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고요한 산책
로마와 나, 아홉 번째 이야기
걷는 시간과 걸을 사람이 필요한 2022년 가을이었다.
그때 나는 마곡의 작은 공부방에서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일주일 중 며칠은 어린이 쿠킹클래스에서 선생님으로 불렸다. 비어 있는 시간에는 주민센터에서 요가 수업을 들었고 햇살아래 로마를 풀어놓고 공을 던져주었다. 저녁엔 함께 사는 남자와 밥을 나누어 먹고 밤이 되면 약을 삼킨 후 눈을 감았다.
약은 매주 토요일 아침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처방받은 것이었다. 좋은 선생님을 만나 집중력 저하와 무기력에 대한 경험을 나누고 공감이 열어주는 틈새로 작은 숨을 몰아 쉬었다. 도무지 채워지지 않는 부족함과 줄어들지 않는 지나침이 밀려들었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물론 그건 내게 익숙한 일이었다. 나는 언제나 불안한 채 살아왔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렇지 않은 삶의 가능성을 품기 시작했다.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하고 싶었다. 죽음에 대한 환상을 멈추고 싶었다. 죽음을 빠져나오는 일은 내게 익숙하지 않았고 생으로 다가갈수록 불안을 더욱 세밀하게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아이러니하게도 불안이 삶의 주요한 화두가 되었다. 스스로의 불안에 질식해 자멸할 것 같았다. 그것을 달랠 길은 산책 밖에 없다고 또 다른 내가 속삭였다.
나는 그녀의 주장을 받아들였고 그렇게 희찬이를 만났다. 희찬이도 마침 걷는 시간과 걸을 사람이 필요한 존재였다. 그는 오랜 칩거를 마치고 그해 여름부터 동네를 쏘아 다니기 시작했다고 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필요한 것이 들어맞는 쓸쓸한 존재들이었다. 그래서 희찬이와의 산책을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지나고 보니 한 번쯤 주저할 걸 그랬나 싶다. 그렇게 추운 겨울이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더라면. 하지만 그 어떤 으스스한 마음보다 걷고 싶은 마음이 앞섰기 때문에, 나는 선뜻 그해 가을부터 겨울까지 희찬이와의 산책을 약속할 수 있었다. 그땐 우리가 맺은 약속을 결코 깨거나 저버릴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아직 알기 전이었다.
희찬이는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는 13살 남자애였다. 그 아이의 키가 조금 더 컸더라면 우리는 삼각지나 다른 중간지점에서 만났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희찬이는 동네 일대를 조금 걷는 것만이 허락된 초등학생이었다. 그래서 강서구에 거주하던 나는 중랑구까지 지하철 여행을 떠나야 했다. 길고 긴 여행을 동반하는 이 산책은 어느 복지센터에서 ‘봉사’이라는 명목 하에 주선해 준 것이었다.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씩 약속된 장소에서 만나 1시간 이상 함께 걸었다. 산책이 끝나갈 무렵엔 아이가 이끄는 걸음을 따라 집에 데려다주었고, 센터 담당자에게 산책이 마무리되었음을 보고했다.
희찬이는 특별하다면 특별한 아이였다. 다소 과묵하다고나 할까. 어쨌거나 우리가 함께 산을 오르거나 천을 건너고 배드민턴을 치거나 뛰어놀 때에도, 나는 아이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담당자는 그것이 병이라고 설명했고, 나는 그때 소리를 낼 줄 알지만 세상 안에서 소리 내기를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희찬이에 대해 두 가지의 거대한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바로 그가 키우는 고양이의 이름은 ‘롱롱이’라는 것, 그리고 그가 키우는 물고기 종은 ‘구피’라는 것이었다. 언젠가 센터 담당자는 분홍색 클립보드와 연필 한 자루를 전해주면서 아이와 소통을 시도해 보라고 했다. 희찬이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꼬부랑글씨를 써서 자신의 전부와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롱롱이. 구피.
