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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혜미 Sep 23. 2024

로마를 부르면 함께 오는 것들

로마와 나, 여섯 번째 이야기

4년 전, 둘이서 들어간 펫샵을 셋이서 나왔을 때 쉽게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구식 건물에 위치해 계단을 밟다 강아지가 혀라도 깨물면 큰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신경 쓰이게 했던 건 자칫 강아지가 느끼게 될 소외감이었다. 이제 막 두근거리는 삶이 시작되었으나 강아지에게 불릴 이름이 없었던 것이다. 그건 큰일이었다. 세 식구 중 여자에게도 이름이 있고 남자에게도 이름이 있는데 강아지에게 이름이 없었다.


그건 중요했다. 모두가 가진 것을 누구 하나만 가지지 못했을 때 느끼는 소외감은 아주 오래가기 때문이다. 적어도 10년, 혹은 20년, 그보다 더 오래도록.


나는 짜장면 한 그릇을 먹고 싶었다. 어릴 적, 중국집에 가면 아빠, 엄마, 오빠의 자리엔 짜장면이 한 그릇씩 서빙되었고 내 자리엔 작은 접시가 달그락 놓였다. 세 식구는 먹을 입을 아껴 내 작은 접시에 음식을 한 젓가락씩 덜어주었다. 부모님은 내가 어려서 그렇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어른이기 때문에 짜장면을 한 그릇 먹는 것이 아니라, 짜장면 한 그릇을 먹어야 어른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학교에서 가장 작았다. 무엇이든 한 그릇씩 해치울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빠는 내게 정직하라고 가르쳤지만 때로는 어른들도 거짓말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른들이 모여서 하는 말과 흩어져서 하는 말이, 숨거나 가리어진 곳에서 하는 말이 제각기 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아빠가 거짓말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어쩌면 우리 집에 돈이 부족해서 내가 먹을 짜장면을 아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하필 내가 희생당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어쩌면 막내라 그랬을 것이다. 주변으로부터 사랑을 독차지하겠다는 말을 자주 들었고 때마다 그렇다고 대답했지만 사실 그것이 도리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만약 부모님이 가진 사랑을 모두 막내딸에게 주고 있다면 탕수육 시킬 돈을 아껴서 짜장면을 사주었을 거라고 나는 결론지었다.


욕심에 짜장면을 한 그릇 더 시키면 우리 집 가세가 기울까 나는 작은 접시를 서럽게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나 이기심은 언제나 무언가를 넘어서게 했고 결국 우리 집 가계 사정보다 내 몫이 더 중요하게 여겨진 순간이 왔다. 나는 울음을 참고 말했다. 내게도 한 그릇의 짜장면을 달라고. 부모님은 깜짝 놀랐다. 딸의 위가 늘었고 그러고 보니 키가 조금 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사실 내 키는 조금도 크지 않았다. 부모님은 소녀의 드문 요구와 그 뒤에 숨겨진 인내, 이기, 무안, 창피의 옹골찬 덩어리를 감지했을 뿐이었다. 복잡 미묘해진 소녀의 내면은 그녀의 성장 호르몬이 조금씩 새어 나오고 있음을 암시했다. 부모님은 그 호르몬의 향기를 맡아 아이가 문득 커 보였던 것이다. 나는 명백히 작았으나 그날은 짜장면 한 그릇을 어른처럼 먹어 치웠다.


결국 우리 네 식구가 네 그릇의 짜장면을 시키게 되었던 것처럼, 남자와 여자와 강아지는 각자의 밥그릇에 하루 세끼를 정당하게 챙겨 먹고, 원하는 자리에서 배변을 하고, 따뜻한 담요로 몸을 덮고, 무엇보다 제각기 마땅한 이름을 부여받을 권리가 있었다. 나는 우리가 가진 것을 이 아이도 갖게 해서 ‘우리’라는 바구니 안에 이 아이를 온전히 담아내고 싶었다.


“얘를 뭐라고 부르지?” 돌연 계단에 선 여자의 물음에 “로마 어때?” 남자가 대답했다. 남자가 어떤 연유에서 ‘로마’를 떠올렸는지 알 수 없었고 묻지도 않았지만, 만약 물어봤다면 오히려 의아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을지도 모르겠다. 여자와 남자는 함께 이탈리아를 여행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스페인 광장에서 다투던 중 석양에 넋을 놓았고 피에타 상에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렸다. 폼페이에 굳어있는 옛사람들을 보며 각자의 미래에 대한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그들이 사랑을 명분으로 연애를 하던 시절이었다. 아마도 남자는 그때를 떠올렸던 것 같다.


계단에 멈춰 선 여자의 머릿속에도 강아지 이름이 몇 개 지나갔지만 - 멍구, 망고, 애플, 찰리 등 – ‘로마’라는 이름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그 이름을 거절하는 것은 추억을 공유하자는 남자의 제안을 거절하는 것이었다. 대체로 건조한 남자의 촉촉한 제안을 거절하는 것이었다. 남자의 가장 개인적이고 사적인 추억의 모서리를 무시하는 것이었다. – 게다가 남자는 언제나 여자로부터 무시당한다고 생각했다. - 그리고 이탈리아에 위치한 도시 로마는 거부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마치 신의 이야기에 감명받은 천사가 지상에 그려낸 유화 같았다. 그래서 로마의 이름은 당연하게도 로마가 되었다. 나는 두 가지 의미에서 로마를 사랑했다.


