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지 않겠다는 다짐
로마와 나, 여덟 번째 이야기
17년 전 내겐 여자친구가 있었고, 그 해 다시는 여자를 사귀지 않기로 다짐했다.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기로 다짐한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나는 그저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고 그래서 그렇게 했다. 다만 나라는 사람에게 고유한 향이 있다면 17년 전 돌연 엎지른 향이 어떻게 여전히 선명할 수 있는지 궁금할 뿐이다. 그리고 17년 동안 뿌리고 엎지른 수많은 향의 덧칠에도 어떻게 여전히 그때의 감정이 지금의 내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그 향기는 지금의 나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17년 된 다짐의 향은 강렬해서 그 자체로 내가 되었다. 지난 17년 동안 그 향은 유효했고 나는 더 이상 여자를 사귀지 않았다.
열여섯, 나는 중학교 졸업반이었다. 가을이 되면 은행나무 길이 아름다운 사립여자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뒤죽박죽인 기억을 더듬어 보면 아마도 그 아이와 나는 봄에 만났던 것 같다. 그리고 가을 즈음에 헤어졌을 것이다. 겨울을 함께 보냈는지는 가물가물하다. 그 친구가 패딩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걸어가는 모습, 눈을 밟으며 즐거워하는 모습, 내 손을 이끌고 따스운 곳을 찾던 모습이 아른거린다. 하지만 환상인지 현실인지 잘 모르겠다.
그때의 나는 라디오 듣기를 좋아했다. 넘어가지 않는 문제집을 앞에 놓고 음악의 세계를 부유하며 온갖 상상에 몰두해 있었다. 신해철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잠을 쉽게 설치고 이유 없이 괴로워하고 근거 없는 소외감에 슬퍼하다가 친구들이 다가오면 쉽게 즐거워지는 사춘기 시절의 끝자락에 있었다. 지긋지긋한 호르몬의 널뛰기에 나는 종종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창 밖으로 떨어지는 장면을 생각했다. 이렇듯 도움이 필요한 시절에 그 친구를 만났다. 스스로가 혐오스럽고 끔찍이도 외로웠던 시절에. 그래서 그런지 나는 사랑에 빠져 뒤는 돌아보지 않은 채 계속해서 스며들었다.
나는 그 친구를 무척 사랑했다. 왜 그렇게 사랑했던가 생각해 보면 안전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 친구와 함께 할 때 안전해서 마음껏 사랑할 수 있었다. 그 친구는 여자였기 때문에 널뛰는 호르몬으로 인한 성적 긴장감을 위험하게 해소할 필요가 없었다. 섬세한 대화가 잘 통했으며 함께 손을 잡고 다녀도 부모님이나 선생님께 혼나지 않을 수 있었다. 같은 학교였기 때문에 일상을 공유하기 쉬웠고 서로를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다. 그 친구와의 만남엔 변수가 많지 않았다. 게다가 사뭇 남성적인 그 친구의 외모는 남자와 사귄다는 환상에 빠지는 즐거움을 줬다. 그중 사랑의 가장 큰 이유를 말해보라 한다면 아마 시답잖은 농담에 웃음을 터트릴 수 있을 만큼 적어도 서로에게 있어선 관대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 친구가 웃을 때 행복했다.
