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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스 생활

왜 그랬을까요?

by 꾸도키

외벌이일 때는 남편의 퇴근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하루는 남편의 퇴근 시간에 맞춰 제가 좋아하는 '육대장' 음식점에 갔습니다. 큰 아이가 4살이었고, 작은 아이는 2살이었을 때네요. 저는 그 때 밥을 조그만한 락앤락 통에 담아서 갔습니다. 밥값 1000원을 아끼기 위해서였지요. 그때, 식당 아주머니가 뭐라고 하실까봐 편안하게 밥을 먹지 못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 부분만 보면, 정말 알뜰하게 잘 살았구나! 라고 칭찬해주고 싶겠지만, 전혀 다른 이면이 있었습니다. 알뜰하게 중고 용품을 많이 샀습니다. 돈은 없더라도 아이들을 잘 가르치고 싶었습니다. 아! 이때 책을 좀 읽었더라면요! 안타깝게도 저는 장난감 회사들이 딱 좋아하는 유행형 엄마였습니다. 그리고 유아 출판사들이 좋아하는 엄마였지요. 아이를 위해서 좋다는 책은 다 구입했습니다. 돈이 모자라 그 책을 못 사주면 하루 종일 그 책이 아른거렸습니다. 새것 같은 중고를 사기 위해 밤에도 잠자지 않고 노력했습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큰아이가 5살이 되었습니다. 왜 그때는 유치원에 가야지만 훌륭한 사람이 되는 줄 알았을까요? 동네 친구와 함께 좋은 동네 유치원에 갔지만, 열혈 엄마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더 비싸고 더 좋은 사설 유치원으로 6개월 뒤 옮깁니다. 아 글을 쓰면서 화가 넘어 옵니다. 저에게 등짝 스매싱을 좀 날리고 오겠습니다.


저희는 작은 개척교회를 섬기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을 좋아해서 그 당시 8명이 탈 수 있는 '카렌스 2' 차량을 구입했습니다. 그리고 매주 저희집에서 모임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한꺼번에 이는 짜파게티가 한강물처럼 되어서 아이들이 뭐라고 했던 적이 기억에 남습니다. 다만, 신용카드 금액은 저희의 월급 수준을 한참 넘기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하루에 왕복 100K 거리에 있는 회사로 출퇴근했지만 그때도 변함없이 공부를 하고 집에 늦게 들어왔습니다. 저도 예전 직업군을 바꿔보기 위해 사회복지사와 보육 교사 자격증 공부를 했었죠. 한마디로 저희 둘 다 공부를 했었네요. 그러다보니 저희는 마이너스 생활이 계속 되었습니다.


부모님께도 각 집에 용돈을 보내 드렸습니다. 그때는 그게 효도인 줄 알았습니다. 매달 50만원을 보내드리고 십일조와 카드값을 해결하고 나면, 다시 0원으로 출발하는 악순환이었습니다. 저희의 마이너스 통장은 점점 풍성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왜 이렇게 무지했을까요? 그래도 감사했던 건 저희는 행복했었다라는 사실입니다. 아파트가 재테크로는 별로였지만 살기는 매우 좋았습니다. 숲에 둘러싸여 있었고 정말 조용했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그 다음에 닥쳐올 일들을 알지 못했었지요.


사춘기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인트로가 전체 책의 반 이상이 되는 것 같습니다. 참 신기합니다. 학생때는 그렇게 글쓰기를 싫어했는데, 지금은 이 시간이 이렇게 즐겁다니요. 인생은 아이러니합니다. 또 10년 뒤에는 어떤 감정들을 느끼면서 글을 쓰고 있을까요? 작고 소소하지만, 2025년 7월 29일 지금의 저를 기록합니다. 그래서 감사합니다.

무열 아람이네-옛날사진-484450136.jpg 행복했었네요! 아직도 이 때의 귀여움으로 아이들을 바라봅니다.


다음 이야기는 제가 드디어 워킹맘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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