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필요가 없는 고민을 만들지 않아야 한다.
외국 출장지에서의 일이다. 휴일 오후 나는 신발 가게에서 상품을 결제하기 위해 계산대에 섰다. 카운터에는 젊은 남자 직원 세명이 있었다. 그들은 내가 고른 신발 바코드를 찍으며 갑자기 말을 걸었다.
"너 혹시 피자도 살래?"
"뭐라고?"
"피자 말이야."
"뭐? 어떤 거?"
"피자. 피-자."
자기들끼리 웃고 떠들던 그들은 이내 남는 영수증 뒷면을 이용해 피자를 그리기 시작했다. 신발만 파는 가게였다. 나는 설마 내가 잘못 들었나 생각해서 수차례 되물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정말 피자를 얘기했다.
"먹는 피자구나. 관심 없어."
대답은 쿨하게 하고 나왔지만 물건을 들고 돌아가는 길 마음이 무거웠다.
신발가게 점원들은 왜 내게 피자도 살 거냐고 물어본 것일까?
가족들과, 직장의 동료들과 위 일화를 같이 논의했다. 내가 기분 나쁜 게 온당한 건지, 아니면 괜히 내가 민감하게 반응하는 건지 고민했다. 일부는 지나가는 농담이었을 것이라 했고 일부는 (동양인은 영어를 못할 것이라는 편견에 기반한) 인종적인 차별이 내재된 것이겠지만 그러려니 참으라 했다.
며칠 뒤 운전을 하며 어딘가로 가던 길이었다. 문득 저 일화가 다시 떠올랐고 내가 영어를 좀 더 잘했다면 따졌을 대화의 흐름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응. 피자라고 알아들었어. 하지만 신발 파는 가게에서 갑자기 피자라는 단어가 나와 아리송했을 뿐이야. 너희들은 왜 내게 그런 말을 한 걸까? 첫째, 너희끼리 시켜먹은 피자가 있는데 남아서 그걸 나더러 살 거냐고 묻는 농담이었을 수 있어. 식어버린 피자를 먹는 사람으로 날 봤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둘째, 내가 동양인이라고 그런 짓궂은 농담을 던진 것일 수도 있어. 인종 차별적인 발언이지. 어떤 경우든 너희끼리 지금 시시덕 거리는 상황이 난 상당히 언짢은데 이 이야기를 너네 매니저나 본사에 전달을 해도 될까?"
그들의 대답은 뻔할 것이다. "오, 미안해. 정말 장난이었어. 기분 나빴다면 사과할게."정도의 말 밖에는 할 수 없는 상황이다. 가상의 대화였지만 일견 통쾌해지려던 찰나, 문득 어떤 생각이 들었다.
왜 내가 굳이 이런 생각까지 해야 하는 것일까?
나는 물건을 사러 간 것인데, 물건과 전혀 연관 없는 고민에 시간과 에너지를 뺏겼다. 직장에서 적합하지 않은 대화는 바로 이런 것을 일컫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굳이 할 필요가 없는 고민이나 생각을 하게 만드는 대화 말이다. (사회로 범위를 넓히고 싶지만 '명확한 목적'을 벗어나는 것을 정의 내리기는 직장이 더 적합하다.)
직장 생활에서 문제가 되는 폭언과 성희롱도 이것과 연관해서 설명할 수 있다. 직장은 일을 하기 위해 모인 곳이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적합한 일을 정의하고, 그것을 요청하고, 그에 대응한 결과물을 제출하면 된다. 영업은 새롭게 일을 따오는 것이고, 지원은 그 일이 되게끔 처리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가치중립적인 업무 지시 이외에 아래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될 때가 있다. 이런 경우를 폭언이라 정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왜 저 사람은 말을 저런 식으로 하지? 나를 싫어하나?"
"오늘 저 사람 안 좋은 일이 있었나?"
"자기 일인데 나한테 떠 넘기는 건가?"
"내가 왜 이런 소리까지 들어가며 일을 해야 하지?"
업무를 하기 위해 모인 공간에서 아래와 같은 생각이 든다면 그게 곧 직장 내 성희롱이다.
"왜 업무 지침을 받는데 (성적으로) 기분이 나쁘지?"
"왜 꼭 저런 (성적인) 대화를 붙여서 얘기를 하는 거지?"
"왜 지금 바로 업무 얘기를 않고 따로 보자는 거지?"
"이거(일)랑 그게(외모 등) 무슨 상관이지?"
A라는 업무가 필요하면 그에 대한 이야기만 하면 된다. 적어도 직장은 그런 곳이다. A라는 업무를 B라는 사람에게 C라는 시간까지 D에게 보고하라면 지시는 끝난다. 문장을 구성하는 6하 원칙처럼 업무 지시라는 것도 중립적으로 보자면 그렇다. 하지만 일상에서는 너무도 많이 그 밖의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1) 직장은 사람이 모인 곳이다.
