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깃집 식당 노동이 주는 선물
여기 고요한 호수가 있다.
바람 한 점 없고 떨어지는 낙엽 하나 없다. 잔잔히 이는 물결조차 없다. 돌멩이 하나 던져도 잠깐 일렁이고 다시 고요해진다. 호수처럼 살고 싶었다. 평정심을 원했다. 무념무상을 향해 명상수련을 했다. 마음수련 프로그램도 참여했다. 관련 책도 읽고 영상도 봤다. 평정심을 향한 다양한 도전과 활동을 통해서 얻은 것이 있다. '찰나'의 평점심은 가능하다, '영원'한 평정심은 불가능하다. 완벽한 평정심은 불가능하다. 평정심에 가까워지는 상태에 이르는 것은 가능하다. 훌륭한 분들은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불가능함을 얻었다. 물론, 속세의 인연을 끊고 산속이나 동굴에서 '도'를 닦고 '명상수련'을 한다면 다다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이들 셋 키우면서 자본주의 현실 사회에서 살아가면서는 불가능할 듯하다. 그래서 완벽하고 오랜 시간의 평정심을 추구하지 않는다. 뭔가 생각이 어지러우면 진정시키는 정도. 짜증과 화가 밀려오면 조금 누그러뜨리는 정도. 힘겨움이 짓누르는 느낌을 받으면, 좀 더 가벼워지는 정도. 이만큼도 좋다.
마음이 마음을 다스릴 수 없고, 생각이 생각을 물리칠 수 없다. 머릿속에 떠올려지는 온갖 염려, 걱정, 불안, 후회가 '멈춰!' 한다고 멈춰지지 않는다. '심장아 조금 느리게 뛰어주렴' 한다고 심장이 느리게 뛰어지지 않는다. 자기 조절과 통제가 안 되는 영역이 생각보다 많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자존심 강하고 자기 잘난 맛에 사는 나 같은 사람은 특히나 스스로가 스스로를 조절 통제해 왔다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 착각하고 있는 많은 것들을 착각이라고 하나하나 인정해 나가야 한다. 나이가 들수록 '운명'이니, '팔자'니 하는 말에 수긍하는 이유이다.
내가 '평정심'을 향해 한 발 한 발 나아가면서 가장 먼저 훈련한 것은 '알아 차림'이다. 호수에 떨어지는 낙엽하나 정도는 아니더라도, 돌멩이 정도는 떨어짐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한다. 내 안에서 일렁이는 감정이 어떤 생각에서 오는지를 먼저 알아차리는 것이 우선이다. 알아차림의 속도가 빨라지고, 알아차림의 민감도가 올라가야 평정심에 더 가까이 다가서는 듯하다.
그다음은 '행동'이다. 알아차리는 순간 뭔가 '행동'해야 한다. '행동'만이 변화를 만들 수 있다. '행동'하지 않고 그냥 생각을 바꾸는 시도나 마음을 진정시키는 노력은 효과적이지 않다. 화가 나는 순간, 물을 마시거나, 화장실 가서 세수를 하거나, 밖으로 나가서 100m 달리기를 전속력으로 한다거나. 뭐든 해야 전환이 빨라진다. 전환해야, 내 '화'가 어디에서 왔는지 들여다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여유가 생기면, '화'는 밖에서 오지 않고 내 안에서 왔음을 인정하는 것이 우선이다.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시간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일종의 자기 성찰이다. '생각 의자'에 앉아서 반성의 시간을 갖는 유치원생처럼 말이다. 성찰이던 반성이던 하면서 '문제는 문제가 아니고, 잘못됨은 잘못됨이 아니다'를 떠올린다. '우주 속 티끌' 같은 지구에 사는 티끌의 티끌만큼도 안 되는 나라는 존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먼지 티끌에 문제가 있으면 얼마나 있겠는가? 아무 의미도 없이 텅 비어 있는 삶에 대해, 소풍 왔다 가는 삶에 대해 잘못이 있으면 또 얼마나 큰 잘못이 있겠는가? 우주론과 인생무상론을 생각하면 '화'낼 일도 없고 '문제'될 것도 없다.
