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963 일머리는 와우가 잡아줬다

블리자드 정신차렷

by Noname

어린 시절 문제집을 풀때

목차의 수를 세어서

하룻동안 풀 수 있는 양을 가늠하고 동그라미를 숫자만큼 그려놓고 포도알 체크를 했다


그래야 얼마나 더 해야하는지

하루가 미뤄졌어도 얼마 안에 끝낼 수 있는지

힘이 나니까


고등학생 때는 새마을운동에 감명을 받아 “이상아 계발 5개년 계획”과 같은 중장기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대학교 1학년 말

매일같이 놀던 나는

월드오브워크래프트, 즉 와우에 빠졌고

식음전폐, 잠도 안자고 게임하다가 7키로그램이 빠졌더랬다


게임을 한건 어쨌든 강력한 현실도피였지만

게임을 하면서 얻은게 참 많다


1. 일머리

- 소위 일퀘라는 것이 있는데 일단위로 해야하는 과제라고 볼 수 있다. RPG게임의 퀘스트 목록은 일단위, 능력치 올리기, 갑자기 만난 npc에게 받은 잡다한 퀘스트들로 채워졌고, 중요한 퀘스트는 구분 되어 상위 노출된다. 완료한 퀘스트와 진행중인 퀘스트, 받기만 한 퀘스트로도 구분이 된다.

- 이 퀘스트들은 주로 위치 중심으로 밀집하거나 npc의 위치에 따라 그룹핑을 해서 수행하면 효과적이다.

- 지도가 넓으니 그만큼 이동시간이 게임플레이의 많은 시간을 차지했고, 가급적 한번에 해결하려고 머리를 정말 많이 굴렸다.

- 유사 퀘스트, npc가 같은 경우 역시 동선을 줄이기 위해 난이도 낮은 것부터 높은 것, 좋은 아이템을 주는 것과 ROI 낮은것을 구분하고, 가급적 우선 좋은 템을 얻은 후, 능력치를 올려서 더 효율적으로 처리하고자 했다.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정말 신기할 정도로 일머리가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정신산만한 폴더만큼 그들의 머리속도 얼마나 복잡할까 싶다가 문득,


“자네 게임 한 번 해보지 않겠나.”

하고 권하고 싶어진다. 비슷한 유형의 일을 구분하거나 한번에 처리가능한 일, 우선순위 등을 정하지 못해서 그런 경우가 발생한다.


나는 운이 좋게도 첫 회사의 작업관리 시스템이 퀘스트로 나뉘어져있었고, 정말 게임하듯 일을 했으니, 정말 게임하길 잘했다


2. 사교성과 커뮤니티 운영

- 사실 그때만해도 여성유저가 적었던 때라 어딜가든 환영 받았다. 딱히 리더십이 없어도 길드의 마스코트처럼 쉽게 운영진을 맡을 수 있었다

- 그때 카페를 운영하는 방법을 알게되었고, 온라인에서나마 사람들을 도와주면서 신속•부정확•친절을 골자로 어쨌든 다른 초보 유저들을 도와 길드로 영입시키곤 했다


3. 얼떨결에 전사, 눈떠보니 리딩

- 의도치 않게 나의 메인캐릭의 직업은 전사였다. 처음엔 힐러친구가 무조건 전사하래서 한 것이었는데, 피통이 작은 언데드여전사였니…

- 그땐 몰랐는데 전사가 정말 귀했다. 스스로 자생할 수 있는 성기사나 드루이드와 같은 직업, 법사나 흑마 처럼 앞에 나서지 않고, 라면 먹으면서 할 수 있는 직업이 인기가 많았다

- 레이드가 생기기 전에 인던 리딩을 할 전사를 구하는 메시지가 수도 없이 공개채팅에 올라왔다. 본의 아니게 리딩을 여러번 했고, 본의 아니게 사람들을 챙기고 흐름을 읽어야하니, 자연스럽게 아기자기한 리더십이 키워졌다

-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선넘으면 짤 없지만… 당시 불평불만만 하고 아이템만 줍줍하던 흑마를 가만두지 않았던 기억이… 나머지는 상상…


4. 미리 경험한 메타버스

- 나에게 게임을 같이하자고한 친구는 나와 적대 진영이었다. 얼라이언스라고 말을 안해주니 나는 당연히 호드를 선택했지 ㅋㅋ

- 그 친구는 피케이로 호드를 많이 죽이고 다녀서 유명했는데, 그때 호드 진영에서 유일하게 레어템 도끼를 만들 수 있었다. 얼라에선 아직 도면이 발견되기 전이었고, 그 도끼에 몇번 죽은 친구는 내게 밀거래를 요청했다

- 당시 아무 개념 없던 나는 흔쾌히 경매장을 통해 도끼를 넘겨줬고, 그때 인벤이 터졌다. 대체 누가 도끼를 건넨거냐부터 감정이입이 극에 치달에 결국 친구는 게임을 관뒀다


5. 산행의 시작

-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운동을 싫어했다. 아예 관심도 없었다. 근데 와우를 하면서 동선을 줄이고자 오그리마 계곡의 어느 틈새를 발견해서 최단 거리로 이동할 수 있는 길을 찾아냈고, 그 뒤로 탐험은 계속 됐다. 그리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게 그렇게 실감이 나서 많이도 뛰어내렸고, 수영을 해서 바다 건너 얼라이언스 동네에 간 적도 있다.

- 학교와 가족들의 간곡한 당부에 의해, 그리고 당시 군대간 남자친구의 전화를 게임하다가 대충 받아 차이고 난 뒤에 정신차리고 나니, 나는 실제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 물론 지금도 요리를 한다거나 약초를 캔다거나 하지는 않지만, 산행을 할땐 와우하던 시절과 영화 아바타를 떠올리곤 한다


삶의 모든 경험은 다 이유가 있다는게 실감 나는 이야기다

역시, 메타버스, 가상현실이 가져올 순기능과 역기능을 맛보기식으로 체험한 것 역시, 다가올 미래의 문제점을 윤리적 관점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도 다 게임을 해본 덕이다.


여러분 게임 중독은 위험하지만

인생을 낭비한다 생각하지 마시고

뭐라도 배우고 있구나하고 믿어주세요


얼른 배우고 관두면 좋겠지만

그만큼 뭔가 회피동기가 있는 것일 수도 있으니

이해해줍시다

믿어주다보면 알아서 제 할일 하지 않을까요

세계 게임 챔피언이 될 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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