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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혜미 Sep 18. 2024

왜 나는 네가 막막할까?

로마와 나, 네 번째 이야기

로마가 태어나기 20년 전, 나는 어른이 되어 강아지를 키우게 될 줄 몰랐다. 삶은 앞으로 일어날 일들의 그 어떤 자그마한 실마리도, 실마리의 실마리도 보여주지 않는다. 첫사랑이 스무 살에 등장할 줄은? 그 이전의 남자들은 사랑이 아니었다고 우기게 될 줄은? 꿈에 자꾸 등장하는 남자 하나 때문에 젊은 날이 그토록 힘들어질 줄은? 알코올 중독자의 길을 걷게 될 줄은? 결혼뿐만 아니라 이혼까지 하게 될 줄은 누가 알았을까? 아무도, 그 무엇도 세상에 대해 알려주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속한 게임의 절대 규칙이다.


세상은 말 그대로 게임이다. 아주 장난스러운 것이다. 누군가의 유희이고 심심풀이다. 세상은 자비를 베풀고 기회를 주는 척 규칙의 틈새로 인간의 삶을 훔쳐본다. 그리고 심심할 땐 그곳으로 실마리의 꼬리를 슬쩍 꺼내서 보여주기도 한다. 아주 자그마한 사건을 던져놓고 인간이 크게 동요할 만한 짓궂은 장난을 치는 것이다. 그 사건이 가장 개인적이고 사적인 무의식의 일면을 건드리면 파동이 일면서 수면 위로 파도가 덮친다. 깊은 감정을 느끼면 우리는 나에 대해 몰랐던 사실을 깨닫게 되고 깜짝 놀라고 나 자신과 멀어지고 싶어 하며 남을 탓하거나 혼란스러워한다. 그러나 절대 규칙은 깨지지 않는다. 실마리의 의미를 달고 살기에 인간은 쉽게 방심하기 때문이다.


나 또한 그 누구도 기억하지 못할 자그마한 사건 하나로 나에 대한 중요한 실마리를 발견한 적이 있다. 그 드물었던 기회는 내가 지독하게 예민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속삭여 주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로마가 태어나기 20년 전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그 모든 일의 가능성 – 첫사랑과 이혼을 비롯한 모든 가능성 - 을 내포하는 거대한 실오라기였다. 하지만 단서로 말미암아 경각심을 갖고 인생의 돌다리를 건너기에 나는 너무 칠칠맞았다. 자꾸만 그 경험을 어딘가에 두고 다녔다. 끊임없이 방심하는 인간을 두고 세상을 낄낄거리며 웃고 있었을 것이다.


세상의 장난에 휘말렸던 그날, 나는 9살 어딘가에 있었다.


은경이 이모네엔 나보다 어린 두 아들이 갖고 놀던 블록 꾸러미가 있었다. 정신없는 남자애 둘은 이제 막 블록에 질려 비디오 게임을 하러 방으로 들어갔다. 한층 차분해진 거실에서 나의 시선은 조용하게 앉아있는 블록으로 움직였다. 이제 막 장난감 놀이에서 벗어나 언니의 세계로 진입하던 9살 소녀는 알록달록한 장난감들의 휴식에 아련한 향수를 느꼈다. 반짝이는 추억의 알맹이에 이끌렸고 몸을 일으켜 장난감 앞에 앉았다. 한 개 두 개 들춰보며 어떤 집을 만들고 누가 등장하고 무엇을 하고 어떤 걸 느끼게 할지 머릿속의 각본을 촘촘하게 따져가며 신의 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이모네 머무르던 잘 모르는 여자애가 내 옆으로 불쑥 끼어들어 말했다. “같이 놀래?” 한 땀 한 땀 정교하게 완성해 가던 각본이 찰나에 침범을 받고 와르르 무너지면서 나는 순간적으로 불쾌해졌다. 손에 쥐고 있던 빨간 삼각 토막을 내던지듯 내려놓고 쌩하니 돌아와 엄마 옆에 앉았다. 무안해진 여자애는 그 삼각 토막을 만지작거렸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수치심에 몸을 떨었다. 사람들 앞에서 크게 넘어졌을 때와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크게 상처받았고 위로받고 싶었다. 따뜻한 욕조가 간절히 필요한 사람처럼 깊은 위로를 원했다. 엄마의 품에 안기고 싶었다.


