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로 산다는 건, 방패막이 된다는 뜻이다

갱년기 엄마의 결혼 타령

by 글쓰는 최집사

나는 외가에서 첫째다. 김여사가 삼남매 중의 첫째이기도 하지만, 거기에 일찌감치 결혼해 나를 낳았기 때문에 외가 사촌동생들과 나는 나이 차이가 꽤 나는 편이다.

내가 올 해 스물 일곱(이라고 쓰면서 이렇게 어색할수가), 동생이 스물 넷. 큰 삼촌네는 첫째가 이제 막 성인이 되었고 둘째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막내 삼촌네는 이제 첫째가 중학생이고.


첫째인데다가 사촌동생들과 나이차이가 좀 있다보니 외가에서 나는 언제나 모범을 보여야 하고, 의젓하고, 멋진 언니, 누나여야 했다. 항상 동생들과 놀아주는 일이 익숙했던 나는 김여사가 재혼을 하고 맞이하게 된 새로운 가족 앞에서는 어색해질 수 밖에 없었다.


아빠는 막내였다. 사 형제중의 막내.

첫째 사촌 언니는 나와 10살 정도 차이가 난다. 언제나 맏이인 것이 익숙했던 나는 친가에 가면 막내가 되었다. (물론 내 밑에는 여전히 내 동생이 있다) 막내 노릇이란 이런거군. 명절에 친가에 가면 언제나 저 위의 언니, 오빠들이 방패막이 되 주었다. 그들은 모두 결혼적령기였고, 어른들은 결혼적령기인 솔로들을 가만히 두는 법이 없으므로. 모든 어그로는 위에서 끌어주는 만큼, 나는 그냥 내 하고싶은 일을 하며 살면 됐다.


물론 외가에서 내가 첫째라고 해서, 잔소리를 많이 듣고 산 것은 아니다. 나는 알아서 잘 컸고(김여사의 말이다), 공부도 열심히 했고, 꽤나 좋은 대학에 갔고, 취준기라는 것 한 번 겪지 않고 취업을 했다.(곧 퇴사 할 예정이지만) 나는 특별히 20대들이 가장 괴로워한다는 '명절 잔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작년 설 즈음부터 조금 달라졌다. 공부, 대학, 취직. 모든 것을 피해갔지만 아직 나에게는 결혼이라는 게 남아있었다. (물론 그 뒤에는 애도 있다!)

내가 아무리 '요즘 세상에!'를 외치며 방어를 해도, 23세, 24세에 자식을 낳은 오여사와 김여사의 귀에 통할 리가 없다. 내 나이 이제 스물 일곱. 내가 결혼을 안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다만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는데. 내가 서른도 아니고 스물일곱에 결혼 잔소리로 괴로워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같이 운동을 하는 언니가 스물 여섯살 때, (나는 그 때 스물 넷이었다) 집에서 4년 사귄 남자친구랑 언제 결혼을 할거냐고 하도 볶아대서 명절에 집가기 싫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 때는 '아니 무슨 스물 여섯한테 시집 안가냐고 잔소리야 요즘 세상에...'라고 생각했는데 거짓말처럼 내가 스물 여섯이 되자 우리 집에서도 똑같은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김여사가 몇 년 전부터 스쳐가는 이야기로 '빨리 결혼해서 빨리 애 낳는게 행복한거야'라고 말 하기 시작했는데, 작년부터는 아주 대놓고 이야기 한다. 이제는 오여사까지 가세해서 빨리 시집을 가란다. 우리 집은 안 그럴 줄 알았는데. 결혼 잔소리는 김여사의 갱년기와 함께 시작되었다.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나에게 결혼을 말 하는 김여사와 오여사를 가만히 보고 있자면,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말 하기는 싫지만, 두 사람 다 결혼해서 개고생했잖아. 아내로, 엄마로 살아가는 길이 그닥 유쾌하지 않았잖아. 운이 좋게 두 사람 모두 자식들이 잘 자라주어 지금은 남부럽지 않지만, 정말 그거면 되는걸까. 정말 내가 예쁘고 자랑스러운 딸이어서 그거면 된걸까.


몇 년 전까지는 먼 훗날 내가 결혼하라는 잔소리를 듣게 되는 날이 있다면(이렇게 빨리 올 줄 몰랐지만)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말하리라 생각했다. "내가 알아서 할거니 걱정이랑 마셔요!"라고.

근데 정작 그 상황이 오니 이상하게 주눅이 든다. 있는 힘껏 애써서 내 생각을 이야기하지만, 내가 제일 사랑하는 김여사와 이런 얘기를 해야 한다는것 자체가 왠지 슬프고 피하고 싶어졌다.


첫째로 산다는 건 동생들에게 결혼 잔소리 방패막이 되어주는 일인가보다. 학생이 되고, 대학을 가고, 취업을 하는 일은 때가 되면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데, 결혼잔소리 만큼은 예외없이 나이 순이다.

괴롭다. 앞으로 2-3년은 최소 결혼이나 출산 잔소리를 피할 수 없는 내 운명이.









설 날 아침, 외가댁에 가서 세배를 했다.

올 해는 동생이 휴가를 나오지 못해 군에서 설을 보내게 되었는데,

나는 늘 동생과 짝꿍으로 세배를 했기 때문에 혼자 세배해야 하는 상황이 어색했다

웃으며 말한다.


"올 해는 짝꿍 없이 혼자네요~"


그런데, 세배를 마치자 예상치 못 한 답이 돌아온다.


"그니까 너 얼른 짝 찾아가지구 와! 가야지 이제!"


제발요.

가기는 자꾸 어딜 가요 할머니.


김여사는 뭐가 그렇게 웃긴지 뻘줌해 하는 나를 보고 키득키득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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