이후에도 몇 번 꼬부랑 소통을 시도했지만 희찬이는 이제 들려줄 이야기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나 또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리고 묻고 싶지 않았다. 왠지 이 과묵한 아이는 세상 안에서 고쳐져야 할 인간, 별난 인간, 이해할 수 없는 인간으로 이름 지어져 살 것 같았다. 하지만 말을 한다고 해서 잘날 것도 없었고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어리석을 것도 없었다. 그것이 내가 경험한 세상이었다. 나 또한 가끔씩은 아무런 말도 하기 싫을 때가 있었는 걸. 그럼에도 가끔씩은 희찬이의 진심을 알 수 없어서 속상했다. 과묵하기로 한 선택은 얼마든지 존중할 수 있었지만 너무나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는 존중할 방도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만만했던 과묵함에 대한 존중 또한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나라는 인간은 궁금한 것이 너무 많았고 함부로 알고 싶어 했으며 그런 욕망이 오를수록 그 아이는 알고 싶은 구석이 점점 더 미지의 구렁텅이가 되어갔다. 그래서 나는 언젠가부터 아이를 만나면 아이의 이야기를 들을 궁리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 나는 늘 희찬이의 목에 걸려있는 휴대폰에 관심을 가졌다.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냐는 물음에 아이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아이의 카메라를 통해 그가 바라보는 세상을 이해해 볼 법도 했다. 우리는 곧 노을이 피어날 무렵까지 묵동천을 걷고 또 걸으면서 사진을 찍었다. 나는 쪼르르 몰려다니는 원앙 한 쌍이나 두루미과 조류를 발견하면 신중하게 한 두 번의 셔터를 눌렀다. 이에 반해, 아이는 수면을 뚫고 나와 호흡을 터트리는 포유류처럼 셔터를 눌러댔다. 싱거운 하늘이며, 잘아서 보이지도 않는 벌레나 흙, 진흙, 돌멩이, 말라비틀어진 과수목, 아무렇게나 솟아 있는 잡초까지.
그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일상에서 보고도 못 본채 하고, 안 보이면 안 보이는 대로 흘러갔던 자연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볼 기회가 생겼다. 나는 그 지점을 사랑했다. 오늘 하늘은 푸르렀고, 돌멩이는 젖어 있었고, 종종 날벌레가 지나쳤구나. 아, 그리고 물고기가 있었구나. 그랬구나. 물고기가 반짝거리고 있었구나. 자칫 독백 같은 말들은 희찬이의 시선에 대한 나의 대답이었다. 그러고 보니 희찬이는 과묵한 대신에 바삐 보고 있었구나, 어쩌면 세상을 서둘러 보느라 말을 하지 않았겠구나, 참으로 보이는 것이 많아서 걷고 또 걸었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카메라를 전면으로 돌리고 아이에게 가까이 붙어서 사진 한 장을 남겼다. 담당자가 행정 처리를 위해 머리를 긁적이며 요청한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매번 기뻤다. 셀카를 찍을 땐 아이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말려 올라갔고 나는 그것을 놓치지 않으려 눈도 깜빡이지 않을 정도였으니. 그것을 기록하는 일, 아이에게 메시지 한 줄과 사진을 전송하는 시간을 나는 설레어했다. 희찬이에게서 답장이 올까 기대해도 되는 유일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선택한 소통의 방식이 카메라였다면, 희찬이가 선택한 방식은 손가락이었다. 6년 넘게 입을 닫은 희찬이는 나름의 방식으로 자신의 요구를 표현하기도 했다. 가령, 따뜻한 코코아 한 잔이 간절할 때. 가을비를 맞으며 봉화산의 낙엽을 밟다 보니 어느새 눈이 포시럽게 쌓이는 겨울이 왔다. 눈이 압축되며 밟히는 소리는 걷는 일을 한층 더 흥미롭게 했지만, 나는 겨울에 오래도록 걸을 수 있는 인간이 아니었다. 혈기왕성한 아이는 한겨울에도 후리스 한 장만 걸치고는 계속해서 걷고 싶어 하는 모양이었는데, 나는 아무래도 센터에서 음료 값을 지원받아 실내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어떨지 양해를 구했다.
희찬이가 그 시간을 좋아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음료를 선택할 때만큼은 혹여 소통이 어긋날까 안달복달하는 것 같았다. 다행히 카페에는 커피가 아니면서도 희찬이가 좋아할 법한 달달한 음료가 많지 않아서 우리는 다섯 손가락을 활용할 수 있었다. 엄지부터 하나씩 접으며, 미숫가루, 코코아, 자몽 에이드, 포도 에이드… 나는 어느 때보다 아이의 반짝이는 눈을 유심히 바라보아야 했다. 눈빛은 가장 투명한 소통 창구지만 서둘러 의식의 커튼 뒤로 자취를 감추어 진심과 진실을 드러내지 않는 습관이 있다. 하지만 아이는 솔직하길 두려워하지 않는 타입이었고 그 눈빛은 이 카페의 공간과 내가 제안하는 선택지가 흡족하다고 말해주었다.