한편으로 나는 무척 불리한 처지에 있었다. 나와 그 여자애는 영문을 알 수 없는 대결 구도에 빠져버렸으며 논리 없이 성이 나버린 나의 태도는 모두를 의아하게 했다. 게다가 그곳의 대장인 은경이 이모는 나의 진짜 이모가 아닌 엄마의 오랜 친구였으며, 그 이름 모를 여자애는 이모를 무려 ‘고모’라고 부를 수 있는 위치였다. 게다가 걔는 나랑 동갑이었고, 나에게 먼저 놀자고 말할 수 있는 아이였으며, 곧 있으면 나의 이름을 물을 만한 아이였고, 그 모든 과정 안에서 그 어떤 이물감도 느끼지 못할 부류였다. 세상은 흔히 그런 아이들을 보고 속이 넓다거나 성격이 좋다고 말하더랬다. 나는 그런 태연한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혹처럼 자존심이 튀어나왔다. 이제 나는 혹을 달고 있는 세상에서 가장 못생긴 어린이가 되었다. 삐죽 나온 입술과 구겨진 이마를 어떻게 숨겨야 할지 막막하고 어려웠다. 나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던 엄마는 혹이 드러난 딸의 모습에 수치심을 느꼈고 그런 딸을 두어 자존심이 무척 상했다. 무시무시한 복화술과 미칠 듯 따가운 눈초리로 나를 나무랐다. 엄마의 목소리는 공기 중에 모락모락 피어 자기네들끼리 부딪히며 변형되더니 나의 귓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너 같이 속이 좁은 딸을 두어 창피해 죽겠다고. 나는 왜 이것밖에 되지 않는 딸인 걸까? 완전히 사라지고 싶었다. 나를 그러려니 – 여느 예민한 여자아이로 - 바라보는 여자애와 다른 의미에서 그러려니 – 그저 어린아이로 - 바라보는 아빠, 은경이 이모와 이모부 사이에서 바스러지고 싶었다.


더 이상 이모네 부부가 엄마를 초대하지 않을까 무척 겁이 났다. 내가 엄마의 인생을 망치고 있는 건 아닐까.

창문이 열려 있었다면 나는 그대로 뛰어내렸을 것이다. 날개를 뻗어 구름을 가르고 이모네 집에서 가장 먼 곳으로 날아가 눈물을 터트렸을 것이다.


그 여자애는 내게 부재한 것을 갖고 있었다. 사교성이었다. 그리고 내게 들러붙어 있는 것이 부재했다. 경계심이었다. 그 아이는 너무도 사랑스러워 내게 너무 날카로웠다. 그 아이는 내게 열등감과 질투심을 순간적으로 폭발시키는 촉매제와 같이 매력적이었다. 그런 아이들이 종종 있었고 나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선천적으로 빛을 머금고 태어난 아이들. 나는 다시 태어나도 될 수 없는 타입이었다.


