 아이와 둘이 서울 여행을 한다. 기차를 타고 코엑스에 가서 전시회를 구경하고, 월드타워 122층에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고 놀이공원 주변 캐릭터샵에서 아이가 좋아하는 캐릭터 저금통을 사준다. 우유부단한 아빠는 ‘삼촌’과 ‘형’ 사이를 오가며 아이에게 끌려가면서도 마냥 귀엽단다. 아이의 말 한마디 놓칠세라 귀담아듣는다. 평소 찍지 않는 사진도 많이 남긴다. ‘잘 컸구나. 아내가 정말 고생했구나’
아마 신은 내가 못 미더웠지만 아내를 훈련하여 ‘엄마’로 만들었으리라. 계약대로.
내가 서명한 계약서의 내용은 알 수 없다. 하지만 태어난 이후, 숨 쉬며 행하는 모든 것은 나의 행위다. 때로는 작위적이고, 때로는 무작위적이다. 책을 통해 수많은 선배들의 사유를 답습하거나 내 생각을 더하여 ‘계약 목적과 대상’을 찾아간다. 이것이 분명 내 ‘삶의 목적과 이유’ 일 것이다. 계약서 위에는 나의 목적과 목표, 주위 관계의 목적과 목표, 세상에 대한 역할이 적혀있을 테다.
이기적 유전자를 믿는가? 인간 유기체를 DNA의 보존 본능을 위한 생존기계로 보는 시각은 지극히 잔인하다. 아이를 낳고 다시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성인이 되도록 키우는 것이 끝이라면 이미 난 더 이상 살 이유가 없다. DNA의 목적이 명백할지언정 그것은 인생의 부수적 목표일 뿐, 유기체로서의 지속가능한 삶은 기실 보장되고 있다. 모두에게 생명 연장의 욕구도 존재하지 않는가? 과연, 산소를 태우며 유용한 에너지를 소비하여 세상의 엔트로피를 높이는 것이 인간의 존재 이유일까? 만약, 어마어마한 확률로 별 가루를 모아 인간을 만들어낸 이유가 단지 그뿐이라면 신나게 놀고먹고 쓰면서 하루빨리 우주를 평형상태에 이르게 하는 것이 소명일 테다.
과학이 믿음의 영역은 아니지만 딱 논란의 여지만큼 믿음이 개입할 수 있다면, 우리를 DNA의 생존기계라고 믿을 텐가?
아직 살아온 만큼 더 살 수 있다고 믿는 나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다.
그렇다면, 삶의 목적과 이유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무언가를 마주칠 때, 문득 마음에 울림이 있을 때. 그 울림은 계약 당시의 표출한 내심과 일치하여 보강간섭을 일으킨다. 울림에 귀 기울이고 울림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바로 계약의 충실한 이행이다. 김 빠지지만, 마흔이 꺾이는 나이에서 도달한 중간 결과다. 모든 접촉에 우연이란 없다. 열린 기회가 있으니, 귀만 열면 된다.
시스템 생물학자이자 리처드 도킨스의 스승인, 옥스포드대 데니스 노블 교수의 편에 서고 싶다. 그는 2022년 리처드 도킨스와 직접 대담을 통해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도킨스의 권위를 무시하고 중립적으로 들어보자)
https://youtu.be/eNmzWRwJ-SI?si=D7Ca4aRzfWWasfeR
우리의 삶은 분자에 불과한 DNA가 아니라, 우리를 구성하는 유기체 전체, 시스템 전체로서 본인의 손에 달렸다.
Happiness is Togetherness!
https://www.fortune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31613
아이의 손을 잡고 아파트 단지 안을 걷는다. 허리춤까지 오는 작은 아이들이 올망졸망 재잘거리고 깔깔댄다. 삼삼오오 엄마들이 어깨를 부딪으며 식재료에 대해, 아이에 대해 소곤대며 지나간다. 덩치 큰 아저씨가 덩치 큰 골든 리트리버에게 끌려간다. 아이는 예뻐라 한다. 입추가 지나고 해가 저무니 자못 선선한 바람이 살랑인다.
모든 풍경이 정겹다. 가족을 위해, 아이들을 위해, 세상을 위해 내 심장은 요동친다.
친구여,
우리 언제 다시 만나면 좋겠구나.
내가 부지런히 살 테니.
친구여,
생의 목적을 미리 완수하여 웃으며 갔으니 먼저 감을 아쉬워하지 않으리.
내가 미처 이루지 못함을 부끄러워할 뿐.
친구여,
만나지 못하면 날 탓하게나.
그것은 내 카르마 탓이니.
그럼, 안녕히.
<그런나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