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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방정, 이 오지랖 어쩔까나?

내뱉자마자, 주워 담고 싶은 말! 말! 말!

by 고굽남 Mar 27. 2025

입이 방정이다.

돌아보면, 안 해도 될 말이다. 필요 없고 쓸데없는 말이다. 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오는 말이다. 무심코 던진 말이다. 바로 집어삼키고 싶다. 그러나 한 번 내뱉어진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 수습 불가다. 감당할 몫이다. 고깃집 사장을 하면서, 고객에게 굳이 하지 말았어야 할 말들이 있다.


"닮으셔서 자매지간으로 알았어요"


가족단위 고객이 많은 설날 명절쯤이었다. 중년 부부 2쌍과 자녀들 3명. 그리고 노년 어르신 한 분이 왔다. 화기애애하고 화목한 분위기였다. 특히 5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여성 두 분이 딱 붙어 앉아서 아버님을 보필했다. 아버님께 고기도 싸 드리고, 국물도 떠 드리고. 정성을 쏟는 모습이 좋아 보였다. '따님들이 명절이라, 홀로 사는 아버님을 찾아뵙고 다 함께 외식을 나왔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가족분들의 대화에서 '큰 아빠, 작은 아빠'라는 호칭이 불리는 것을 듣고, 따님들이 아니라, 며느리들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두 여성분은 외모도 닮아 보이고, 서로를 친밀하고 따뜻하게 대해서 당연히 '자매지간'으로 생각했는데 '동서지간'이었던 것이다. 순간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두 분이 닮으셔서 자매지간인 줄 알았어요" 말을 내뱉은 순간, 아차 싶었다. 내가 이 말을 굳이 왜 하지. 했는데... 두 여성분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굳어진 두 여성분의 표정이 정지 화면처럼 나타났고, 그 눈빛이 나의 온몸의 세포를 '긴장'의 상태로 깨웠다. 여기서 변명을 해야 하나? '두 분이 너무 다정해 보여서요'라고 말해야 하나? '따님들처럼 지극정성으로 아버님을 살피셔서, 며느리들 같아 보이지 않아서요'라고 말해야 하나? 머릿속 떠오르는 말들이 더 이상했다. 어떤 말도 수습이 안될 듯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 상황. 결국 "맛있게 드십시오" 하고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듯 나왔다. 자매지간이던 동서지간이던 도대체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이 '오지랖'을... 후회하지만 내뱉은 말은 주워 삼킬 수가 없다.   



"뭔 아들이 이렇게 예쁘대!"


고깃집 사장으로 일하면서 좋은 점 중 하나는 아기들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갓난아이들을 보는 것은 나에게는 행복이다. 아기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하고 따뜻하다. 가끔은 생후 100일이 안된 아기들도 오고, 돌 전후의 아기도 종종 온다. 아기들은 다 이뻐 보이고, 다 사랑스럽다. 아기들을 보고 있으면 나도 덩달아 순수하고 맑아지는 느낌이다. 나를 보고 방긋 웃어주면 그것이 피로회복제다. 그래서 아이들을 유심히 보게 된다. 그러면 '아들인지 딸인지' 궁금해진다. 아들, 딸을 알아맞히는 것이 내 나름대로 재미다. 18개월 이상만 되면 옷 차람이나 헤어스타일로 금세 알아차릴 수 있지만, 돌이 안된 아이들은 도무지 구분이 안 간다. 얼굴 모양만 봐서는 알 수가 없다.

난 '아들인지 딸인지' 알아맞히는데 집중을 해서 '딸'을 '아들'이라고 잘못 말한 경우가 있었다. 딸에게 "아들이죠?" 하는 순간, 엄마의 표정은 굳어진다. 어떤 젊은 엄마는 노골적으로 "사장님 보는 눈이 없으시네요" 하면서 핀잔을 준다. 애 부모들이 느낄 감정과 기분은 고려 않고 '아들딸' 알아맞히는 데만 집중하는 나의 우매함이란... 우매함이 서너 번 반복된 후 난 다짐했다. 나에게 모든 갓난아이들은 다 딸이다.

"아이고 이뻐~ 우리 딸 눈이 진짜 이쁘다", "와~어쩜 아기가 콧날이 이렇게 선명할까? 연예인 해야겠다", "딸이 너무 예뻐서 계속 보고 싶네요". 아들 같아 보여도 무조건 딸로 표현한다. 물론, 이쁘고 사랑스러운 나의 표현은 진심이다. 다만 '아들'같아 보여도 무조건 딸로 말할 뿐이다. 아들을 딸로 표현했을 경우에 대부분 엄마들은 "어머! 사장님! 아들이에요~ 호호호 하하하" 하면서 웃는다. "뭔 아들이 이렇게 예쁘대~" 나도 함께 웃는다.



