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모든 것을 용서해 줄까?
로마와 나, 일곱 번째 이야기
가끔은 비가 내리는 아침을 맞이한다. 빗방울이 에어컨 실외기를 두드리면 나는 평소와 조금 다른 하루를 시작한다. 찌뿌둥한 몸을 몇 번 늘이고 눈을 꿈뻑이고 토요일은 몇 밤이나 남았는지 헤아리며 늦장을 부린다. 그리고 로마를 생각한다. 오늘 울적할 강아지에 대해서 말이다. 로마가 울적한 이유는 아침 산책이 어렵기 때문이다. 내가 늦장을 부리는 이유도 같다. 그래서 나는 하늘이 비를 뿌릴 때 여유로운 아침을 썩 즐기면서도 그 기쁨을 강아지 앞에서 티 내지 않으려 노력한다. 누군가의 슬픔 앞에서 기쁜 내색을 할 땐 틀어질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대신 비로소 몸을 일으켜 로마의 머리를 쓰다듬고 베란다 문을 활짝 연다. 물의 소리와 냄새가 집안 깊숙이 스밀 수 있도록. 그러면 로마도 오늘 예정된 울적함을 짐작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로마는 변함없이 신중하고 꼼꼼하다. 신중하고 꼼꼼한 강아지를 달리 말하자면 자신이 겪지 않은 것을 믿지 못한다는 뜻이다. 로마는 확인이 필요한 타입이다. 그리고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욕망에 자주 사로잡힌다. 로마는 15층의 창 밖을 믿지 않으려 하면서 현실을 조금이나마 늦게 마주할 궁리를 한다. 하지만 로마는 아직 4살이지 않던가. 세상의 의도와는 다르게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이 상처나 미움으로, 거대한 실망으로 다가올 수 있는 나이다. 로마는 베란다로 나가 밖을 향해 코를 움직였다. 습한 녹천의 내음을 즐기다가 몇 개의 물방울이 콧잔등으로 튀어 얼굴을 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나에게 달려온다. 으르렁 거리며 오늘은 왜 이리 뭉그적거리는지 나무란다.
오래전부터 비가 오는 날엔 산책을 쉰다. 되려 나는 로마와 비를 즐기고 싶은 마음이다. 로마가 어릴 적 그랬던 것처럼 쏟아지는 비를 흠뻑 맞을 각오가 되어있다. 그렇지만 그때는 로마와 빗속을 누비는 일을 낭만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때였다. 집에서 씻기고 말릴 걱정 뿐이었다. 신이 난 강아지는 끌려오다시피 비와 작별했다. 그런데 무심코 귀찮아했던 마음이 로마에게 그만 옮아 버린 것이다. 그래서 함께 뛰놀던 옛 추억은 인간의 쓸모없는 로망만으로 남아버렸다. 지금의 로마는 더 이상 비를 맞으며 달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 물이란 물은 모조리 질색한다. 마실 물도 내키지 않는지 참고 참다가 한꺼번에 한 그릇을 들이켜는 편이다.
비가 오면 로마에게 하네스를 채우고 다시 돌아올 길을 따라 구태여 1층으로 내려간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로마의 이상한 요구를 들어주는 마음속에는 어릴 적 로마의 로망을 귀찮고 짜증스럽게 여겼던 미안함이 서려있다. 어쩌면 로마는 그때를 기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새끼의 마음에 공감하지 못했던 어미를 용서하는 일은 시간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1층에 도착한 우리는 추적 추적 아름답게 비가 내리는 풍경을 직접 목격한다. 그제야 로마는 자신의 처지와 하늘의 처지를 이해하고 지체 없이 방향을 틀어 엘리베이터를 열어달라고 말한다. 지면에 부딪히는 빗방울을 보고 로마는 상상했던 것이다. 자신의 머리에 닿을 빗방울의 무게와 귀찮아했던 어미의 표정을 말이다.
그러나 로마는 슬퍼하는 법이 없다. 자신의 선택에 따라 행동한다면 절대로 꼬리를 내리지 않는다. 아무리 하늘이 야속 해도 두 눈으로 확인한 것을 외면하는 적이 없다. 로마가 꼬리를 내리는 때는 어미가 자신의 선택을 존중하지 않거나 자신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할 때뿐이다. 한편으로는 로마에게 있어서 실망할 일이 고작 기상 악화 정도라는 사실이 다행이다. 그리고 부럽다. 그 단순하게 짜인 선천적인 사고 체계가 부럽다. 인간은 하늘에서 비가 내려도 기상 악화를 탓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 너머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하늘에 사는 신과 자신의 과오와 조상의 업적을 탓하며 서사를 어지럽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그것이 인간을 얼마나 무력하게 만들던가. 인간 세상 속의 갈등은 하늘과 내가 다투어서, 하늘과 내가 타협해서, 하늘과 내가 서로를 의지하거나 변화하길 기대해서 변할 만한 것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는 하루에 단 두 번 있는 산책 중 절반을 잃게 되어도 꼬리를 내리지 않는 마음이다. 내리는 비를 확인했다면 지체 없이 포기할 줄 아는 마음이다. 나의 한계를 아는 마음이다. 겸손하고 단단한 마음이다. 그렇지만 하늘에 기우제를 지내는 것이 인간이다. 비가 오지 않으면 온 세상의 행운을 끌어다가 원망하는 것 또한 바로 인간이다.