사람은 감정적인 동물이다. 그래서 때로는 권위를 나타내고 싶어 하기도 하고, 자신의 기분을 바깥으로 표출하기도 한다. 이해는 하지만 그것이 직장에서 반드시 받아들여야만 하는 요소라고 인정할 수는 없다. 직장은 일을 하는 장소이고, 일이 굴러가게끔 하는 용처로만 저 문장을 인용할 수 있을 따름이다.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므로 업무 지시를 할 때 좀 더 부드러운 말투를 쓴다든지, 꾸짖을 때 칭찬을 먼저 하고 비평을 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개인의 감정, 개인의 권위의식 등 때문에 일이 흘러가는 것 자체에 잡음을 일으킨다면 이는 주객이 전도된 것이고 개선해야 할 사항일 뿐이다.
2) 중립적으로 일하는 방법을 모른다.
영화 '머니볼'에서 흥미로운 장면이 나온다. 어떤 선수를 타 구단으로 내보내야 하는 상황을 그리는데, 첫 임무라 겁을 내는 화자와 달리 '내일 짐 싸라'는 말을 들은 선수는 쿨하게 '오케이'하고 만다. 일이란 그런 것이다. 호오가 배제된 것이 일의 성격이다. 일에 호오를 개입시키는 것은 사람이다.
어떤 업무가 필요한지. 그 결과물이 잘되었는지 못되었는지만 판단하면 된다. 하지만 우리 사회 대부분은 이를 사람과 연관해서 말을 한다. 그래서 누가 일을 잘해. 이래서 누구는 안돼. 하는 것은 업무와는 상관없는 개인의 감정이다. (다들 판단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감정에 가깝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말은 때로 유용하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이 말은 종종 와전되어 이해되거나 불필요한 부분으로까지 과용된다.
1) '황금률'은 언제나 황금률이다.
내가 싫은 일을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 황금률은 어디나 적용할 수 있는 법칙이다. 내가 그 질문을 받았을 때 기분이 나쁠 것 같은 말은 안 하는 게 낫다. 업무지시를 하라. 그러나 그 외의 말을 덧붙이려면 먼저 내 입장에서 한번 미루어 보라.
2) '아'다르고 '어'다르다.
'주말 잘 보냈어?'라는 질문과 '주말 애인 만나서 뭐했어?'하는 질문은 다르다. 하지만 이 다름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오죽하면 인터넷에 회사에서 해도 되는 말 vs 하면 안 되는 말을 나열식으로 설명하는 글들이 생겨날까?
어투에 따른 느낌도 다르다. 금요일에 업무 지시를 해 놓고 월요일에 결과물을 찾으면서 '주말에 뭐했어?'하는 말과 '오늘 늦게까지라도 가능할까?'라는 말은 청자에게 다가가는 효과가 천지차이다. 대부분은 그 차이를 모른다. 그 차이를 모르는 것은 오직 화자의 기분만 생각하는 데서 비롯하는 경우가 많다.
3) 봤으면 행하라.
미드가 유행이다. 외국의 회사 문화가 여러 드라마에 녹아있다. 우리는 부러워한다. 잠들기 전 인터넷 서핑을 하며 보는 문화 개선 이야기들을 본다. 우리는 또 부러워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다음날 출근해 마주한 현실 앞에서 한숨만 내쉴 뿐 현실을 고치려 들지 않는다. 내가 늘 주장하는 것은 회의 시간에 발언하기다. 발언을 함으로써 미드를 보는, 인터넷에서 나은 문화를 더 접하는 사람들이 차지하는 공간을 늘려야 한다. 회사 문화를 바꾸려면 우선 좋은 사람들로 핵심부를 채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좋게 바꾸려는 사람 자체가 늘어야 한다.
https://brunch.co.kr/@crispwatch/48
하지만 위의 방안들은 모두 피상적이라는 단점이 있다. 대부분 말투에 국한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 갖는 효과도 무시할 수 없다. 말투라도 중립적이 되면 청자의 스트레스는 줄어든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있을 뿐, 그의 속마음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질이 바뀌려면 가치관이 움직여야 한다. 회사가 객관적인 언어뿐만 아니라 객관적인 사고로 채워질 수 있으려면 회사와 직원, 상사와 부하직원 간 대등한 계약 관계라는 인식이 자리 잡아야 한다.
https://brunch.co.kr/@crispwatch/46
가치관이 바뀌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부러워하는 문화를 가진 나라를 보라. 백 년 전의 그들 모습이 지금과 같지 않은 경우가 많다. 우리가 변화하는 것은 백 년이 채 걸리지 않을 것이다. 다행히 세상이 변하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조직은 순식간에 망하고 만다는 사실도 경각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더 나은 세상이 되길 바라며, 오늘도 모든 직장인들의 파이팅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