"따님들이 효녀이시네요"


세 여자가 왔다. 할머니, 어머니, 딸이다. 그런데 나는 어머니와 두 자매로 인식했다. 할머니는 젊어 보였고, 어머니는 더 젊어 보였고, 딸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셋이서 친구처럼 다정하게 대화하고, 화기애애했다. 특히 손녀딸은 밝고 명랑했다. "와~ 진자 맛있어요." 하면서 리액션도 좋았고, 웃음소리도 경쾌했다. "사장님! 고맙습니다" 하면서 인사성도 밝았다.

"두 분 따님이 효녀 시네요. 어머님 모시고 이렇게 즐겁게 식사를 하시고" 말하자, 할머니가 "딸이 아니고에 손녀입니다"라고 말씀하신다. 순간, 어머니는 딸의 눈치를 살피며 좋은 기색을 애써 감추는 듯했고, 손녀딸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그렇게 밝고 명랑하고 경쾌했던 손녀딸은 순간 모든 신경근육이 멈춰 선 듯한 느낌이었다. 정적이 흘렀다. 잠시였지만, 어색하고 복잡한 기운이 감돌았다. 엄마와 딸을 자매로 인식한 나의 말. 엄마 입장에서는 듣기 좋은 말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딸의 입장에서는 엄마가 젊어 보인다는 뜻이니, 함께 기뻐할 일이라는 생각과, 내가 엄마와 비슷한 연배로 보인다니, 기분 나쁘다는 생각이 교차했을 수 있다. 복잡 미묘한 감정이 순간 닥쳐왔을지도 모르겠다. 외모를 평가하겠다는 의도와 뜻이 없었지만, "두 분 따님"이라는 표현 자체에 외모 평가가 포함돼 버린 것이다. 도대체 이 말이 왜 튀어나왔을까? 분위기를 더 좋게 하기 위해서? 세 여자의 가족관계를 알아맞히는 투시력을 갖춘 사장의 능력을 뽐내고 싶어서? 화기애애한 이 분위기에 동참하고 싶어서? 정말 0.1초 만에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이 '말'. 돌이킬 수 없는 이 '말'. 묵언수행을 해야 하나?    


"연인처럼 보여서, 부부 아닌 줄 알았어요?"


잘 구워져 보이는 고기를 서로 먹으라고 권유한다. 서로 고기를 싸서 입에 넣어준다. 눈빛을 교감한다. 다정한 대화가 끊이지 않고 오고 간다. 남자분의 흐뭇한 표정과 여성분의 경쾌한 웃음소리가 조화롭다. 서로에게 집중한다. 중년 부부들이 왔을 때, 서로에게 집중하지 않고 딴짓하는 행동이 보이지 않는다. 휴대폰을 보거나, 메뉴판을 오래도록 뚫어져라 보거나, 가게 전체를 천천히 둘러보거나. 고기 굽는 모든 과정을 뚫어져라 쳐다보거나. 하는 딴짓이 없다. 고기를 구워주는 내내 서로의 존재와 서로의 대화에 몰입해 있다.

4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두 남녀의 모습이 부부라기보다는 사귄 지 이제 갓 100일도 안된 연인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두 분 대화 속에서 '가족 여행'계획이며 '아이들 학원' 이야기며 '아파트 주차공간 부족' 등의 이야기가 나온다. 연인이 아니고 부부 맞다. 불륜이 아니고 부부 맞다. 순간 나도 모르게 반 농담으로 던졌다. "너무 달달한 연인처럼 보여서 부부 아닌 줄 알았어요" 당연히 좋아하면서 "저희 부부 맞아요. 결혼한 지 벌써 00차예요"라는 대답을 기대했다. 그런데 기대와 전혀 다른 반응이 나왔다. 묵묵부답. 침묵뿐이었다. 잠시 있다가 남자분이 "아~ 그리 보이세요?" 하더니 "화장실이 어디죠?" 하고 일어선다. 여자분은 알 수 없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술잔을 비웠다. 어색한 상황, 자리를 빨리 피하고 싶은데, 이놈의 고기는 오늘따라 빨리 구워지지 않는다.  아~ 이 오지랖. 어쩔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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