나보다 일곱 살 많은 남자친구 K는 20년 전에 서울로 상경해 홀로 수많은 일을 해결해 왔다. 그러나 나는 그의 수많은 세월이 증명하는 현재 그의 모습을, 당장 내 눈앞에 펼쳐진 그의 건강하고 안정적인 모습을 믿지 못하는 것 같다. 서른아홉의 남자친구가 회식을 할 때마다 무슨 일을 당할까 안달복달하는 상태에 빠져버린다. 때마다 하늘과 지하철과 그의 간과 정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것이 나라는 인간이다. 한 시간에 한 번씩 연락해서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물어보고, 혀가 얼마나 꼬였는지 가늠하고, 사진을 찍어 보내면 눈이 풀린 정도를 파악한다. 그러고 나서도, 그가 아직 멀쩡한 모습을 확인하고 나서도, 하늘에서 비가 오거나 그친 것을 확인하고 나서도, 그가 올바른 방향으로 지하철을 타거나 알맞게 내렸다고 해도, 나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 눈빛을 확인하고 귀갓길이 얼마나 남았는지 불안해한다.
남자친구의 입장에선 번거로움을 무릎 쓴다. 귀찮아도 귀찮지 않은 척을 하느라, 나의 요구에 일일이 부응하느라, 그 와중에 직장 상사의 비위를 맞추고 3차를 갈지 말지 갈등하느라고 번거롭다. 마치 아무리 무의미하고 소모적이어도 1층까지 내려가서 비 오는 풍경을 구경하는 일과 비슷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하는 행위는 자그마한 낭만의 흔적도 없고, 흔히 유튜브 콘텐츠에서 순위를 매겨 경각심을 새겨주는 ‘서둘러 헤어져야 할 여자’의 모습을 할 뿐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가 몇 년 전 언젠가 벤치에서 잠든 적이 있다는 말을 들은 후 영 마음이 편해지지 않는다. 아마도 그건 그와 사귀기 전, 그를 알기도 전, 내가 이혼이라는 것을 하기도 전에, 그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내가 겪었던 개인적인 일들에서 비롯할 것이다. 개인적인 불안감을 떨치기 위해서 사적인 과거와 K의 안위를 연결 짓는 행위는 죄책감을 낳는다.
결혼 생활을 하던 때, 함께 살던 남자가 인도에 누워있다는 경찰의 연락을 받거나 택시에 쏟아놓은 구토로 세탁 비용을 결제하거나 새벽이 되도록 연락이 되지 않아 경찰에 신고를 해야 했던 경험들은 나조차도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나는 예민하고 강박적인 모습을 가렸던 나의 견고한 껍질을 어느새 한 겹씩 벗어던지고 있었다. 그 남자를 술이 잘 받지 않는 사람, 술을 마시면 큰일 나는 사람, 심지어는 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 술을 싫어하는 사람으로 정의하고 주변에 나의 사견을 사실인양 알리기도 했다. 나날이 거짓을 알리는 사람이 되어 점차 나를 혐오했다.
나는 전에 없던 나의 새로운 모습을 생성한 것인지, 그저 갖고 있던 모습을 발견했던 것뿐일지, 잊어왔던 모습을 다시 기억하는 것뿐일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연락이 되지 않을 때마다 심장이 불에 타는 듯한 불안감을 느끼는 사람이 되었다. 내 곁에 남겨진 사람이 길바닥에서 봉변이라도 당하지 않을까 하는 그 두려움은 불현듯 엄습하고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때는 남아있었던 사랑은 소멸되었고 폐허가 된 그 사랑의 마을에는 불안의 잔해들이 남았다. 그로 인해 지금 내가 지키고 싶은 사랑이, 마지막 사랑이라고 믿고 싶은 K가 몇 잔의 술 때문에 무너져 버릴까 두렵다. 술이 흔들어놓는 정신의 훼방 속에서 내 사람이 안전한지 확인하는 일은 곧 내 사랑을 지키는 일이 된 것이다. 나는 고작 그런 일에서 사랑을 강박적으로 지켜야 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사랑은 그런 모습을 띠기도 한다. 엄마가 작고 연약한 딸을 깊이 사랑했던 방식이다. 내가 술을 마시는 날엔 밤잠을 설치며 딸을 기다리던 엄마가 생각난다. 나는 그런 엄마에게 늘 짜증스러웠지만 짜증스러운 그것은 분명 사랑이었다.
나조차 과하다고 생각하는 그 행동의 뿌리는 무의식 속에 조용히 묻혀있을 것이다. 아마 홀로 버려지고 남겨지는 나의 위태로운 모습을 재생하고 있지도 모르겠다. 세상에선 그것을 흔히 ‘유기 불안’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엄밀히 말하자면, 몇 잔의 술 때문에 무너져 버릴까 걱정되는 존재는 K가 아니라 나 자신이다. 나의 이기심이 사랑이라는 탈을 뒤집어쓰고 정당한 척 불안을 드러낼 때, 나는 고개를 파묻고 싶도록 부끄러워진다.
K를 사랑하는 방식이 엄마를 닮아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용서해 줄까? 그래도 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