이후 로마의 이름은 수백만 번 불렸고 로마는 비로소 자신의 이름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 심심할 때 불리는 로마, 간식을 줄 때 불리는 로마, 혼이 나는 로마, 로마의 이름은 매번 다른 색을 입고 있었다. 그럼에도 강아지는 자신의 이름이 불리는 냄새를 잘 알아차렸다. 심지어 그 모든 로마를 감별해 내어 적절하게 행동했다. 심심할 때 불리는 로마는 자신의 기분이 내키면 반응했고, 간식을 줄 때 불리는 로마는 언제나 생동감이 넘쳤으며, 혼이 나는 로마는 납작하고 깊은 곳에 끝없이 들어가 엄마의 인내심이 소진되기를 잠자코 기다렸다. 로마는 자신이 어떻게 불리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수많은 로마들이 쪼개어진 채로 불릴 수 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로마들은 결국 하나의 로마로 모아졌다. 그것이 나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강아지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다양한 로마들이 뒤엉켜 하나로 뭉쳐진다. “로마야.” 이탈리아의 아름다운 도시가 딸려온다. “로마야.” 펫샵의 계단과 그곳에 잠시 멈춰 선 남자와 여자가 딸려온다. “로마.” 스페인 광장의 다툼과 폼페이에 굳어 있는 옛사람이 딸려온다.


말티푸의 목걸이에 새겨진 두 글자는 받침도 없고 곡선도 없이 그 어떤 이름보다 단순 명료하지만 이혼 이후의 로마는 그 무엇보다 복잡다단해졌다. 하지만 모든 꼬리표를 태연하게 감내하고 또다시 로마를 사랑스럽게 불러야 하는 것이 이혼이었다. 두 사람의 인연이 끝을 맺는다고 해서, 하늘이 두 쪽 나고 땅이 갈라지고 과거와 현재가 물과 기름처럼 나뉘는 것으로 이 세상은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이 그렇다. 지나간 시간은 폼페이의 굳어진 옛사람처럼 굳어 있다. 20년간 잊지 못하는 짜장면 한 그릇과 소외감처럼 집요하게 굳어 있다. 세상은 기억이 축적된 바위이다. 그것을 바꾸기 위해선 눈물을 머금고 곡괭이를 쳐야 한다. 곡괭이를 치면 세상은 변하지 않고 의미가 변형된다. 눈물을 머금은 고행은 의미를 캐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위의 상처를 현재가 덮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기억의 바위 위에는 현재가 덧입힌다. 인간은 그것으로 위안 삼고 살아갈 수 있다. 여전히 그대로인 과거를 망각할 수 있다.


내가 이혼을 결정했던 이유 또한 세상의 속성 때문이었다. 다시 잘해보자는 수많은 다짐에도 서로 마음이 통하지 않았던 과거는 결코 달라질 수 없을 것 같았다. 망각은 최고의 정신치료제이지만 나는 그것을 들이켤 용기가 나지 않았다. 왜 그랬던 걸까?


나는 그와 함께 지은 로마의 이름을 무참히 내려칠 참이었다. 그래, 외면해 보자 다짐하며.


로마의 개명을 고민했다. 어미는 로마를 멍구, 망고, 애플, 찰리 등 내키는 대로 불러 보았다. 때마다 로마는 어미가 가여워 틀린 부름에도 애써 돌아봐 주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소한 발음으로 아이를 불러보아도 로마라고 불리었던 그 시간은 자리를 지켰다. 아무리 내려친들 얼마만큼의 의미로 변형시킬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때 나는 이미 굳어진 시간도 진심 어리게 사랑했었다는 것을 깨닫고 좌절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덧입혀진 의미는 아무리 거친 곡괭이질에도 쉽게 변형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이상 마음의 어떤 한구석도 편해지지 않았다.


로마를 찰리라고 부를 때 문득 내게 다가왔던 그 공허함은 역사에 스민 나의 마음과 나의 마음에 스민 그 어떤 역사도 변하지 않을 것임을 알려주었다.


그러므로 로마의 이름은 언제나 불편할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두 개의 로마 중 하나를 영영 버리더라도 남은 하나의 로마는 늘 불편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지막 하나 남은 나의 로마를 끝없이 사랑해야 할 것이다. 로마와 길고 긴 산책을 하며 지나간 시간과 멀어지기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이혼을 하면 불편한 것이 많아지고 불편한 것도 사랑해야 하는 것이 이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또 다른 어미는 혼자가 된 딸의 이름을 부른다.


“혜미야.”엄마는 나의 이름을 부르면 무엇이 딸려올까? 그 이름을 부르면 딸려오는 것이 너무도 많아 어미는 오늘도 밤잠을 설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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