결국 희찬이는 때에 맞춰 검지 손가락을 빠르게 까딱거리면서 코코아가 먹고 싶다고 주장했다. 그러면 나는 또다시 엄지를 접으며 “차가운 거?”, 검지를 접으며 “따뜻한 거?” 물었다. 희찬이는 검지와 고개를 동시에 끄덕이며 따뜻한 거면 만족한다고 주장했다.
어떤 날은 신용카드를 내미는 찰나, 나의 옷깃을 잡아당기기도 했다. 그리곤 약지를 까딱거렸다. 포도 에이드로 바꿔달라는 뜻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각자가 가장 원하는 것을 꼼꼼하게 살펴보고 선택했다. 정교한 의사소통의 결실은 달콤했고 기분 좋게 종이를 펼쳐서 놀았다. 1시간 혹은 그 이상을 내내. 오목을 두거나, 땅따먹기를 하고, 서로를 그려주면서. 말이 전부인 듯한 세상 안에 말이 당연하지 않은 작은 세상이 중랑구에 잠시 머무르곤 했다.
그해 겨울, 눈은 녹았다가 다시 얼기도 했다. 그러다가 날이 조금이라도 푹 해지면 바닥은 질퍽이고 신발은 젖었다. 나는 얼어버린 발가락을 호호 불 수도 없어서 아주 천천히 미끄러지면서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그러다 예고도 없이 모든 생명체가 얼어버리는 날엔 걸음 하나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손발은 차가웠고 강서구에서 중랑구는 너무나 멀었다. 그런 날은 유난히 쓸쓸하고 적적해졌다. 돌아오는 대답도 없이 혼자서 웅얼거리는 말도 지겨워졌다. 하지만 희찬이는 단 한 번도 나의 문자 메시지에 답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약속을 깨고 싶어도 깰 수 없었다. 후리스 한 장을 걸친 아이가 약속 장소에 나와 몇 시간이고 나를 기다릴까 두려웠다. 하지만 아마도 그때쯤 내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나의 숭고한 봉사정신에 금이 가는 일이었다. 산책이 필요해서 만난 두 쓸쓸한 존재의 이해관계는 사라지고 어느 한 연약하고 불쌍한 아이에게 일방적으로 임하는 희생과 봉사, 기회만 닿으면 곧 포기해 버렸을 다소 짜증스러운 의무감만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나는 서서히 나 자신에게 실망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있었던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쓸쓸하고 적적한. 또한 희찬이와의 마지막 날이었다. 마지막 지하철 여행을 하는 동안, 한 주 전의 일이 생각났다. 아이가 당연히 알 것이라 짐작하고는 “다음 주가 마지막 산책인 거 알지?”라고 말했다. 세상엔 이토록 당연한 게 없다. 예고도 없이 추워지는 그쯤의 날들처럼 희찬이의 시선이 급격히 차가워졌다. 왠지 모르게 미안하고 서운하고 귀찮고도 울적한 마음을 애써 숨기면서, 삐죽삐죽 걸어오는 희찬이를 마지막으로 환영했다. 그 아이를 귀찮아하고 불쌍하게 여기고 나의 독백 또한 지겹게 느꼈던 복잡함, 죄책감, 미안함을 표현할 능력이 없어서 희찬이를 데리고 문구점에 가야만 했다. 남으면 집에 보낼 요량으로 그날 우리가 붙이고 놀 스티커를 샀고, 젤리를 고르고, 앞으로 희찬이가 혼자서 읽고 그리고 찢으며 놀 수 있는 놀이 책 한 권을 사서 쥐어 주었다. 그리고 아이는 검지 손가락 한 잔을 주문했다. 윗입술에 초콜릿을 잔뜩 묻혀가며 단맛을 삼키는 모습이 익숙해서 저릿했다.