그 일로 많은 것을 깨달았다. 나는 스스로를 상처 입히는 인간임을 알게 되었다. 내가 나를 미워하는 인간임을 알게 되었다. 내가 나와 친하지 않은 인간임을 알게 되었다. 내가 나를 어색해하는 인간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래서 예민했던 것이다. 내가 나를 잘 몰랐기 때문에 모든 것이 낯설었던 것이다. 진작 첫사랑을 알아보지 못했으며 술로 달래고 확신이 없는 결혼을 감행하거나 어쩌면 당연한 이혼을 겪었던 그 모든 가능성은 20년 전에 삼각 블록이 말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늘 방심했고 절대 규칙은 보존되었다. 세상은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은 척, 장난치지 않은 척 입을 싹 닫고 점잖을 뺐다. 그러다 보니 세상은 정말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은 것이 되었다. 아무도, 그 무엇도 세상에 대해 말해주지 않는다.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로마를 바라본다. 그리고 어릴 적부터 알 수 없이 예민하고 모든 것이 거슬리고 혼자 있고 싶으면서도 외롭던 작은 아이를 바라본다. 수치심에 몸을 떨던 나의 품에 로마가 안겨 있었다면 나는 조금이나마 녹아내렸을까?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 당당히 여자애를 마주할 수 있었을까? 나 또한 너처럼 사랑스러울 수 있다는 눈빛을 하고 어깨를 펴고 너와 대등하게 블록을 매만질 수 있었을까? 멀찍이 친구들을 바라보기만 하는 로마에게 어떤 도움을 줘야 할지 모르겠다. 친구들이 다가오면 날카롭게 짖어대는 나에게 엄마는 어떤 도움을 줘야 할지 막막했을 것이다.


엄마는 나를 딸로 두어 늘 막막했을 것이다. 7살, 겨울방학이었다. 


엄마가 맞벌이를 시작하자 나는 넘쳐나는 시간을 어떻게 주워 담아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종종 오빠에게 맞아서 아팠고, 미술 학원은 내게 아무런 위로도 되지 않았다. 한 달 내내 결석했다. 엄마가 학원에 다녀왔냐고 물으면 세상에서 가장 착한 딸의 얼굴을 하고 무엇을 그렸는지 설명했다. 최선을 다해 거짓말하는 딸과 그것을 바라보는 엄마. 엄마의 마음은 어떤 모양을 하고 있었을까? 오늘은 무엇을 그렸는지 꾸준하게 물었던 엄마가 밉다. 나에 대한 믿음을 가장한 엄마가 밉다. 나의 못난 모습을 직면하지 않았던 엄마가 밉다. 엄마는 나의 무엇을 외면하고 싶었던 건지 모르겠다.


우리 집엔 방이 두 칸 있었다. 한 칸에선 오빠가 하루 종일 컴퓨터 게임을 했고 나머지 한 칸에선 미미 공주님이 뱀 왕자님과 사랑을 나누며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파티를 열었다. 뱀 왕자님은 미미 공주님의 몸을 감싸고 꼭 들러붙어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늘 함께 파티를 즐겼다. 화려한 파티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어졌고 엄마가 퇴근하기 직전 다급히 마무리되었다.


절대 규칙이 통용되지 않는 그 세상은 언제나 견고했다. 그늘진 방 한구석의 꿉꿉한 각본은 촘촘하고 밀도 있게 설계되었다. 그 세상은 장난스럽지도 짓궂지도 않았고 누군가를 희롱하거나 낄낄대지도 않았다. 진지했고 예견되었고 방심하지 않았다. 외롭고 고독한 몰입의 세계는 바깥세상의 모든 것을 잊고 힘껏 몸담을 수 있는 환상의 안전 기지였다.


안전 기지는 내 안에 스며들었다. 그래서 나는 위로가 필요할 때 나의 안으로 파고들어 인형을 갖고 예견된 세상을 만드는 일에 집중한다. 더욱 외로워지지만 그 평온함과 몰입의 감각은 사람으로 채워지지 않는 미지의 한 구석을 채워 주기도 한다.


그러는 새에 나도 일을 하는 엄마가 되었다. 로마는 평일 13시간 동안 홀로 지낸다. 가장 망각하고 싶은 사실 중의 하나다. 


로마는 지독하게 외로운 걸지도 모르겠다. 태연하게 뛰어노는 친구들을 멀리서 바라보기만 한다. 로마의 작은 머릿속 회로가 움직일 것이다. 세계를 구축하고 있을 것이다. 하품을 하며 나를 맞이할 때 그 세계는 급히 마무리될 것이다. 그러나 그 세계의 실체를 알게 되면 나는 조금 슬퍼질 것 같다. 로마가 착한 얼굴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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