일상을 살면서, 내가 평정심에 가까워지는 시간이 있다. 그중 하나는 운동이다. 운동을 하면, 그나마 많은 생각이 조금씩 사라지는 경험을 한다. 운동 강도를 높이면, 머릿속 생각보다는 육체 곳곳의 아픔에 더 집중하게 된다. 달리기를 하다 보면, 팔뚝도 아팠다가, 종아리도 아팠다가, 허벅지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다. 아픈 몸에 집중하면서, 계속 달리다 보면, 땀이 나기 시작하고, 옷이 젖을 정도로 땀이 나면, 오히려 이제부터 몸이 더 가벼워진다. 5km를 넘어 10km까지 거뜬히 달릴 수 있을 것 같은 가벼움을 경험한다. 그 가벼움을 경험하면서 달리는 순간은 무념무상에 가까워진다. 과거에 대한 후회, 불안한 미래, 당장 닥친 현실의 고민들이 사라진다. 그저 더 달릴까? 말까? 하는 생각뿐이다. 또 평정심에 가까워지는 시간은 사우나, 반신욕을 할 때다. 물속에 있으면 몸도 마음도 편안하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눈을 지그시 감고 쇼팽의 녹턴을 듣는 순간은 안정감과 여유를 느낀다. 어제 최저매출을 기록한 쓰라린 기억도 잊히는 편안함을 경험한다.
고깃집 사장이 돼서 가장 좋은 점 중 하나는 돈 버는 노동을 하면서 '평정심'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이전의 나의 주 업무는 모두 사무적인 것이었다. 늘 노트북과 PC를 사용해서 문서 작성하고 PPT, 엑셀 등을 이용한 계획, 보고, 제안서 등이었다. 그리고 사람 만나서 제안하고 설득하고 설명하고 해명하는 것이 업무였다. 몸을 쓰는 일은 없었다. 나이 50 되도록 학창 시절 농활과 일명 '노가대' 아르바이트 외에는 몸을 쓰는 일을 해 본 적이 없다. 생존과 생계를 위한 육체노동을 한 적이 없다. 식당에서의 업무는 한마디로 모두 노동이다. 청소. 서빙. 설거지. 고기 굽기를 비롯한 모든 잡일이 노동이다. 노동을 하면서 '평정심'을 경험한다. 내가 경험해 보니, 노동을 평생 하시면서 '평정심'을 이야기하시던 장모님의 말씀이 가슴에 와닿는다.
"일 할 때가 제일루 좋네", "일 안 하면 뭐 한당가".
장모님은 허리가 굽어지고, 무릎이 닿도록 농사일을 하셨다. 일 좀 그만하라는 자식들 말을 절대 듣지 않으셨다. 허리수술, 무릎 수술을 하면서 걷지도 못하는 몸을 끌고서도 '밭 일'을 하셨다. "빨리 가서 00도 따고 00도 심고 00 약도 치고". 하룻밤 더 주무시고 가라는 자식들 말을 듣지 않고 늘 서둘러 내려가셨다. 그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돈'도 별로 안되고 '힘'만 드는 농사일에 온몸이 부서져라 '투신'하는 이유를.
이제야 이해 가고 공감이 간다. 일하는 그때, 몸이 움직이는 그 공간이 그분에게는 평정심의 세계였을 것이다. 농사일에 바닷일에 염소 키우고 김공장 운영하고. 6남매 자식 키우고 학교 보내고.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일과 단 한순간도 떨쳐낼 수 없는 자식걱정. 그 세월을 견뎌낸 힘이 노동이 주는 평정심이었을 것이다. 단 하나도 놓치지 않고 책임졌던 의지. 가족 모두를 향한 헌신이 가능했던 것은 노동이 주는 충만감과 에너지였을 것이다. 작은 체구에서 빛나던 거인 같은 파워는 노동에서 얻는 마르지 않는 생명력이었을 것이다.
나 또한 매장이 고객으로 가득 차고, 웨이팅 줄이 서면 '평정심'을 경험한다. 주문전표가 삑삑 대며 쉬지 않고 울려대도, 해도 해도 끝없는 설거지가 밀려와도, 마음이 평화롭다. 일하는 그 순간은 몸이 아픈 줄도 모르고 손발이 가볍고 빠르게 움직인다. 직원들이 음식을 쏟고, 그릇을 깨는 실수를 해도 모든 것이 용서되고 이해된다. 무아지경, 부처님의 혜량이다.
오픈준비 시간, 아무도 없는 식당에서 혼자 일하면 마음이 편하다. 고요하다. 손과 발은 바쁘게 움직이는데, 마음은 멈춰있다. 머리가 비워진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온갖 잡념이 사라진다. 그 순간 가볍다. 절로 흥이 난다. 흘러간 옛 노래를 절로 흥얼거린다.
머리는 텅 비고, 마음은 충만하다.
평정심의 세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