카페를 나와 희찬이의 마지막 발걸음을 따라나섰다. 어디서 만나든 희찬이의 집까지는 늘 20분이고 30분이고 걸어야 하는 먼 거리에 있었다. 봉화산 둘레를 따라 언덕을 내리고 오르고, 아파트 단지에 들어갔다가 다시 빠져나왔다. 신호를 건너거나 놀이터를 지나고 좁은 골목길에 들어서기도 했다. 대단지 아파트가 빽빽하게 즐비한 신내동의 지리는 매주 걸어도 매번 헷갈렸다. 그렇게 도착한 곳에서 희찬이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아이는 평소처럼 한번 돌아보지도 않고 현관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3개월 간의 산책이 끝이 났다. 갑자기 희찬이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다. 사진을 봤다. 그중 아직 아이에게 보내지 않은 사진 한 장과 한 줄 문구를 적어 전송했다. 이렇게 내 인생에 슬쩍 끼어든 또 하나의 이야기가 끝을 맺었다고 생각했다.
마침 그날은 신내에 살고 있는 혜지가 집에서 아기 옷을 빨고 있었다. 이제 막 출산휴가를 시작한 혜지는 오늘이 아니면 몇 달 후에나 볼 수 있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만삭의 산모의 말에 나는 얼른 지도를 켜서 그녀를 만나러 갈 길을 찾았다. 그런데 그 순간, 희찬이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가슴에 돌덩이가 내려앉는 묵직한 말이었다. 오래전부터 걸어왔던 아이의 말이 이제야 도달해서 나를 따라다녔다. 산모에게 향하는 발걸음을 따라 파동이 일었다. 아이는 뜻밖에도 카메라도, 손가락도 아닌 지도를 통해 내게 말했다. 함께 걷고 싶다고.
우리가 겨울을 함께 보냈던 카페에서 희찬이 집까지는 5분이면 도달하는 가까운 거리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희찬이는 가을과 겨울의 내내 요리조리 돌고 돌아서 가장 먼 길로 나를 인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희찬이가 주장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걷고 싶었다는 것이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나와 조금 더 걷고 싶었다는 것. 희찬이는 걸을 사람이 필요하며 걸을 시간이 필요하고, 나와 걷는 것이 나쁘지 않으며, 어쩌면 함께 걷고 싶다는 메시지를 귀가 내내 건네 왔었다. 3개월에 걸쳐 전송된 메시지가 비로소 도착했다. 진작 알았더라면, 적어도 이런 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희찬이 집은 어딜 가나 꽤 오래 걸리는구나.” 나는 늘 조금 짜증이 나 있었던 것 같다.
그 이후로 종종 봉화산과 묵동천과 신내 일대의 지도를 들여다봤다. 산 위에서 길을 잃어 2시간이 넘도록 산책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희찬이는 내심 좋았을까 생각했다. 아무래도 그건 좀 과했을까? 나는 다리가 무척 아팠고 지하철에서 내내 졸았지만 저녁 밥맛은 좋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희찬아, 너는 그때 어땠어?” 내가 가장 묻고 싶은 말이다. 일상적이고 간결하고 소소하면서도 가벼이 과거가 드러나고 우리의 유대가 슬며시 생성되는 씨앗과 같은 질문. 그러나 질문할 겨를도 없이, 대답을 들을 겨를도 없이 2023년이 되었다. 나는 상담심리대학원에 입학해 ‘정신장애 진단 및 통계 편람’에 등재되어 있는 ‘선택적 함묵증’에 대해 잠시 배웠고 희찬이를 생각했다. 함묵이 5년 이상 진행되면 치료가 얼마나 어려운지 설명하는 교수님의 말씀을 도외시하고 싶었다. 다시 중랑구를 찾아 봄 햇살 아래에 희찬이와 산책이나 할 수 있다면 얼마나 반가울까? 따뜻한 날 산책을 한 적은 없었기 때문에 아마 나는 희찬이가 보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게 희찬이가 보고 싶었던 3월 17일과 5월 15일, 두 차례에 걸쳐서 연락을 했다. 희찬이가 좋아했던 로마 사진, 그리고 한 줄 문구와 함께.
마지막 산책 후 맞이했던 2022년 크리스마스 날, 남편과 크게 싸우고는 해질 무렵에 애써 화해를 했다. 나 빼고 모조리 행복한 듯한 세상에 배가 아팠다. 나는 청춘이던가? 아직 정의할 수 없었지만 나의 세월이 아깝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산책이 필요했다. 눈물 자국이 채 마르기도 전에 그와 나는 밖으로 나와 명동, 을지로, 인사동, 경복궁 등을 거쳐 종로 일대를 걷고 또 걸었다. 나는 한 겨울에 오래도록 걸을 수 있는 인간이었다.
2024년 겨울이 다가온다. 말없이 세상을 바라보던 그 아이가 생각나는 계절이다.