그러나 가장 안전한 줄 알았던 사랑 속에는 가장 근본적인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 위험의 실체는 두 인물의 XX 염색체였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2007년 ‘커피프린스 1호점’이라는 동성 간의 연애를 소재로 한 드라마가 유행하면서 어린 커플은 세상이 금기시하는 연애를 자각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진실된 입장이었다. 하지만 솔직하지 못한 슬픔이었다. 그 정도는 충분히 알고도 남을 나이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뤄왔던 자각에 그제야 임할 뿐이었다. 우리의 입장에서 폭력적이었던 그 드라마는 현실 속엔 사회적 맥락이 존재한다며 분명하게 나무랐다. 그리고 직면할 용기 대신 의무감을 떠안았다. ‘성인이 되면 네가 날 위해 성전환 수술을 하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며 보류했던 슬픔을 달래려고 징징거렸다. 하지만 가장 진실된 마음은 그 친구에 대한 미움이었다. 상처를 주고 균열을 일으키고 내게서 멀어지게 하고 그 친구를 탓하고 나는 다시금 죽을 생각에 골몰하려는 일종의 자살 계획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안전한 줄 알았던 사랑 속에서 가장 근본적인 위험은 두 인물의 XX 염색체가 아니었다. 그 위험의 실체는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사적인 불안 안에 있었다. 왜냐하면 헤어진 이후 그 친구는 계속해서 여성을 사랑하길 선택했고 나는 여성을 사랑하지 않기로 다짐했기 때문이다. 머지않아 다른 여자 아이의 손을 잡고 어딘가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인 줄 알았던 우리의 극명한 분열을 체감했다.
그 충격은 이별의 아픔이 아닌 자존심에 떨어졌다. 그 친구의 입장에서 우리의 관계는 문제 될 게 없었던 것이다. 서서히 그 친구와 나 사이를 의심하는 친구들이 생겨나면서 나는 죽고 싶다는 생각을 다시 시작했다. 나를 앉혀놓고 친구를 좋아하는 마음이 사랑이라고 착각할 수 있다는 엄마의 청천벽력은 나를 더욱 죽고 싶게 만들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여성을 사랑하면 어디에도 속하지 못할 것만 같은 소외감이 나를 가장 죽고 싶게 만들었다. 나를 죽고 싶게 했던 상황과 상상력과 마음이 그 친구에겐 귀찮게 거슬리는 파리 한 마리 정도의 날갯짓이었을 것이다. 그 용기는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귀하디 귀했다. 용기 없는 자의 다짐은 분명히 존재하는 나의 일면을, 일말의 용기를, 내게 잠재되어있는 가능성을 말살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나는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타인의 시선에 무력하게 굴복하고 모든 탓은 남에게 있으며 모진 말을 서슴없이 해버리는 사람이 되었다. 미친 듯이 엄마를 원망하고 엄마와 나는 도무지 섞일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동성 간의 연애에 몰두하는 사람들을 용기 있는 인간들이라고 마음대로 정의하는 사람이 되어버렸고 사랑의 순수함과 자연스러움에서 한 발자국 멀어졌다. 때로는 그 친구를 사귀었다는 사실 자체를 부끄러워하고 스스로 죄지은 것처럼 느끼고 심지어는 더럽혀졌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실을 외면하고 싶었다.
여름의 풀내음과 목덜미를 자잘하게 흐르는 땀방울은 운동장을 가르며 공을 차던 그 친구의 기다란 종아리와 어쩔 줄 몰라 그저 사랑이나 하고 앉았던 우리의 아픔과 ‘나는 왜 여성을 사랑해 버렸을까?’가 아닌 ‘걔는 왜 여성인 걸까?’라는 질문 속에 괴로이 맴도는 나의 유아적인 소망이, 또한 부끄러움, 나의 사춘기와 우리의 연애가 끝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직감하게 하는 슬픔 그리고 서운함, 다가오는 이별에 대한 안도감을 한꺼번에 느끼도록 한다. 고작 더운 날의 풀내음과 땀방울이 말이다. 사랑하지 않기로 다짐한다는 궤변은 그 어떤 변명도 필요로 하지 않다. 누군가는 사랑하고야 말기 때문이다. 하지만 17년 전의 향을 머금고 살아온 지금의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사랑하지 않기로 다짐하기 위해선 너무나 사랑해야 한다고. 그 대가로 나는 잠재되어 있는 외로움과 소외감, 혼자가 되고 싶지 않은 깊은 두려움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늘 이상한 사람이었다. 만약 로마가 그때 시작되었던 나의 향기를 맡고 있다면 어제와 같이 어미에게 안겨 잠들어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