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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혜미 Sep 20. 2024

꿈에서 흐르는 달콤한 양배추 냄새

로마와 나, 다섯 번째 이야기

새벽녘, 로마는 잠결에 자꾸 코가 움직거려 깼다. 무엇이 로마의 코를 움직였을까?


침대 프레임 밑으로 기어들어가 멀고도 먼 조상이 그랬던 것처럼 로마는 장판을 박박 긁고 자리를 마련했다. 꼬리를 턱밑으로 말고 잠 기운이 쏟아지면 서둘러 눈을 뜨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둥지를 파수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슬며시 몸을 일으켰다. 눈도 다 떠지지 않았지만 냄새의 길을 따라 어디에도 부딪히지 않고 잘 걸었다. 깅엄 체크무늬 커튼 너머 달빛이 배회하던 방 안에는 흡사 양배추 삶는 듯한 달콤한 냄새가 나고 있었다.


로마는 언제나 신중하고 겸손했으므로 자신을 쉽게 믿지 않았다. 섣불리 판단하기 전에 물그릇으로 달려가 목을 축였다. 촉촉해진 혓바닥으로 코를 핥았다. 정신이 맑아지자 눈을 크게 뜨고 부엌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냄새는 양배추 삶을 때와 비슷했지만 때마다 코를 자극했던 습한 열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연기를 내뿜는 냄비는 온데간데없었다.


엄마는 새벽 공기가 좋다고 말했다. 그 말은 맞았다. 바람이 새벽 둥지의 빨래와 벽지와 서랍의 사이에 스며 있었다. 걸을 때 부딪히는 겨드랑이의 감촉이 부드러웠다. 로마는 기지개를 켜고 기분이 좋아 본능적으로 엄마를 불렀다. “으르르∙∙∙∙∙∙.”


그제야 로마는 엄마가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엄마를 향해 입에 문 장난감을 힘껏 내던졌다. 결국 닿지 못하고 바닥으로 추락한 그것을 향해 폴짝 뛰어들어 로마는 놀았다. 금세 자신이 왜 잠에서 깼는지 잊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새벽은 냄새를 소중히 머금었고 농도를 보존해 주어 로마는 얼마 후 기억을 되찾았다. 이따금씩 어깨를 푸드덕거리며 이를 가는 엄마는 저 높고 푹신한 곳에서 잠들어 있었다. 바로 그곳에서 달콤한 냄새가 흘러내려왔다.


로마가 찾던 것은 엄마가 꾸는 꿈의 냄새였다. 로마는 양배추 맛의 꿈을 사냥하기 위해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숨을 크게 몰아 쉬었다. 이 맹수는 다리가 짧아 높은 곳에 오를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한 가장 높이 제자리를 뛸 뿐이었다. 그럼에도 로마는 최선을 다했다. 아침이 되면 기억하지 못할 사랑의 꿈을 로마는 핥아먹고 싶었다.


꿈을 꾸던 여인은 어렴풋이 제자리 뛰기의 낌새를 느꼈다. 그리고 생각했다. 조만간 또다시 강아지의 발톱을 잘라 주어야 한다고. 여인은 로마의 발톱을 자를 때마다 몰래 운다. 인간의 손톱과 다르게 생긴 강아지의 발톱은 혈관을 교묘하게 숨기고 있어 조금만 짧게 잘라도 피를 터트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로마의 발톱에 숨은 핏줄을 터트렸을 때 여인은 엄마로서의 자질을 깊이 의심했다. 자신보다 발톱을 더 잘 자르는 여인에게 로마를 보내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 그때 로마는 하얀 카펫 위 걸음마다 앵두 같은 핏방울을 한 알씩 떨어뜨렸다.


이후에도 어미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시한폭탄이 터졌다. 예상치 못한 곳에 고통과 핏방울과 꿱 소리를 숨기고 있던 강아지는 어미에게 너무 어려웠다. 저 아득한 새벽녘의 하늘처럼, 그 너머의 우주처럼, 유성우 같이 쏟아지는 대화에도 결코 알아내지 못했던 사람들의 마음처럼, 우울과 불안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이제 여인은 로마의 발톱을 길게 잘랐다. 덕분에 로마는 제자리 뛰기를 할 때 팝콘이 터지는 소리를 냈다. 뿐만 아니라, 6kg의 털 뭉치가 하늘을 날았다가 바닥에 떨어지면 아파트의 뼈대가 흔들거렸다.


아래층에 살던 소년은 극심한 성장통을 겪으며 하늘에서 추락하는 꿈을 꾸고 있었다. 착지하는 순간의 충격을 무릎 관절이 온전히 흡수하게 된다면 소년은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성장통을 겪어야 할 터였다. 때마침 로마가 펄쩍 뛰어 지면에 진동이 일었고 소년의 충격을 흡수했다. 소년은 더 이상 키가 크는 밤과 성장이 두렵지 않았다. 소년은 하룻밤 새에 2센티미터나 자랐고 다음날 아침 배가 무척 고팠다.


그러므로 로마는 제자리 뛰기를 멈추지 않았다. 인간의 호르몬이 뿜는 향기를 통해 로마는 그들의 감정을 헤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선을 다했다. 4년 간의 오랜 노하우로 땅을 박찰 땐 숨을 참을 수 있었고 발을 디딜 땐 숨을 내뱉을 줄 알았다. 발톱과 진동과 들숨과 날숨의 돌림노래가 근사한 미뉴에트 한 곡을 연주했다.


흥에 겨운 엄마는 함께 춤을 출 존재가 필요했다. 엄마는 댄스 파트너를 찾아 침대 밑으로 기어 내려왔다. 온기를 지닌 존재를 찾아 더듬었다. 부드러운 털이 종아리와 손목을 스치고 품 속으로 들어왔다. 손등을 할짝이며 꼬리를 흔들자 그것을 그대로 안았다. 기다란 발톱을 지닌 앞발을 마주 잡았다. 로마는 왜 발톱을 잘라야만 하는지 툴툴거렸고, 나는 혈관을 터트려 미안했다고 옛날 일에 대해서 사과했다. 하지만 로마를 다른 집으로 보내려 했다는 건 말하지 않았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든 생각을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신 혈관을 터트려 미안하다는 말속에 더 큰 미안함을 꼬깃하게 접어 넣었다. 그래서 나는 미안하다고 두 번 말했다. 크게 한 번, 작게 한 번.


우리는 그대로 서로를 품에 안고 이불속을 파고들었다. 로마는 금세 눈을 감고 꿈의 냄새를 풍기는 엄마를 바라보았다. 드르렁드르렁 잠의 소리를 들었다. 엄마의 입가에 흐르는 침을 날름거리고 엄마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대어 그녀의 꿈을 관람했다. 꿈의 냄새는 역시 달콤했다. 왠지 내일 어미의 기분이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로마도 꼬리를 흔들다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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